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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09화 (109/307)

109화. 숨바꼭질

“뭐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습니다.”

“유닉스를 맡아 주시오.”

“예?”

진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다.

“서 사장도 10%를 가지고 있으니 대주주잖소.”

“그건 순수한 투자 목적이었습니다.”

진혁은 기술 이전에서 보여 준 송승용의 경영 마인드에 반해 10%의 주식을 매입해서 가지고 있었다.

“알겠지만 유닉스는 내 분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서 사장에게 맡겨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소.”

“여기 사모님이나 자제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신경 써서 돕겠습니다.”

“안사람은 집안일만 해서 경영은 모릅니다. 하나 있는 아들놈은 미국에서 변호사로 있는데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하고요. 서 사장밖에 없습니다.”

“다른 전문 경영인도 있을 겁니다.”

“내가 이러는 건 회사 때문만은 아닙니다. 직원들은 내 가족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맡기고 편히 떠나겠습니까?”

“…….”

“맡아 주시오, 서 사장. 당장 자금을 만들기 어렵다면 나중에 천천히 줘도 됩니다. 그러…… 윽. 쿨럭, 쿨럭.”

송승용이 기침을 하자, 부인이 얼른 거즈를 입에 댔는데 피가 묻어 있었다.

“제발 맡아 주세요. 저나 제 아들놈 모두 회사에 욕심은 없어요. 다만, 이이가 평생을 바친 곳이라 잘되기만을 바라는 맘뿐이에요.”

“서 사장…….”

“알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사장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잘 운영하겠습니다.”

“고맙소.”

진혁을 대답을 듣고서야 송승용이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기력이 다해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부인에게 다음 주에 연락하겠다고 하고 나왔다.

주차장의 차 안에서 기다리던 지민이 굳은 얼굴로 들어오는 진혁을 보고 물었다.

“많이 아프세요?”

“생각보다 심하시네요. 마음이 아픕니다.”

지민이 조용히 손을 잡아 줬다.

* * *

부모님 집에서 이틀을 쉬고 출근한 진혁은 박이동을 불러 유닉스 인수 작업을 지시했다.

코스닥 등록 업체 유닉스는 시가 총액 800억 원대로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송승용이 15%, 부인과 아들이 각각 10%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고, 자사주가 5%에 우리사주조합도 6%를 가지고 있었다.

진혁이 보유한 10%를 포함하면 우호 지분이 46%나 됐다.

동성 F&B가 송승용의 지분에 부인과 아들의 지분 중 5%씩을 시가로 매입해 최대 주주가 되었다.

그리고 회사 인수인계 절차가 끝난 날 밤…….

송승용이 세상을 떠났다.

* * *

춘천의 유닉스 사무실에서 황진선 이사와 마주 앉았다. 300명의 종업원과 함께 취임식을 마친 후였다.

“갑자기 회사를 맡게 되어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다들 걱정이 많았는데 아시는 분이라 한시름 놓았다는 분위기입니다. 전 사장님이 서 사장님 칭찬을 많이 하셨거든요.”

“송 사장님이나 직원들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시급한 게 뭡니까?”

“영업 인력을 확보하는 겁니다. 전 사장님이 맡았던 부분이라 당장 공백이 생겼습니다.”

황진선은 R&D센터장으로 제품 개발과 생산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 부분은 걱정 마십시오. 24시간 돌려도 모자랄 만큼 주문은 쌓여 있습니다.”

유닉스를 인수하기로 결정하며 이곳을 한국에서 소비되는 제품을 생산하는 기지로 삼을 생각이었다.

알라딘 제품의 판매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전 사장님이 워낙 잘 관리해 주셨거든요.”

“그럼 제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본사와 R&D센터는 수도권으로 옮겼으면 합니다. 춘천은 순수하게 생산만 했으면 합니다.”

“기술적으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만, 일부 직원은 생활권이 이곳이라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황진선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회사의 주인이 바뀔 때 항상 효율화라는 미명하에 기존 직원들을 정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진혁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찬가지라 실망감이 컸다.

그런데 진혁의 입에서 황진선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본사와 R&D센터 이전으로 비는 자리에 생산 라인을 증설할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필요한 인원을 추가로 채용해야 하니 본인이 원하면 업무 전환을 통해 남아도 됩니다.”

“공장을 증설하시려고요?”

“말씀드렸듯이 주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황진선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기존 직원들의 고용도 보장해 주고 추가로 공장까지 짓겠다는데 반색하는 건 당연했다.

제조업체 직원치고 회사에 주문이 쌓여 있다는 말에 좋아하지 않을 이는 없었다.

진혁은 추가적으로 직원들의 복리후생 방안을 세워 보라고 지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박이동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공장 주변의 땅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봐 주십시오.”

“공장을 늘리실 생각이십니까?”

“동남아시아 시장까지 고려하면 지금의 규모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진혁의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 *

관악구 봉천동 보배사로 올라가는 낡은 주택가에 검은색 승용차 세 대가 멈춰 섰다.

앞 차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내리고, 마지막 차에서는 서진혁과 박이동이 내렸다.

김상균 차장이 직접 국정원 직원들을 이끌고 와 줬다.

등산복 차림의 사내가 빠르게 달려와 하는 이야기를 듣고 김상균이 진혁에게 다가왔다.

“노진기, 아니, 노선기가 안에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나 봐야지요. 왜 동생 이름으로 숨어 사는지도 듣고 싶군요.”

“그건 제가 더 알고 싶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애들이 찾느라 엄청 고생했습니다. 가시지요.”

