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동남아시아로
자포라는 향후 동남아의 알리바마라 불릴 정도로 온라인 유통 시장의 강자가 될 업체다. 실제로 나중에 알리바마가 인수하게 된다.
진혁의 호기심이 급상승했다.
하지만 그걸 밖으로 내보일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일부러 무표정을 유지했다.
요한슨이 말을 이었다.
“오픈한 지 일 년이 지나가는데 실적이 미미합니다. 특히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심각할 지경입니다.”
“동남아시아의 낙후된 유통 인프라와 인터넷 쇼핑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 정서로 시간이 필요해서 점진적으로 진행하자고 했던 거요. 이제 와서 모든 책임을 우리에게 묻는 건 아니지 않소?”
삼부 회장이 볼멘소리를 냈다.
베나토른은 처음 독일 창업센터 창고에서 고객에게 재고를 판매하는 비즈니스 모델로 시작했는데 대박이었다.
그 후 아마존과 알리바마의 성장에 고무된 세계적인 투자자들의 부추김으로 자포라 사이트를 동남아시아에 오픈하고 공격적인 투자를 한 게 화근이 되었다.
준비하지 않고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는 바람에 금방 재정적인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스미스가 중재에 나섰다.
“지금은 누굴 탓할 상황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합니다.”
“…….”
“중동도 동남아 못지않게 유통 인프라와 온라인 시장이 열악합니다. 여기 미스터 서는 이집트에서 알쇼핑을 성공시켰고, 쑤피넷과 함께 인근 여러 나라에 진출해 크게 성장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모시고 온 것이니 일단 말씀부터 들어 보도록 하죠.”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진혁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중동은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곳이고, 무슬림이라는 종교적인 공통체로 묶여 있어서 가능했던 겁니다. 동남아는 생소합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인도네시아 무슬림 비율은 87%고, 말레이시아도 61%나 됩니다. 동남아시아 무슬림 인구가 2억 5천이 넘습니다. 알쇼핑의 제품이라면 분명 여기서도 먹힙니다.”
“도와주십시오.”
요한슨이 다시 한번 머리를 숙였다.
JK모건에서도 상당한 투자금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진혁은 이미 이 일에 끼어들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바로 밝히는 것은 향후 있을 협상에 절대 유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한발 빼는 모양새를 취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고, 제가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모든 조건을 수용할 테니 도와주십시오.”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리는 요한슨의 모습에 진혁이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검토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저희가 모든 편의는 제공하겠습니다. 좋은 쪽으로 결정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결정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일단 오늘 만남은 이쯤에서 끝냈다.
요한슨이 잡아 준 오차드역 인근 만다린 호텔의 스위트룸에 여장을 풀었다.
이집트에 전화해 사정을 알리고 하마드 사장에게 실무진을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저녁은 스미스 지점장과 먹었다.
“요한슨이 코너에 몰렸습니다. 이 일을 잘 해결하지 못하면 재계약이 힘들 것 같다고 합니다.”
“삼부 회장님 말씀대로 너무 무리하게 진행된 일입니다.”
“요한슨도 그 점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본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였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스미스가 화제를 바꿨다.
“아우다 그룹의 아메만 회장님이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말씀을 꼭 좀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투자회사 분위기가 아주 좋다고 합니다.”
“저희 쪽도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말라고 하십시오.”
“물론 그렇지만, 같이 투자했는데 서 사장님만 안 좋은 일로 빠지셨잖습니까. 저희만 수익을 보는 것 같아 저도 마음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인력으로 안 되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다 인연이 있어야지요. 전 괜찮으니 지점장님도 부담 느끼지 마십시오.”
진혁은 가볍게 넘겼지만 스미스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진혁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고, 앞으로도 더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스미스가 주위를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이집트 군부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군 관계자들이 미국 측은 물론 중동의 다른 나라와 은밀히 접촉하고 있다고 합니다. 뭔가 일을 벌이려는 모양입니다.”
“하페즈 대통령의 전횡이 너무 심각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집트에 미래는 없습니다.”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무슬림 형제단이 쉽게 권력을 놓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 죽어나는 것은 국민들뿐이다. 답답한 현실이었다.
다음 날 도착한 하마드와 실무진이 요한슨이 제공한 자포라의 자료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재무제표는 물론 인터넷 쇼핑몰의 일별 접속자 수와 판매 실적까지, 그 자료가 방대해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사이 진혁은 하마드와 함께 자포라가 서비스하는 동남아 5개국을 돌아봤다. 자료와 실제로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JK모건 싱가포르 지점장실에 다시 모인 것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더 참석했는데, 알라딘 유통의 하마드 사장과 자포라의 바트너 사장이었다.
진혁이 서두를 꺼냈다.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자포라 쪽에서 고전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 저희가 도움을 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기본은 쑤피넷과 마찬가지로 몰인몰 형태로 가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건 현재 구현된 기능이 없습니다. 셀러 지위를 드릴 테니 그걸 이용하시면 좋겠습니다.”
바트너 사장이 바로 반대하고 나섰다.
가만있을 하마드가 아니었다.
“뭔가 착각하시나 봅니다. 우리가 필요에 의해서 들어가겠다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쪽에서 원해서 하는 일인데 당연히 기능을 개발해서 넣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현재 저희의 여력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셀러로 하시다가…….”
“그럼 이쯤에서 이야기를 접지요. 몰인몰 기능을 갖춘 다음에 이야기하는 것으로 합시다.”
