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라이꾸두 회장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소명준의 떨떠름한 표정과 자신에 대해 아는 듯한 박진욱과의 대화에서 예상은 하고 있었다.
“저희 회사에서 작년에 ‘로미글로’라는 당뇨 치료제를 개발했습니다.”
로미글로는 TG제약이 10년간 약 5천억 원을 투입해 개발한 국산 당뇨 신약 1호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로미글로는 DPP-4 억제제 계열로 세계적 제약사도 아직 개발해 내지 못한 곳이 많을 정도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제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판매망을 확보하겠다고 했다가 난감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일반적으로 국내 제약사가 신약을 개발하더라도 다국적 제약사에게 판매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외국 정부 승인을 받는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판로를 개척하기도 녹록치 않아서였다.
그래서 TG생명은 대륙별로 중소 제약사와 계약을 맺어 가는 중이었는데, 국내의 모 제약회사에서 비슷한 신약 개발을 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그쪽에서는 제약업계 1위 기업인 화이잘에게 제품 공급은 물론 기술까지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미래의 수익을 포기한 거죠.”
“…….”
“그런 식이라면 국내 제약 산업은 고사됩니다. 누가 시간과 돈을 투자해 신약을 개발하겠습니까. 지금도 한국은 복제약이나 파는 하류 시장으로 취급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장님이 도와주십시오.”
“제가요?”
“중동에 유통망을 가지고 있으시니 그쪽의 판매를 부탁드리려고 이렇게 무례인 줄 알면서도 찾아온 겁니다.”
충분히 어떤 사정인지는 이해가 됐다. 하지만 자신은 의약품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한참 생각하던 진혁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아는 게 너무 없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검토하고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꼭 좋은 쪽으로 결정해 주시기를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박진욱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진혁도 같이 머리를 숙였다.
* * *
며칠 후 진혁은 다시 인도네시아로 건너갔다.
호텔에 도착하자 하마드는 물론 갈리 사장도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습니다.”
“아닙니다. 저보다 사장님이 더 고생이 많으시지요. 이렇게 동남아까지 시장을 넓히실 줄은 몰랐습니다.”
“우연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지요.”
스위트룸이라 응접실이 따로 있었다.
함께 소파에 앉아 갈리에게 이집트 사업에 대해, 하마드에게는 이곳의 진행 사항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몇 가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진혁이 말했다.
“바쁜 갈리 사장님을 오시라고 한 것은 한국에서 한 가지 제안을 받아서입니다.”
진혁은 TG제약의 ‘로미글로’에 대해 들려줬다.
다국적 제약회사 베링하임의 법인장이었던 갈리라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TG제약에서 욕심을 부린 거군요.”
“그렇긴 합니다만 메이저 제약회사의 횡포도 문제가 있더군요.”
“그게 제약계의 현재 실정입니다.”
“도와줄 방법이 없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갈리가 답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난제를 풀어야 합니다. 의약품을 수입 및 판매하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 관리기관의 승인을 득해야 합니다. 미국 FDA 승인을 받았다니 제품에 문제는 없겠지만, 이게 이권 사업이라 로비력으로 판가름이 납니다.”
“다른 것은 또 뭡니까?”
“해당 약품은 전문 의약품으로 일반 소매점에서 판매가 안 됩니다. 약국에서만 판매가 가능합니다. 결국 현지 공급업자와 개별 계약을 해야 하는데, 그 일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공급업자들의 반응은 어떨 것 같습니까?”
“당연히 좋아할 겁니다. 메이저 제약회사의 제품보다는 싸게 들어올 테니까요.”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정부를 허가를 받아내는 일이었다. 중동의 몇몇 국가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진혁이 생각하는 모습에 갈리가 말했다.
“메디컬 쪽에 관심을 가지실 거라면 한국에 계실 때 한 가지를 알아봐 주십시오.”
“……?”
“현재 시판되는 혈당 측정기가 피를 채취해 시험용지에 묻혀서 측정하는 방식이라는 것은 아실 겁니다.”
“그렇지요.”
“피를 채취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매번 시험용지를 사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무채혈 혈당 측정기 개발에 대한 요구가 계속 있었습니다. 실제로 몇몇 나라의 기업들이 도전했지만 실패했지요. 그런데 한국에서 최초로 개발에 성공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왜 상용화되지 못한 거죠?”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KFDA의 승인까지 받았으니 기술적인 문제는 아닐 겁니다. 한번 알아보십시오.”
“알겠습니다. 역시 같이 머리를 맞대니 좋은 생각들이 쏟아지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빨리 사장님이 이집트로 오셔야 하는데…….”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겁니다.”
권력이 유한하다는 것은 여러 역사가 증명했다.
하페즈도 언젠가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 * *
약속 시간이 되자 진혁은 호텔을 나와 시내 중심가 쇼핑몰 내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마야가 마중을 나왔는데 마르와도 함께 있었다.
진혁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언제 온 거냐?”
“3일 됐어요.”
“잘 왔다.”
진혁은 이곳에서도 바이럴 마케팅의 일환으로 슈퍼 블로거 제도를 운영할 작정이었다.
그 분야 최고 전문가가 된 마르와를 불러 마야를 돕게 했다.
예약한 룸으로 들어가자 30여 명의 젊은 남녀가 자유로운 자세로 앉아서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편하게 합시다. 우리 모두 자유로운 영혼들 아닙니까?”
진혁의 말에 다들 환히 웃으며 바로 했던 자세를 풀었다.
온라인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인도네시아 슈퍼 블로거들로 마야의 제안에 두말없이 이 자리에 나왔다.
