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매운 라면
“그럼 자네가 중동에 고래표 통조림의 판로를 뚫었다는 그 젊은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회장님.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동성F&B의 서진혁입니다.”
문기영이 일어났는데 무릎이 안 좋은지 비틀거렸다. 진혁이 얼른 부축했다.
“쪼그리고 일하시는 건 무릎 관절에 좋지 않으십니다.”
“어차피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껴서 뭐 해. 괜찮아.”
“아직도 정정하신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리고 사실 때까지는 건강하셔야지요.”
“오래 살아서 뭐 해? 여길 보고 있으면 여한은 없네.”
“고향은 가 보셔야지요.”
“……!”
“저희 할아버님도 실향민이셨습니다. 고향에 가 보시지 못하고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래도 중국을 통해 북한 땅을 밟아 보셔서 여한은 없으시다며 웃으며 가셨습니다.”
문기영도 실향민이었다.
“남은 자식들을 위해 하신 말씀이지, 고향이 왜 가 보고 싶지 않으셨겠나?”
“그래서 유언으로 화장해서 유골을 가지고 있다가 통일이 되면 고향에 묻어 달라고 하셨던가 봅니다.”
“나도 그럴 참인데. 아무튼 자네와 인연이 남다른 것 같으니 내려가세. 시원한 물이나 마시면서 옛날이야기나 해 보세.”
문기영을 따라 얼마쯤 걸어가자 제각이 나왔다.
마루에 걸터앉아 기다리자 문기영이 쟁반도 없이 물컵을 가지고 와 내밀었다.
“손님이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대접할 게 없네.”
“아닙니다. 물맛이 아주 꿀맛입니다.”
진혁이 시원하게 들이켰다.
“이집트에서 사업한다면서 동성은 어떻게 인수하게 된 건가?”
“제가 태후물산 상사맨 출신입니다.”
진혁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들려주었다.
아랍의 봄 여파로 지사가 폐쇄되어 독립하게 된 경위, 알쇼핑을 오픈해 거기에 필요한 상품들을 직접 생산하려고 화장품과 통조림 공장을 세운 이야기까지 들려줬다.
“아하, 통조림 기술이 필요해서 인수한 거군.”
“처음에는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만, 사업이 생각보다 잘되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그쪽 사업이 커지고 있습니다.”
진혁은 구룡포 공장뿐만 아니라 산청의 공장까지 인수하게 된 과정을 들려줬다.
이야기를 듣는 문기영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물들어 갔다.
“어디건 그런 정신 나간 놈들이 있지. 그런 것들 때문에 선량한 사업가들까지 욕먹는 거야.”
“맞습니다. 좋은 제품을 만들면 소비자가 알아서 사 주고 돈도 자연히 벌 텐데, 돈부터 생각하니 망한 게 당연하지요.”
“제대로 봤네. 자고로 모든 사업의 핵심은 좋은 제품을 공급하는 거야. 고래표 통조림을 대한민국 브랜드로 만든 박영환 회장도 ‘기업가는 국가 자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며 제품 개발에 한시도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지.”
“그런 분들의 정신이 후대에 이어지지 못하고 망가져 버린 게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래도 자네가 이렇게 다시 살려 놨으니 된 것 아니겠나? 그분과는 비록 특별한 친분은 없었지만 6・25 동란 후 어려운 시기 국가 발전을 위해 매진한 같은 동료였지. 그분의 업적이 사라지지 않게 해 줘서 고맙네.”
고개까지 숙이는 모습에 진혁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회장님 같은 선배 사업가분들이 계셔서 이 나라가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국내에서는 매일 불만의 목소리를 쏟아내지만 해외에 나가면 대한민국 국민이 얼마나 잘사는지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후대의 한 사람으로서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이번에는 진혁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문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하느라 한창 바쁠 나이인데, 나 같은 늙은이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어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회장님께 라면을 배우고 싶습니다.”
“라면을?”
