102화. 제주도의 인연
독자라니.
꼼짝없이 시부모를 모셔야 하는 상황이고, 명절 때는 얼굴 볼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지민이 술상을 내오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몰랐다.
기분이 나빠진 김세동이 말없이 술만 마시는 바람에 진혁도 보조를 맞추느라 많이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술도 엄청 셌다.
어떻게 방에 들어와 잤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그만 일어나요.”
억지로 눈을 떴다. 지민의 얼굴이 눈앞에 있는 것에 잠시 멍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 몇 시예요? 좀 일찍 깨워 주시지.”
“7시예요.”
“헉. 벌써 저녁이란 겁니까?”
“아니요. 아침 7시. 곧 아버지 들어오실 시간이니 얼른 씻고 아침 먹어요.”
“헐.”
주말에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없었다.
그래도 일단 일어는 나야 했다.
서둘러 씻고 나오자 김세동은 이미 들어와 있었다.
“자넨 시골에 들어와 살긴 틀렸군.”
“도시 사람들이 다 그렇지요. 우리도 처음 내려왔을 때 마을 사람들에게 잔소리 많이 들었잖아요.”
귀촌 후 제일 많이 겪는 어려움이 시골 사람들의 생활 리듬에 맞추는 것이었다.
더운 낮에 일하기 힘들어 일찍 일어나 선선할 때 일하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아, 주민과의 갈등으로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을 먹고 소화를 시킨다고 나왔다.
어제는 밤에 와서 몰랐는데 경치가 엄청 좋았다. 앞에 제주 바다가 펼쳐져 있었는데 파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깨끗했다.
안채 좌우로 2층 펜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조경에도 신경 쓴 듯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쟁반에 물컵을 받쳐 들고 여동생 지현이 다가왔다.
“엄마가 가져다주래요. 소화에 도움이 될 거라면서요.”
매실차였다.
지현도 눈이 큰 미인이었는데 분위기는 달랐다. 지민이 동양적인 느낌이라면 지현은 서구적이었다.
빈 컵을 건네면서 말했다.
“상당히 넓네요.”
“원래 야산이었는데 아빠가 포클레인을 배워서 이렇게 만드셨어요.”
“직접요?”
“네. 여기 집들도 아빠가 직접 지으신 거예요.”
“이걸 다 말입니까?”
“그래요. 처음에는 사는 집을 짓고, 다음 해에는 좌측 동을 짓고, 그다음 해에는 우측 동. 이렇게요. 가끔 인부 아저씨들을 쓰지만 대부분 혼자 다 하셨어요.”
“헐.”
“저기 돌담들도 아빠가 혼자서 쌓으신 거예요.”
할 말이 없는 것을 넘어서 입이 딱 벌어졌다.
놀러 오는 사람들은 경치 좋은 것만 보지만, 살아 본 사람들은 그걸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
진혁도 과거에 넓은 정원이 있는 집에 사는 것이 꿈이라 잘나갈 때 그런 집으로 이사 갔었는데 얼마 가지 못해 아파트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우리 아빠가 딸 바보세요. 큰딸 바보. 누가 와도 맘에 드시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실망하지 마세요.”
“아, 네.”
“힘내시고 앞으로 잘 부탁해요, 형부.”
진혁의 입이 쫙 찢어졌다.
김세동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김세동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여자들만 과일을 앞에 두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속은 좀 괜찮은가?”
“네. 매실차를 마셨더니 다 풀렸습니다.”
“다행이네.”
막 과일 하나를 입에 넣으려고 할 때 안방 문이 열리고 작업복 차림의 김세동이 나왔다.
아내가 물었다.
“일하시게요?”
“지난 태풍에 무너진 돌담을 다시 쌓으려고.”
“다음에 하세요, 지민이도 왔는데.”
“저놈도 이제 남자 친구랑 놀고 싶겠지. 나 일하러 간다.”
김세동이 마지막 말에 유독 힘을 주며 문을 열고 나갔다.
분위기가 엄청 어색했다.
원래는 지민과 함께 제주도를 둘러볼 작정이었다. 그래서 차를 렌트한 거였다.
