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제품 준비
“발표 자료에 따르면 현지화를 위한 제품의 선행 조건이 ‘할랄 인증’이라고 했는데, 그럼 별도의 생산 라인을 세워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할랄 인증은 단순히 제품만 보는 게 아니라 재료에서부터 생산 과정, 유통까지 전 과정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기존 라인에서는 안 됩니다.”
“생산 라인을 하나 증설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아세요?”
“100억 정도가 들어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진혁의 거침없는 답변에 이상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좀 전에 우리 회사 사정을 언급했는데, 그런 큰돈이 들어가는 일을 당신의 말만 믿고 결정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제가 답변하기에 부적절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가능성을 말씀드린 것이고, 선택은 여기 모이신 분들이 하시는 겁니다. 다만 이것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국내 시장은 포화고, 최대 중국 시장에서는 경쟁 업체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시장 진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건 우리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진혁은 순순히 시인했다. 그녀의 말이 옳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할 말을 이미 다 해서였다.
진혁과 김상조는 회의장을 나왔다.
대한 그룹 임원들끼리 논의를 통해 결정해야 하는 일이라 외부인인 그들이 참석할 수는 없었다.
회장실에서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지루할 때쯤 문기영 회장이 들어왔는데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결정이 났습니까?”
“아직 아니야. 회사 사정이 생각보다 좋지 않더군. 공장을 증설할 자금도 마련하지 못할 만큼. 결론이 나지 않아 잠깐 정회했네.”
진혁이 혀를 찼다.
회사 사정이 어려운 것은 맞았다. 하지만 대기업이 100억을 만들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건 자신과 같이 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거나, 아니면 다른 의도로 반대한다는 의미였다.
진혁이 말했다.
“상황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다른 회사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안 돼. 이 일은 반드시 내가 해야 해. 내 지분을 매각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돈은 저희가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경우에는 ODM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건 안 되지. 내가 만든 제품에 다른 상표를 붙일 수는 없네.”
문기영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한참 논의하던 두 사람은 모종의 합의를 보고 함께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문기영이 먼저 연단에 섰다.
“다들 알겠지만 난 이 회사에 평생을 바쳤다. 그런 내게 남은 마지막 꿈이 있다. 해외에서도 내가 만든 라면이 최고로 인정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래서 이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투자금이 없다면 내 지분을 매각해서라도 해야겠다.”
“안 됩니다, 아버님.”
문종윤 회장이 즉시 반대하고 나섰다.
그렇게 되면 경영권 방어가 어려워진다.
“여기 서 사장이 직접 투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반대했다. ODM으로 자신의 상표를 붙여야 한다는 조건 때문이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받아들이지 못한다.”
“당연합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아버님.”
문종윤 회장이 벌게진 눈으로 얼른 고개를 숙였다.
누구보다도 문기영 회장의 꿈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공장 라인 하나 증설해 주지 못하고 포기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능함이 죄스러웠다.
그 모습에 진혁이 결국 나섰다.
이상미 사장을 직시했다. 이 일의 결정권자는 그녀라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공장 증설에 들어가는 자금 마련이 문제인겁니까?”
“맞아요. 우리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어요.”
“자금 문제만 해결되면 이 사업을 진행하실 겁니까?”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하지만 투자금을 받을 수는 없어요. 명예 회장님이 반대하신 것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투자금 대신 선주문을 넣어 드리지요. 100억 원어치.”
“……!”
이상미는 물론 다른 사람도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설마 진혁이 이런 강수까지 내놓을 줄은 몰랐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이상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 100억 원을 회수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라면을 팔아야 하는지 알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압니다. 하지만 전 자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만 해도 연간 150억 봉을 소비하는 나라입니다. 정상 궤도에만 오르면 100억은 한 달분 매출도 안 될 겁니다.”
“…….”
“그럼 이제 문제가 해결된 건가요?”
이상미도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다.
이어진 실무 협상에서 진혁은 100억을 먼저 내놓는 값을 톡톡히 받아냈다.
제품을 20% 할인된 가격에 제공받기로 한 것은 물론, 증설된 라인에서 생산되는 제품에는 동성F&B 로고도 함께 넣기로 했다.
아울러 공장에 대한 할랄 키퍼의 점검 요구도 받아냈다. 자신의 상표가 들어가기에 책임을 지는 게 당연했다.
계약 후 진혁은 그 자리에서 100억 원을 입금했다.
회장실에서 다시 마주 앉은 문기영 회장의 얼굴은 밝았다.
“나도 통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자네를 보니 명함도 못 내밀겠군.”
“통이 커서가 아니라 확신이 있어서입니다.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어 내야겠군. 이거 어깨가 무거워.”
말과는 달리 문기영의 얼굴은 밝았다. 꺼져 가던 열정이 다시 되살아나서 어느덧 나이도 잊고 있었다.
* * *
TG전자 본사는 여의도에 위치해 있었다.
진혁이 안내 데스크에 이름을 말하자 바로 사장실로 안내됐다.
TG전자 소명준 사장은 고졸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공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TG전자에 입사해 40년 가까이 생활 가전에 매달려 세계 1등 신화를 만들어 낸 주역이었다.
“제가 먼저 전화드리고 찾아뵀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바쁘신데 폐를 끼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요. 서 사장님이라면 언제든 시간을 내야지요. 이집트의 윤기성 사장님도 잘 대접해 달라며 신신당부했습니다.”
TG전자 이집트 법인장인 윤기성 사장으로부터 본사 소명준 사장이 보고 싶어 한다고 들었을 때는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봐야 할 이유가 있었다.