“그렇습니다. 제가 이번에 동남아시아로 사업을 확대하게 됐는데 대표 상품으로 라면을 내세울까 합니다.”
“거기도 라면을 많이들 먹지.”
“그렇습니다. 인도네시아만 해도 세계 2위 라면 소비국이고, 베트남, 태국, 필리핀도 10위권 안에 들 정도로 큰 시장입니다.”
문기영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가 라면 사업을 시작한 것은 국내의 어려운 식량난으로 굶주리는 동포들 때문이었다.
국민들이 더 이상 배고프지 않게 되고 사업도 안정되면 해외로 나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근거 없는 소송으로 7년을 허무하게 보내야 했고, 이어진 IMF는 지금까지 이룬 것을 지켜내기도 벅찼다.
그사이 라면 업계 부동의 1위 자리는 경쟁사의 차지가 됐고, 자신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었다.
결국 꿈을 가슴에 묻고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준 뒤 여기로 내려왔다.
문기영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인생이 참 덧없는 것 같아. 저 구름처럼 말이야.”
“저 구름이 있어 비가 내리고, 그것으로 작물이 자랍니다. 회장님의 경험이 꼭 필요합니다.”
“고맙네만 내 모든 것은 회사에 물려주었네. 내가 말해 놓을 테니 찾아가면 도움을 줄 거야.”
“회장님이 물려주신 건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라면을 만드는 기술뿐입니다. 동남아시아인들의 입맛이 어찌 우리와 같겠습니까?”
“……!”
“그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 주십시오. 제가 죽기 살기로 팔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과거의 명성도 되찾고, 회장님의 못다 한 꿈도 이루십시오.”
문기영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묻었다고 생각했던 꿈이 다시 떠올랐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기회가 남았다는 게 느껴졌다.
“어떤 라면이 필요한가?”
“매운 라면입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엄청나게 매운 라면?”
“그렇습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매운 음식과 면 요리를 즐겨 먹습니다. 매 식사를 짜베(Cabe)라는 고추와 양파, 생강, 마늘, 그리고 삼발(Sambal)이라는 아주 매운 양념을 곁들여 먹을 정도입니다.”
“매운 맛에는 중독성이 있지. 그렇다고 무조건 매워서는 안 돼. 끝 맛이 달콤한 게 감칠맛이 나야 해.”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회장님이 꼭 필요한 겁니다. 도와주십시오.”
“오늘은 일단 돌아가게. 내 조만간 연락함세.”
“꼭 도와주실 거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진혁이 명함을 건네주고 물러났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 후 바로 강릉으로 넘어간 진혁은 오랜만에 부모님의 집에서 편하게 쉬었다.
지민이 일이 바빠 내려오지 못해 어머니가 아쉬워했지만 진혁은 전혀 아니었다. 회사에서 매일 보니까.
* * *
월요일에 출근한 진혁은 회의실로 갔다.
홍보 전략 회의를 하기로 했다.
신용찬과 프랜차이즈 사업팀 전원이 모였고, 김상조 부사장도 참석했다.
지민도 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진혁이 자리에 앉자 신용찬이 회의를 진행했다.
준비한 자료를 화면에 띄워 놓고 그 동안 준비한 홍보 방안에 대해 보고를 했다.
TV를 포함한 언론 매체에 대한 홍보, 전단지를 통한 거리 홍보, 사은품과 쿠폰을 이용한 매장 홍보 등 현존하는 모든 홍보 방안이 전부 거론되어 있었다.
발표가 끝나자 묵묵히 보고를 듣던 진혁이 물었다.
“프랜차이즈 사업팀이 생각하는 최적의 홍보 방안은 뭡니까?”
“가장 효과가 큰 것은 역시 TV를 통한 홍보인데, 아무래도 금액이 큰 게 마음에 걸립니다.”
“타깃층은 어디로 보고 있습니까?”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은 젊은 여성이 주 타깃층이라고 생각하고 접근 중입니다.”