진혁이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삼부 회장은 기술자 출신이었다. 그가 몰인몰 기능을 추가할 능력이 없을 리가 없었다.
이러는 이유는 알쇼핑의 진출을 노골적으로 막겠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진혁이 당장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 요한슨이 얼른 끼어들었다.
“현재 자포라의 자금 여력이 없어 그런 거니 이해해 주십시오. 회장님이 요청하신 투자금의 일부를 승인해 줄 테니 몰인몰 기능을 우선 개발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저희도 더 이상 투자하지 않겠습니다.”
“끙, 알겠소. 몰인몰 형태로 갑시다.”
삼부 회장이 마지못해 승낙했다. 운영 자금이 바닥난 상태라 JK모건에 자금 요청을 해 놓은 상황이었다.
알쇼핑이 끼어드는 게 탐탁지 않지만 이쪽 사정이 더 급하다 보니 받아들여야만 했다.
진혁의 눈짓을 받은 하마드가 가져간 자료를 나눠 주고 말했다.
“사장님 지시로 저희 실무진이 자포라의 활성화 방안을 만들어 봤습니다.”
반색하는 요한슨과 스미스와 달리 삼부와 비트만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자신들의 치부가 밝혀지는 자리였다.
“현재 자포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용자에 대한 배려가 매우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건…….”
“일단 들읍시다.”
비트만이 끼어들려는 것을 요한슨이 차가운 목소리로 막았다.
“마찬가지로 셀러에 대한 명확한 정책도 보이지 않습니다. 판매 실적이 우수한 셀러들에 대한 혜택을 대폭 강화할 것을 권합니다. 이는 단순히 자포라뿐만 아니라 경쟁 업체에서 활동하는 ‘파워 딜러’의 유입을 가져올 겁니다.”
“좋은 아이디어 같군요.”
“가장 핵심은 경쟁 업체와 차별화된 자포라의 특징이 없다는 겁니다.”
“그건 우리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까?”
이번 질문의 대답은 진혁이 했다.
“전 빠른 배송이 그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닙니다만, 거기는 대중교통마저 변변치 않은 곳입니다. 배송 시스템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걸 구축하려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갈 겁니다.”
삼부 회장이 다시 나서서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술자 출신 CEO가 갖는 한계이기도 했다.
“혹시 ‘고젝(Go-Jek)’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
“인도네시아의 오토바이 택시를 부르는 말입니다. ‘오젝(O-Jek)’이란 회사에서 개발한 그 지역에 특화된 서비스입니다.”
“설마 그걸 배송에 이용하자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주문량의 80%가 48시간 안에 배송이 가능할 거라는 게 우리의 판단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택시비가 더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
“물량 단위로 계약한다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르자토 CEO의 인터뷰 기사를 봤는데, 운송업뿐만 아니라 향후 물건 배송, 음식 배달, 장 보기, 청소, 미용, 마사지 등으로 서비스 영역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하더군요. 우리와 딱 맞지 않습니까?”
“아!”
“게다가 JK모건에서도 오젝에 투자했더군요. 양쪽 모두에게 시너지가 되는 일입니다.”
이제 삼부 회장과 바트너 사장의 얼굴에도 감탄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왜 JK모건이 그를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막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할 때 스미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염치없는 부탁입니다만 서 사장님께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맡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2대 주주로 당연히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표 대결로 가더라도 다른 투자자들도 우리와 생각이 다르지 않을 겁니다.”
삼부 회장이 나섰다가 요한슨의 서슬 퍼런 말에 더 이상 반발하지 못했다.
비록 자신이 세운 회사지만 그동안 투자를 받느라 현재 지분은 40%도 채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진혁이 난색을 표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말씀드렸듯이 한국에서 벌이고 있는 사업이 있어서 제가 여력이 안 됩니다.”
“직접 CEO를 맡아 주시면 좋지만 거기까지 바라는 건 아닙니다. 여기 계시는 하마드 사장님이라도 보내 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제가 이집트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라 하마드 사장님도 중동을 떠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요한슨의 난감한 시선을 받은 스미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와주십시오. 사례를 충분히 하겠습니다.”
“스미스 지점장님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참 난감합니다. 방법이 있기는 한데…….”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는 진혁에 요한슨은 몸이 달았다.
“어떤 조건이라도 수용할 테니 말씀해 주십시오.”
“자포라 지분의 일부를 취득하게 해 주십시오. 그럼 내 회사라는 생각으로 전력투구하겠습니다.”
“그건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삼부 회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반대했다.
투자를 받을 때는 좋았지만 그로 인해 지분이 줄자 지금처럼 끊임없이 간섭을 받아야 했다.
지금이라도 여력만 되면 그 돈 다 돌려주고 지분을 회수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혁이 망설임 없이 일어났다.
“회장님 생각이 그러시다면 이번 일에서 깨끗하게 손을 떼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저도 여력이 안 되거든요.”
“그렇다고 이렇게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지점장님과의 인연으로 온 자리입니다. 설마 저보고 무료봉사를 해 달라는 건 아니시죠?”
“알겠습니다. 일단 숙소로 가셔서 쉬고 계십시오. 제가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진혁은 인사를 하고 나왔다.
결정은 저들의 몫이었다.
스미스가 다시 찾아온 것은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났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지독한 양반!”
아니나 다를까, 스미스가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협상이 쉽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