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기쁨 반, 슬픔 반
바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매워도 너무 매웠다.
옆의 여자 연구원이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 컵에 담긴 우유를 내밀었다.
우유로 겨우 매운 맛을 달랜 진혁이 문기영을 째려보았다.
“지금 이걸 사람 먹으라고 만드신 겁니까?”
말하는데 용가리처럼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맵게 만들라며?”
“그래도 이건 아니지요.”
“그럼 밋밋하게 만들어?”
“그건 아니지만…….”
문기영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 매운 라면이 나왔을 때 나도 자네와 같은 생각으로 무시했어. 평생을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 중에 하나야. 매운맛이 중독성이 강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실수였어. 물론 무조건 맵다고 다는 아니지. 지금 입 안에 어떤 맛이 느껴지나?”
“그러니까…… 음, 단맛이 느껴지는데 이걸 달착지근하다고 해야 하나요?”
“그걸 감칠맛이라고 한다네. 그게 이 제품의 핵심이지. 안으로 들어가세.”
문기영을 따라 사무실로 가서 소파에 마주앉았다.
“매운맛 측정 수치인 스코빌 지수가 자네가 먹은 게 4,500 정도야. 지금 판매되는 매운 라면은 2,700이고.”
“엄청나게 맵군요.”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느껴. 그런데 먹을수록 자꾸 당긴다는 의견들이야.”
“신기한 일이네요.”
“핵심은 소스야. 매운맛에 더 감칠맛 나게 하기 위해 다진 양념을 스프로 만들었다네.”
“고생하셨네요.”
“고생했지. 거기에 면발도 새로 개발해야 했어. 일반 라면보다는 굵고 우동보다는 얇게. 넉넉한 식감과 쫄깃한 질감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네.”
피로에 전 얼굴과 달리 문기영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그럼 이제 다 된 건가요?”
“아니. 제일 중요한 게 남았어.”
문기영이 서류 하나를 빼내 펼쳐 보였다.
“우리 연구진이 조사한 자료야. 이걸 보니 한국, 중국, 일본과 달리 동남아시아 국민들은 국물이 없는 라면을 선호한다는군.”
“그런가요?”
“세계 판매 1위인 인도네시아의 ‘미고렝’도 비빔면 형태야. 그 지역 제품 70% 이상이 볶음면 종류더군. 아마 겨울이 없다 보니 따듯한 국물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런 것 같아.”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매운맛의 강도에 따라 상, 중, 하로 나누고, 각기 국물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시제품을 만들어 주십시오. 직접 현지로 보내 테스트해서 선호도를 조사하겠습니다.”
“그게 좋을 것 같군. 그렇게 하도록 하지.”
테스트 할 사람은 넘쳐났다.
슈퍼 블로거 예비 신청자들에게 맡기면 된다.
“공장 증설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건물은 곧 완공된다고 하더군. 그럼 기계를 들여와 설치하고 나면 바로 제품 생산이 가능하네.”
“할랄 인증은요?”
“자네가 신신당부했다고 하면서 시제품 생산 단계부터 참여해 최대한 빨리 내주기로 했네.”
나흐얀에게 부탁한 영향이 컸다.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고 대한푸드를 나왔다.
회사로 돌아와 회의실로 가자 다들 모여 있었다.
‘할랄 여행’ 홍보 방안을 위한 2차 대책 회의가 준비되어 있었다.
“지난번 회의 때 김지민 팀장이 제안한 현지 여행사를 통한 관광객 유치 방안에 대해 문의한 결과 그쪽에서도 상당히 호의적이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국내 여행사들까지 의뢰를 해 오는 실정입니다.”
“국내 여행사들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한국 관광객들의 현지 안내를 맡기 위해 지점을 설치했는데, 우리의 계획대로라면 그쪽 관광객을 한국에도 유치할 수 있다니 일거양득이라고 합니다.”
진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한 수 제대로 배웠다.