그들에게 마르와는 선망의 대상으로 자신들이 꿈꾸는 그런 인물이었다.
이미 슈퍼 트위터에 대해 알고 있어 이야기하기가 편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잘해 왔기에 많은 온라인 친구들이 여러분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만, 사업은 그보다 더 큰 책무가 주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도 한 단계 더 성장하셔야 합니다.”
“네.”
“여기 마르와가 도와줄 겁니다. 제가 처음 만났을 때는 코흘리개…….”
“사장님!”
“험……. 아무튼 마르와도 이 자리에게 오르기까지 눈물도 많이 흘리고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마르와 양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진혁이 직접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벌게진 마르와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진혁이 이렇게 공개 석상에서 고마움을 표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의 말대로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알아주지 않는 진혁을 원망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 그 마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다시 앉은 진혁이 좌중을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사업하면 돈을 먼저 떠올리는데 그건 잘못된 겁니다. 사업의 핵심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와 주변 사람들을 위하십시오. 그럼 돈은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슈퍼 블로거 제도의 핵심입니다. 지금도 중동의 친구들은 슈퍼 트위터 활동만으로 저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다들 의지를 불태웠다.
인도네시아의 청년 실업률도 정부 공식 통계만 20% 가까이 됐다. 하지만 실질 실업률은 그 두 배도 넘었다.
그래서 다들 마르와가 부러웠고, 그 기반을 마련해 준 서진혁 같은 사업가가 나오기를 열망했었다.
그런데 마침내 그들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칠 수가 없었다.
진혁은 얼마간 더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먼저 일어났다.
젊은 사람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게 좋다는 걸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마야가 밖에까지 따라 나왔다.
“아버지께서 한번 뵙자고 하셨어요.”
“그래. 네가 있어 든든하다.”
“저도 마르와처럼 될 수 있을까요?”
“목표가 겨우 마르와야? 더 큰 꿈을 꿔야지. 넌 충분히 해낼 수 있어. 여긴 신천지야.”
“고맙습니다. 꼭 사장님의 믿음에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야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다음 날 점심때 라이꾸두 회장을 만났다.
“사업 준비는 잘되십니까?”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습니다.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걱정은 안 합니다. 대신 기대가 큽니다. 마야가 변한 것만 봐도 대단한 일이 벌어질 거란 느낌이 옵니다. 요즘 그놈 얼굴 보기도 힘듭니다.”
“어린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젊었을 때 뭔가에 미쳐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야라면 충분히 해낼 거라는 믿음도 있고요.”
“딸아이를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이꾸두 회장도 어느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아들들은 이미 장성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마야가 막내딸이라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당당하게 인정받으니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인도네시아는 나랑 함께하기로 했으니 됐는데, 말레이시아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미 자포라에서 현지 종합 물류 기업인 센트 로지스틱스와 계약이 되어 있어 그쪽 배송 시스템을 이용할 작정입니다.”
“유통 계획은 세우셨습니까?”
“거기까지는 아직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 일 때문에 진혁은 내일 말레이시아로 떠날 생각이었다.
“잘됐군요. 마침 제가 소개해 드릴 분이 있습니다. GTH리테일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당연하지요. 대형 마트 ‘자이언트’를 운영하고 있잖습니까.”
GTH리테일은 30조 원 규모의 다이리팜 그룹 산하 계열사로, 대형 마트 95개와 고급 슈퍼마켓 18개 등 126개의 유통점을 갖춘 말레이시아 최대 유통 그룹이다.
“GTH리테일을 설립하신 분은 텡 로이 아저씨입니다. 선친과 친구셨지요. 그분이 돌아가시고 다이리팜 그룹으로 넘어갔지만 아들인 텡 로제가 사장인 최고 업무 책임자(COO)로 앉아 있습니다.”
“…….”
“GTH리테일이 일본계 세븐일레븐에 맞서 T익스프레스라는 편의점 사업에 진출한다며 제게 전화로 조언을 구해 왔습니다. 그때 서 사장 이야기를 했더니 꼭 좀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만나 보시겠습니까?”
“당연히 만나야죠. 정말 감사합니다.”
진혁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게 바로 화교의 힘이었다. ‘친소’의 원리를 의미하는 ‘꽌시’는 중국 사회뿐만 아니라 화교를 움직이는 실제적인 시스템이자 동력이 되었다.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면 뇌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중화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였고, 화교 사회를 유지시키는 근간이 되고 있었다.
* * *
진혁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인도네시아에 이어 말레이시아도 유통망을 갖췄다.
라이꾸두 회장이 단단히 부탁했는지 텡 로제 사장은 두말없이 진혁의 물품을 받아 주겠다고 했다.
마르와와 마야에게 말레이시아 블로거 친구들에게도 알쇼핑의 진출을 알리고 슈퍼 블로거 희망자를 모으라고 부탁했다.
하마드가 진행하는 몰인몰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하이다르 회장의 소개로 쑤피넷이 이용하는 두바이의 데이터 센터로 서버 이전 작업도 계획되어 있었다.
이제 한국에서 현지인의 입맛과 시선을 사로잡는 라면을 개발하는 게 중요한 과제가 됐다.
그래서 진혁은 대한푸드 본사부터 찾아갔다.
식품 개발 센터로 가자 문기영 회장이 직접 제품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마침 잘 왔네. 맛 좀 보게.”
문기영이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여러 개의 라면을 맛보고 있었다.
마침 진혁도 허기를 느낀 상황이라 젓가락을 들고 한 입 먹었다.
그런데 두어 번 씹다 말고 눈이 커졌다.
“으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