비서가 차를 내놓고 나가자 진혁이 용건을 꺼냈다.
“히잡 세탁기나 스텔라이즈 TV 같은 현지화 제품에 관심이 있으신지요?”
“당연히 있습니다. 서 사장님 덕분에 중동 지역 매출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쪽에 유용한 기능들입니까?”
“중동 지역에 맞는 것도 있지만 동남아 쪽에 맞는 기능도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동남아 시장에 진출하게 되어서요.”
“아, 이집트에서 어려운 일을 겪으셨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사업체를 동남아로 옮기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 그쪽의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은 김에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사업을 제가 맡기로 했습니다.”
진혁은 자포라와의 업무 협약을 들려주었다.
소명준의 눈이 반짝였다.
동남아의 알리바마로 불리는 자포라를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조짐이 좋았다.
“어떤 기능들입니까?”
“우선 에어컨인데, 사장님께서 몇 년 전에 AI(조류 독감)을 쫓는 에어컨을 출시해서 히트를 쳤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기사만 요란했습니다. 시선만 끌었지 실속은 없었습니다.”
소명준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소명준이 개발한 AI 필터는 김치에서 추출한 류코노스톡(Leuconostoc)이라는 물질의 배양액을 필터에 적용하는 방식이었다.
박테리아와 AI 바이러스 등 같은 유해 세균이 에어컨 내부로 들어와 필터에 흡착되면 이를 살균하는 기능성 제품이었다.
출시할 때는 반짝 인기를 끌었으나 현지 유통업자 선정에 어려움이 있어 곧 잊혀졌다.
“그 기능에 추가적으로 모기를 쫓는 기능을 넣었으면 합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모기는 30~100킬로헤르츠 주파수대의 초음파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에어컨이 가동될 때 방출되게 하면 모기를 쫓아내거나 현저하게 활동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진혁이 준비해 온 논문을 내밀었다.
꼼꼼히 읽어 본 소명준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별도의 기술 개발 없이 현재의 기술로 바로 가능합니다.”
“동남아는 아직 후진국이다 보니 쥐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탁기 호스를 갉아먹어 고장이 잦다고 합니다. 하부 구조물이 강판 케이스로 보호되는 제품을 만들어 주면 좋을 겁니다.”
이어 진혁은 ‘코란을 읽어 주는 TV’, 아랍 왕족이나 중동 귀족을 겨냥한 ‘금장 PDP TV’도 이야기했다.
소명준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시네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열쇠가 달린 냉장고도 만들어 주십시오.”
“예? 냉장고에 열쇠를 달아 달라고요?”
소명준은 정말로 놀랐다.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세상에, 열쇠가 달린 냉장고라니!
“중동은 물론 동남아시아도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대가족이 모여 사는 특징이 있습니다. 도우미나 아이들이 함부로 음식을 꺼내 먹지 못하게 막는 기능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소명준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게다가 이건 기술적인 검토고 뭐고 필요 없었다.
“에어컨은 두 가지 종류가 필요합니다. 쿨링팬을 두 개 장착한 초강력 에어컨과 적은 전력으로도 가동이 가능한 저전압 에어컨이 필요합니다.”
“그건 전혀 상반된 제품인데요?”
“초강력 에어컨은 중동에서 팔 겁니다. 더불어 60도 이상의 고온에서도 견딜 수 있는 열대 지방용 컴프레서에 고온이나 해풍 등 외부 환경에 의한 부식과 손상을 막을 수 있는 열 교환기 골드핀도 적용해 주십시오.”
“그렇게 되면 전기료가 만만치 않게 나올 겁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다들 오일 달러가 넘쳐나는 곳이 중동 국가다 보니 전기 요금을 국가에서 보조금으로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내는 돈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저전압 에어컨은 어디에 맞는 제품입니까?”
“아프리카입니다. 아시다시피 그쪽 전력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겁니다.”
소명준은 목이 아팠다. 진혁이 입을 열 때마다 계속 고개를 끄덕여서였다.
“아직도 더 남았습니까?”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우선 모기 쫓는 에어컨과 열쇠 달린 냉장고가 시급합니다. 동남아 시장 진출 기념 제품으로 내놓을 작정입니다. 물론 히잡 세탁기와 함께 말입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단순한 개선이니 일주일 내로 출시도 가능합니다.”
“아시겠지만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은 실용신안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3%의 특허권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명준은 기술자 출신답게 성격이 깔끔했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나자 점심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제가 식사 대접을 하고 싶습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막 밖으로 나왔을 때 헐레벌떡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아니, 박 사장님이 어쩐 일입니까?”
“제가 늦지 않았나 보군요.”
떨떠름한 표정의 소명준과 달리 상대가 진혁을 보고 반색하며 인사를 했다.
“TG제약 박진욱입니다.”
“서진혁입니다.”
“식사하시러 가는 모양인데 제가 끼어도 괜찮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만…….”
“그럼 가시지요. 소 사장도 양해해 줄 겁니다. 그렇지 않은가?”
“아, 예.”
같은 사장이라도 후배인 소명준이라 반대하지 못했다.
차를 타고 여의도 중심가의 일식당으로 들어갔다.
비서실 직원이 나와 미리 방을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박진욱은 성격이 활달한지 입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덕분에 진혁도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사업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고 차가 나오자, 박진욱이 지금까지와 다른 신중한 얼굴로 입을 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꼭 뵙고 싶어서 억지로 이 자리에 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