김지민이 말을 이었다.
“한국 주재 현지 대사관과 현지 주재 한국 대사관을 통한 홍보 방안도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현지의 여행 가이드를 출간하는 출판사를 통한 한국 안내에 저희 ‘할랄 여행’을 홍보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국내외 여행사와 대사관을 통해 홍보하는 것으로 정합시다.”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만 맡겨 놓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세요.”
“직원들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아무래도 생소한 분야다 보니 그쪽 전문가를 채용했으면 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신 이사님이 채용 계획을 세워서 진행하세요.”
“감사합니다. 반드시 성과를 도출해 내겠습니다.”
신용찬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계획을 그대로 수용해 주는 것도 모자라 직접 맡아서 진행하라니 힘이 절로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너가 믿어 주는 것만큼 직장인에게 큰 의욕을 주는 것은 없었다.
* * *
그날 저녁은 오랜만에 지민과 함께 이모네에 갔다.
이모의 떠들썩한 환대를 받고 집밥을 맛있게 먹은 뒤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현이는 공부 잘하고 있어요?”
“한다고는 하는데 맨날 잠만 자는 게 영 미덥지 않아요.”
“잠이 많을 때죠. 언제 한번 데리고 나와요.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 텐데.”
“이야기해 볼게요.”
목소리에 힘이 없는 게 오늘은 어쩐지 지민의 기분이 별로인 느낌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에요.”
“이야기해 봐요.”
“신문 보셨어요?”
“내가 지금 신문 볼 시간이 어디 있어요. 무슨 중요한 기사라도 났어요?”
진혁의 눈치를 보던 지민이 말했다.
“태후 화장품이 공식 출범됐대요. 사장은 정인영 씨가 됐고요.”
“벌써 그렇게 됐나요? 주총에서 분사를 승인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화장품은 물론 미용 시장에도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어요. 그리고 약혼 소식도 함께요.”
“어, 그래요? 전화해서 축하라도 해 줘야겠군요. 지민 씨가 아니었으면 실수할 뻔했네요.”
전혀 몰랐다는 반응에 지민의 얼굴이 펴졌다.
그 모습에 진혁이 웃으며 탁자 위에 올려진 지민의 손을 잡고 말했다.
“설마 아직도 내가 인영 씨, 아니, 정 사장과 연락한다고 생각했던 겁니까?”
“아닐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요. 미안해요.”
“아니, 내가 더 미안하죠. 지민 씨에게 그만큼 믿음을 못 준 거니까. 내가 더 노력할게요. 그리고 그런 고민이 있으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편하게 말해요. 함께 가기로 약속했잖아요.”
“알겠어요. 앞으로는 그렇게 할게요.”
진혁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믿지 못한 것을 알고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민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증거는 바로 나왔다.
“이번 주에는 꼭 강릉에 가요.”
“지난주에 다녀왔다면서요. 제주도에 갑시다.”
“혼자 다녀오는 거랑 같이 가는 거는 다르죠. 제 말대로 강릉에 가요.”
“지민 씨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합시다.”
솔직히 진혁도 부모님을 뵙고 싶었는데 지민이 먼저 눈치껏 말해 주니 고마웠다.
“참, 지민 씨, 아까 회사에서 못 한 말이 있어요.”
“……?”
“슈퍼 트위터와 슈퍼 블로거를 통한 홍보 방안도 추가하세요.”
“그 사람들도 이용하시게요?”
“그들만큼 홍보 효과가 뛰어난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걸 썩히는 건 아깝잖아요.”
“그 사람들이 SNS에 올려만 준다면 언론 매체를 통한 광고는 할 필요도 없겠네요.”
“그럴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은 절차를 밟아서 올라와야 해요.”
“신 이사님께 보고하고 진행할게요.”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는 여전히 회사에서 비밀이었다. 그리고 진혁 스스로 일과 사생활을 분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게 설사 지민이라 하더라도.