진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혹시 편한 옷 있으면 좀 주세요.”
얼마 후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진혁이 혼자 무거운 돌을 쌓고 있는 김세동에게 다가갔다.
“저도 같이 쌓겠습니다.”
“놀러 간다면서?”
“아닙니다. 앞으로도 계속 올 건데 그때 봐도 됩니다.”
“그렇다면야.”
체력에는 자신 있는 진혁이었다. 게다가 회귀하면서 몸이 더 좋아졌다.
하지만 그런 진혁이 지칠 정도로 쌓아야 할 돌은 많았다.
점심 먹고 해가 떨어질 때서야 겨우 끝났다.
그만하고 저녁 먹으라는 말을 하려고 나온 어머니가 깨끗하게 단장된 담장을 보고 놀랐다.
“어머, 이걸 다 한 거예요? 인부 세 명이서 이틀은 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거야 어떻게든 일거리를 늘려서 돈 받아내려고 하는 소리지.”
“아무리 그래도…….”
“들어가지.”
김세동이 앞서 가자 그녀가 뒤에서 진혁에게 고생 많았다고 여러 번 말해 주는 바람에 오히려 민망했다.
그날 밤도 저녁을 먹고 술상이 나왔지만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펜션에 묵을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으로 안내하고 이런저런 주의 사항도 알려 줘야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설명했는데도 잘되지 않으면 인터폰을 누르는 바람에 다시 가서 봐 줘야 했다.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도 있어 12시가 넘어서야 조용해졌다.
손님맞이는 여자들이 해서 진혁은 김세동과 술을 마셨는데, 한 번 경험이 있어 그렇게 취하지는 않았다.
다음 날도 제주도 구경을 하지 못했다. 손님들이 떠난 방을 정리해야 했다.
자신들이 사용했으면 정리 좀 하고 가지, 몸만 빠져나가서 엉망이라 일이 만만치 않았다.
먼저 남자들이 쓰레기를 치우고 나면 여자들이 욕실과 주방을 청소했다. 그 후 침대보를 벗겨 나가면 남자들이 다시 청소기를 돌렸다.
복층 구조라 2인 1조로 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가져다 놓은 쓰레기를 다시 분리수거해야 했다.
한창 청소기를 돌리고 있을 때 밖에서 지현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좀 나와 보세요.”
밖으로 나오자 세 모녀가 한 중년 사내 앞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내의 손에는 박스가 들려 있었다.
김세동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뭐라고 물으시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영어도 못 하세요.”
사내도 답답한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附近有邮局吗? (근처에 우체국이 있습니까?)”
그때 뒤에서 진혁이 말했다.
“이 근처에 우체국이 어디인지 묻는데요?”
“우체국?”
“예. 아마 저 상자를 부치려고 묻는 것 같습니다.”
“해안 도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협재 우체국이 있어요. 그런데 오늘은 일요일이라 문을 안 열었을 텐데.”
지현의 말을 진혁이 그대로 중국인 사내에게 통역해 줬다.
“谢谢. (감사합니다.)”
“祝您旅途愉快.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중국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자 지현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우와……. 형부 짱.”
“이놈이 누구 보고 형부라고 해?”
김세동은 핀잔을 줬지만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그 역시 진혁의 능숙한 중국어 회화에 놀라고 있었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우리도 중국어를 좀 배워 둬야겠어요. 요즘 중국 관광객 문의 전화가 심심찮게 와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저기 김 영감님네 과수원도 중국인이 샀다고 하더라고.”
진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유커들이 본격적으로 몰려오는 게 이쯤부터였다.
그들은 단순히 관광만 하는 게 아니라 경제 성장으로 이룩한 부를 바탕으로 세계 곳곳의 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제주도도 투자 대상 중 한 곳이라 나중에 국부 유출이네 뭐네 하면서 말들이 많았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세동이 다시 청소기를 들고 들어가는 모습에 얼른 따라 들어갔다.
청소가 다 끝났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니 서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됐다.
일어나는 진혁을 보고 어머니가 미안해했다.
“일만 하다가 가서 어떻게 해요.”
“아닙니다. 그보다 저희가 가고 나면 두 분이서 고생하실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자주 오겠습니다.”
