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무채혈 혈당 측정기
“말씀해 보십시오.”
“혹시…… 라이나 왕비님을 모시고 오신 분 아니세요?”
“그렇습니다만, 저를 아십니까?”
“나흐얀 이맘께 들었어요. 우리 무슬림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여인이 빠르게 말하자, 남동생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السلام عليكم. (신의 가호가 있기를.)”
“وعليكم السلام. (당신에게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
진혁도 같은 방법으로 화답을 하자 그 모습에 노선기가 물었다.
“당신이 이태원에 있는 ‘알라딘과 떠나는 할랄 여행’을 만드신 분입니까?”
“제 가게를 아십니까?”
“와이프와 처음 외식을 한 곳입니다. 먹는 것 때문에 제대로 된 여행도 못 시켜 줬습니다.”
“그럼 이제 맘대로 다니십시오. 이번에 열 군데 가맹점을 개설했고 그 숫자를 계속 늘려 갈 작정입니다.”
잠시 바라보던 노선기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그들과 다릅니까?”
“돈 벌려고 하는 사업가인 것은 같습니다. 하지만 전 그 돈을 저 혼자 독차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프랜차이즈 사업의 모토가 상생과 공존입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믿지 마시고 옆에서 지켜보십시오. 특허 기술 사용 계약서에 노선기 씨가 원하면 즉시 계약이 해지되도록 명기하겠습니다. 제가 초심을 잃었다고 판단하시면 언제든지 떠나셔도 됩니다.”
“좋습니다. 당신을 믿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악수를 하는 모습에 인도네시아의 남매는 물론 김상균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에 노선기가 그들을 소개시켜 줬는데 수시와 밤방이었다.
인사를 나눈 진혁이 마지막 남은 중요한 질문을 했다.
“제품을 다시 만드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걱정 마십시오.”
노선기가 공장 한쪽에 세워져 있는 낡은 캐비닛을 열었다.
위 칸은 전부 문서들로 채워져 있고 맨 밑에는 박스가 있었다.
“이게 다 ‘덱스톨’ 개발 관련 서류들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때 만든 제품들입니다. 이걸로 KFDA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노선기가 먼지가 수북이 쌓인 박스에서 손목시계형으로 개량된 덱스톨을 내놓았다.
이어진 설명에 따르면, 덱스톨은 전기 삼투압 방식을 이용해 피를 뽑지 않고도 손목 실핏줄에 흐르는 혈액 속 혈장의 덱스트로스를 측정, 20분 간격으로 혈당 지수를 보여 주는 손목시계형 혈당 측정기라고 했다.
덱스트로즈 추출용 패치는 덱스톨에 들어가는 패치 센서의 저항을 감소시켜 전도와 감도를 개선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로 인해 혈당 측정의 정확성을 높이고 분석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남은 일이 있다. 진혁이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김상균이 입맛을 다시며 입을 떼었다.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나, 그렇다고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압니다.”
“오늘 저희는 안 온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십시오. 정상 참작이 인정되어 집행 유예로 풀려날 수 있을 겁니다.”
“변호사는 제가 최고로 유능한 사람을 알아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건 당뇨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해 주십시오. 그럼 됩니다.”
진혁은 노선기와 가족들을 놔두고 김상균과 함께 나왔다.
* * *
다음 날 진혁은 잇달아 두 명의 변호사를 만났다.
첫 번째 사람은 인권 변호사로, 자수한 노선기의 변호를 맡겨 관악 경찰서로 보냈다.
두 번째 변호사는 특허 전문 변호사인 이춘성이었다.
“노선기 씨의 특허권은 말소된 주민등록을 회복하면 큰 문제가 없습니다만, 회사 명의로 등록된 특허권은 효력이 소멸됐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그래요?
되묻는 진혁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핵심 기술이 제일 중요하지만 관련 기술 역시 필요하긴 마찬가지였다. 그게 없으면 제품을 만드는 게 불가능했다.
산 넘어 산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이춘성의 말에 반전이 있었다.
“그 부분은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동안 IT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회사가 가지고 있는 특허 내용을 검토해 봤는데, 이미 다른 회사들이 더 발전된 기술로 제품을 상용화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문제없습니다.”
“그거 잘됐군요.”
반색하는 진혁에게 이춘성 변호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더 남아 있었다.