그게 서로를 위하고 회사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진혁은 가족 기업의 여러 병폐를 보며 알고 있었다.
* * *
다음 날 출근한 진혁에게 박이동이 보고했다.
“사장님이 말씀하신 회사는 IMC로 확인됐습니다.”
진혁은 갈리가 말한 무채혈 혈당 측정기를 개발한 회사의 조사를 박이동에게 맡겼었다.
“IMC는 2000년 의료 회사 출신들이 나와 설립해서 당시에 코스피에 상장된 유일한 메디컬 업체였습니다.”
IMC는 무채혈 혈당 측정기 개발로 소위 대박을 터트렸다.
당시에는 정부 시책으로 벤처 붐이 한창일 때라 주가는 200배 이상 뛰었고, 각종 상을 휩쓸었다.
당연히 투자금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모든 졸부들이 그렇듯 사장 이윤기가 분위기에 휩쓸려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전문 분야도 아닌 차량용 강판 사업에까지 뛰어들었으니 말 다 한 거죠.”
“답답한 분이시네요.”
“그게 끝이 아닙니다. 이후 신주인수권부 사채 소송에 휘말려 450억을 사기 당한 데다가, 자본 잠식에 빠져 회사가 망할 것 같으니까 공금 75억을 횡령까지 했습니다. 결국 회사는 상장 폐지되고 부도가 나서 사라졌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시나리오였다. 당시에는 그런 벤처기업가들이 부지기수였다.
진혁이 물었다.
“회사가 망하더라도 기술 특허는 남아 있었을 텐데, 왜 이어지지 못한 겁니까?”
“IMC가 획득한 관련 기술 특허가 총 다섯 건인데, 그중에 핵심이 ‘덱스트로즈 추출용 패치’라고 합니다. 다른 것들은 회사 명의지만 그것만은 당시 R&D센터장이었던 노선기 씨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기업에서 인수하려다가 포기했다고 합니다.”
“노선기 씨가 반대한건가요?”
“반대보다는 아예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라져요?”
“사장이 계속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발행해 돈만 끌어모으는 것에 반대해 신주인수권부 사채 발행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하자, 퇴사하고 종적을 감춰서 아무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설마 죽은 겁니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는데 사망은 아니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게 가능합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나름 정보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찾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박이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게 그 역시 난감한 모양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나가 보세요.”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박이동이 서류를 두고 나가자, 진혁이 노선기의 신상 정보를 확인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차장님, 서진혁입니다.”
-아! 서 사장님이 먼저 연락을 주시고, 어쩐 일이십니까?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서 사장님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무슨 일입니까?
“사람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다들 모르겠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알아보지요. 인적 사항을 문자로 보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끊은 진혁이 메시지를 보내고 다른 업무를 봤다.
* * *
금요일 저녁에 지민을 태우고 막 출발하려던 진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유닉스의 송승용 사장이었다.
“서진혁입니다, 사장님.”
-지금 어디십니까?
“서울인데 막 강릉으로 출발하려는 중입니다.”
-미안합니다만 지금 좀 뵀으면 좋겠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춘천에 들렀다가 가겠습니다.”
-아니요. 지금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이쪽으로 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일단 와 보세요.”
불안한 마음에 진혁이 곧바로 출발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송승용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살이 쏙 빠져 있고 얼굴도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병실을 지키는 부인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얼른 침대로 달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몸을 너무 혹사시킨 탓이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진혁이 진심으로 사과했다.
기술 이전을 추진할 때 몸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던 것 같았다.
물량을 맞추지 못할 때마다 부탁해 도움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송승용이 이렇게 된 게 모두 자신의 탓처럼 여겨졌다.
“서 사장이 그렇게 이야기할 것 같아 그동안 연락 못 드린 겁니다. 인명은 재천이라 했습니다. 서 사장 덕분에 내가 만든 제품들이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가고 있으니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부탁드리지 않았더라면…….”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한 가지만 부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