“그래요. 자주 와요. 그때는 일은 하지 말고 지민이랑 여기저기 많이 다녀요.”
“알겠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아버님.”
“고생했네. 조심히 올라가게.”
김세동이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인사를 받았다.
“엄마, 아빠, 저도 가 볼게요.”
“언니, 잠깐만…….”
좀 전부터 보이지 않던 지현이 2층에서 내려왔는데 커다란 캐리어 가방을 끌고 있었다.
“너 어디 가?”
“응, 서울. 아빠가 허락했어.”
“아빠가?”
“다 큰 여자가 혼자 사는 거 아니다. 서울은 공무원도 많이 뽑는다고 해서 올라가라고 했다.”
“빨리 가요.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네.”
지현이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진혁의 손을 잡아끌었다.
결국 세 사람이 차를 타고 떠났다.
멀어지는 차를 보고 아내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 사람 같은데, 당신은 어때요?”
“더 지켜봐야지. 그래도 힘은 좀 쓰더라고.”
돌아서 먼저 들어가는 김세동도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 * *
월요일에 사무실에 출근한 진혁은 박이동부터 불렀다.
“제주도 땅에 투자를 하려고 하는데 경매 쪽으로 알아봐 주십시오.”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일단 25억 정도 투자하고 점진적으로 늘려 갈 작정입니다.”
“염두에 두신 지역은 있으신지요?”
“글쎄요. 관광지 주변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성산이나 한림같이.”
“알겠습니다. 리스트를 작성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박이동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
정호영의 어쭙잖은 자존심으로 50억이란 돈이 갑자기 생겼다.
25억은 투자금이라 두기로 하고, 나머지 25억은 제주도 땅에 묶어 두기로 했다.
잠시 후 김상조와 신용찬이 들어와 가맹점 오픈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 준비가 마무리되어 한 달간 순차적으로 오픈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 * *
한 달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전국 열 개 가맹점들의 오픈식 행사에 참석하고 본사 조직도 정비했다.
지민도 경력 사원으로 채용돼 지원팀장이 됐다.
진혁은 채용에 전혀 개입하지 않은 것은 물론, 회사에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
주말이면 강릉과 제주를 오가며 양쪽 집안에 인사를 다녔다.
그러는 한편 이집트의 일에도 신경 쓰다 보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이었다.
하지만 지민과 함께하는 일이어서인지 피곤한 줄 몰랐다.
겨우 한숨을 돌릴 때쯤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급히 공항으로 가 비행기를 탔다.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하자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JK모건 젯다 지점장 스미스였다.
“스미스 씨가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초청하신 분인데 마중하는 게 당연하지요. 바쁘실 텐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머리도 식히고,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리무진을 타고 도착한 곳은 JK모건 싱가포르 지점이었다. 지점장실에는 두 명의 백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은 요한슨 지점장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베나토른의 알렉스 삼부 회장님이십니다.”
“서진혁입니다.”
“유명하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색하는 요한슨에 비해 삼부 회장의 얼굴은 좋지 못했다.
차를 마시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요한슨이 본론을 꺼냈다.
“스미스 지점장님께 부탁해서 서 사장님을 모신 건 온라인 쇼핑몰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짧은 기간에 쑤피넷을 몇 배로 키우신 것을 압니다.”
“그건 하이다르 회장님이 이루신 일이지요. 전 운 좋게 그분과 함께 있었던 것뿐입니다. 조언은 그분께 듣는 게 맞을 것 같군요.”
“그렇지 않아도 하이다르 회장님을 먼저 찾아뵀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오히려 서 사장님을 칭찬하시며 추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미스 지점장님께 부탁해서 모신 겁니다. 도와주십시오.”
요한슨에 이어 스미스가 나섰다.
“베나토른에서 ‘자포라(Zapora)’라는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자포라?”
“그렇습니다. 작년에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베트남에 서비스를 막 시작해서 잘 모르실 겁니다.”
되묻는 진혁의 태도에 스미스는 그가 처음 듣는 이름이라 그런 것이라 오해했다. 하지만 진혁은 자포라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자포라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