진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다들 시선을 피할 때 유독 지민만 똑바로 쳐다보다 손을 들었다.
“김지민 팀장님, 말씀해 보세요.”
“국내 홍보보다는 해외 홍보에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외 홍보요?”
“그렇습니다. 할랄 여행은 무슬림 식당입니다. 그들에 대한 홍보가 선행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진혁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자신의 생각과 같았다.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셨나요?”
“현지 여행사에게 ‘할랄 여행’을 적극적으로 홍보해 관광 코스에 포함시키는 방안이 가장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이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김 팀장에게 제가 한 수 배웠습니다.”
신용찬이 활짝 핀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홍보 방안을 발표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확실하게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너무 국내 소비자에만 집착했었다.
그런데 지민의 말을 듣자 머리가 환하게 밝아 오는 느낌을 받았다.
정확하게 핵심을 짚고 있었다.
앞으로 지민을 좀 더 활용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진혁이 그 모습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노리고 일부러 신용찬에게 물었던 것이다.
위에서 지시하면 편하긴 하지만 효율은 떨어진다. 스스로 길을 찾아가게 하는 게 본인들을 위해서도 좋았다.
“좋습니다. 그럼 해외 홍보 쪽으로 방안을 잡고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워서 보고하세요.”
“알겠습니다.”
“김 팀장님의 생각에 한 가지 더하자면, 해외 여행사에 단순히 홍보하기보다는 아예 이쪽에서 관광 상품을 개발해서 제안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역제안을 하자는 말씀입니까?”
“그렇지요. 한국은 한국인이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럼 또 고생들 해 주십시오.”
일어나 나가는 진혁의 뒷모습에 직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자신들이 며칠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것을 단숨에 뛰어넘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축하 인사를 받는 지민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언제나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진혁의 모습이 뿌듯하면서도 승부욕에 불타게 했다.
사랑은 사랑이고, 일은 일이었다.
반드시 다음번에는 그를 감탄하게 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 * *
다음 날 진혁은 김상조와 함께 성북구에 있는 대한푸드 본사를 찾아갔다.
요즘 대한그룹 분위기는 묘했다.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명예 회장 문기영이 갑자기 등장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회장실에서 문기영과 차를 마시고 회의장으로 가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 회장인 아들 문종윤과 며느리이며 대한푸드의 사장인 이상미, 그리고 식품사업부 임원들이었다.
진혁이 인사를 하고 연단에 섰다.
“동성F&B의 서진혁입니다. 지금부터 동남아시아 시장 진출 방안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불이 꺼지고 김상조가 화면을 띄웠다.
진혁의 발표는 언제 들어도 깔끔했다. 군더더기가 없으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화려한 미사어구는 자제하고 실질적인 자료로 그 자리를 채웠다.
발표 시간도 15분으로 적당했고, 그동안 누구도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발표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다들 박수로 화답을 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이상미 사장만 팔짱을 낀 채 진혁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도 진혁은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이미 중동에서 화장품과 통조림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겪은 경험을 적절히 섞어 가며 답했기에 질문자도 쉽게 이해했다.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이상미가 눈살을 찌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발표대로라면 충분히 성공 가능한 사업인데 굳이 우리 대한푸드를 택한 이유가 뭔가요?”
“문기영 회장님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번 사업의 성공 여부는 현지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냐는 것입니다. 평생을 라면이라는 한 우물을 파신 회장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생산해서 판매하는 게 맞지 않나요?”
“물론 그것도 한 방법일 겁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유통 채널을 확보해야 하는데, 현재 회사 상황에서 그게 가능하시겠습니까?”
말문이 막힌 이상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한푸드의 작년 실적은 겨우 적자를 면하는 수준이었다.
지난해 말 ‘대한라면’이 히트하면서 주가가 일시 상승했지만 ‘판매 1위’라는 허위 과장 보도 문제로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금은 시장 점유율이 15%대, 라면 업계 3위로 내려앉을 정도로 실적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신 시장 개척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상미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