직원 두 명을 앞세우고 계단을 내려가자 조그마한 공장이 나왔다.

남자 둘과 여자 한 명이 있었다.

“누구십니까?”

“노선기 씨,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후다닥 사내 하나가 냅다 튀었지만 얼마 가지 못해 붙잡혔다. 입구를 막고 있는 데다 공간도 좁았다.

국정원 직원에게 붙잡혀 끌려오는 모습에 진혁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풀어 주십시오. 죄인이 아닙니다.”

“놔드려라.”

직원들의 시선을 받은 김상균의 말에 노선기가 풀려났다.

“저는 서진혁이라고 합니다. 노선기 씨의 기술이 필요해서 어렵게 찾아왔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이들은 국정원 직원들입니다. 왜 노진기로 숨어 사는지에 대해 궁금해하고 계십니다. 취조실에 가서 말씀하시는 것보다 여기서 밝히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진혁의 말에 노선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구석에 있는 두 남녀를 보고 노선기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다 밝히면 저 두 사람은 놔주실 겁니까?”

“제겐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 노선기 씨에게 죄를 물으려고 온 게 아닙니다.”

“순순히 사실을 밝히고 협조하신다면 정상 참작을 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김상균의 말에 노선기가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 말씀드릴 테니 나머지 분들은 나가시게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밖에서 기다려라.”

사무실이 따로 없어 적당히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은 기판과 컨트롤 박스들이었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음료수를 내놓았는데 동남아인이었다. 다른 남자도 자세히 보니 한국인과 이목구비가 달랐다.

“어떻게 된 사연입니까?”

“벌써 4년이 넘었군요.”

노선기가 기구한 사연을 들려줬다.

사장 이윤기의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신주인수권부 사채 발행 무효 확인 소송을 냈다가 패소하자, 노선기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동이 힘든 노모와 알코올 중독에 걸린 동생이 있었다.

국제결혼 상담소의 소개로 사정을 모른 채 인도네시아에서 넘어와 결혼한 제수씨가 두 사람을 간수하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일이 터졌다.

“그날도 동생이 술에 취해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다가 갑자기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병원에 실려 간 동생은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얼마 가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그러는 와중에도 회사와 다른 여러 곳에서 끊임없이 찾아와서 괴롭혔다.

그가 가진 특허권 때문이었다.

결국 노선기는 어머니와 제수씨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했다.

“서울로 올라왔지만 가진 게 없으니 뭐라도 해야 했습니다. 회사에서 찾아낼까 봐 어쩔 수 없이 동생 이름을 쓰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런데 젊은 남녀가 함께 살다 보니 자연히 연분이 생겼다.

그동안 노선기는 개발에 미쳐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

“어머니가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쓰던 물건들을 고쳐 준 게 인연이 되어서 복지 용구에 들어가는 컨트롤러를 고쳐 주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아, 그리고 저 사람은 제 처남입니다. 올 초에 인도네시아에서 와서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진혁은 물론 김상균도 입을 열지 못했다.

분명 잘못한 일이고 처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누구도 이들을 단죄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혁은 머리를 흔들어 감성적인 생각을 털어냈다. 노선기의 사연은 감히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은 사업 때문에 온 터였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죄를 물으러 온 게 아닙니다. 노선기 씨가 갖고 있는 덱스트로즈 추출용 패치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설사 제 동생의 일로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고 해도 못합니다.”

“그렇게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윤기 사장과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 갔는지 조사했다니 아실 겁니다. 그건 악마의 기술입니다.”

노선기의 강력한 태도에 설득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말씀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기술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사람이 문제였지요.”

“쉽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사장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주식으로 대박이 나자 다들 변했습니다.”

이건 효과가 없었다. 다른 방향으로 설득해야 했다.

그때 여기저기 널려 있는 컨트롤 박스가 보였다.

“저건 어디에 쓰는 겁니까?”

“수동 침대를 전동 침대로 바꿀 때 들어가는 제품입니다. 환자가 누워 있는 침대를 수동으로 올리고 내리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거든요. 제 아내도 어머니를 모시느라 어깨와 손목 관절이 망가져서 지금도 좋지 않습니다.”

“저걸 장착하고 나서 환자와 보호자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시면 기쁘시겠네요?”

“그게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때 느끼는 보람은 직접 경험해 보시지 않으시면 모릅니다.”

노선기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보였다.

“저도 그런 기쁨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소말리아 난민 캠프에 통조림을 전달할 때인데…….”

진혁이 당시의 상황을 들려줬다.

그것으로 부족해 핸드폰으로 알쇼핑에 접속해서 저장되어 있는 조나단의 취재 영상을 틀어 줬다.

마르와가 죽은 아이를 안고 통곡할 때 모두가 눈시울을 붉혔다.

“보람과 함께 안타까움도 느꼈습니다. 내가 좀 더 일찍 갔다면 저 아이도 살았을 텐데. 통조림을 더 풍족하게 지원하지 못하는 제 능력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행히 방금 전 보신 영상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어 최악의 상황은 피한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고통 받는 이들은 그곳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세계 여기저기서 전쟁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생겨났고 기아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

“전쟁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온갖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은 더 많을 겁니다. 당뇨병 환자만도 세계적으로 4억 명이 넘고, 우리나라도 470만 명이 앓고 있다고 합니다. 몇몇 인간들이 미워서 그들과 그 가족의 고통을 외면하시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죄악입니다.”

노선기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때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여인이 진혁을 빤히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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