“이번 일은 특허권보다는 한국식약청(KFDA)으로부터 이전 회사가 받은 의료기기 품목 허가를 인정받을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돈도 돈이지만 시간이 엄청나게 걸릴 겁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솔직히 자신은 못 하겠습니다. KFDA가 얼마나 유연하게 판단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이춘성의 판단은 비관적이었다. 공무원들의 경직된 사고에 대한 문제는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진혁은 이춘성에게 이번 일을 맡겼다. 김상균이 추천한 사람이니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 * *
노선기는 경범죄 위반으로 벌금 100만 원을 내고 나왔다.
동생의 이름을 도용한 것은 불법이지만 다른 죄를 짓지 않았기에 처벌이 가벼웠다.
그로부터 며칠 후 진혁은 노선기, 수시 부부와 아이, 그리고 처남인 밤방과 함께 자카르타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노선기는 신원을 회복했고, 특허권 사용에 대한 계약서도 작성했다.
이제 KFDA 승인 문제가 처리되면 정신없이 바쁠 것 같아 미리 휴가를 줘서 데려온 것이다.
수시는 10년 전 한국으로 시집온 이후 한 번도 고향에 방문하지 못했다고 했다.
기구한 운명이 떠올라서인지 수시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노선기가 꼭 껴안아 줬다.
진혁은 여기서 그들과 헤어져야 했다.
수시의 고향은 롬복으로, 국내선 비행기로 두 시간이 걸리고 다시 차로 세 시간을 가야 하는 시골이라고 했다.
진혁은 노선기를 따로 불러 봉투를 건넸다.
“10만 달러입니다.”
“헉! 너무 많습니다.”
“특허권 사용에 대한 계약금이라 생각하시고 받으시면 됩니다.”
“그래도 이건…….”
“돈의 무서움은 저보다도 잘 아실 테니 생략하겠습니다. 처음으로 가는 처갓집인데 체면은 세우셔야지요.”
“고맙습니다. 집사람이 많이 좋아할 겁니다.”
“그럼 즐거운 가족 여행 하시고 서울에서 뵙겠습니다.”
진혁은 다른 가족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회사로 가자 하마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바이의 데이터 센터 구축은 완료했습니다. 일단 이곳의 트래픽을 처리하게 하다가, 안정되면 이집트의 서버도 옮기겠습니다.”
“몰인몰 기능 구현은 어떻게 됐습니까?”
“자포라에서 개발을 완료해 현재 테스트하면서 버그를 잡아 가는 중이니 조만간 끝날 것 같습니다.”
“슈퍼 블로거 확보 작업은요?”
“마야 씨가 맡아서 하고 있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다고 합니다. 여기는 물론 말레이시아에서도 오픈만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야가 고생이 많군요.”
“조직화 능력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아예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본인에게 슬쩍 의향을 물어봤더니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 문제는 내일까지 말미를 주십시오. 라이꾸두 회장님을 뵙기로 했으니 상의를 해 보겠습니다.”
진혁은 이어 서울에서 보낸 라면 시제품에 대한 슈퍼 블로거의 평가 결과를 받아 봤다.
문기영이 예상한 대로 국물 없는 볶음면이 거의 만장일치로 선정됐다.
매운 강도는 진혁의 예상과 달리 스코빌 지수 4,500의 선호도가 60%나 됐고, 5,500도 30%인 반면 3,500은 겨우 10%밖에 되지 않았다.
“엄청나게 매운 걸 좋아하는군요.”
“저도 의외였습니다. 중간 제품을 멋모르고 먹었다가 입안이 헐어 한동안 고생했는데, 그보다 더한 것을 그렇게 맛있게 먹을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파는 게 맞으니까, 이대로 대한푸드에 전달해 제품을 생산하게 하지요.”
진혁은 그 자리에서 문기영에게 전화를 해서 선호도 조사 결과를 알리고 그에 따른 생산 계획을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 * *
다음 날 점심은 라이꾸두 회장과 함께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습니까?”
“계획에 따라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뵙자고 한 것은 다른 일 때문입니다.”
진혁은 무채혈 혈당 측정기 ‘덱스톨’에 대해 우선 설명해 줬다.
“세계 최초로 개발된 획기적인 제품입니다. 당장 의료기기 시장을 뒤흔들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만으로도 대단한 제품임을 알겠습니다.”
“조만간 제품은 나올 겁니다. 그런데 판매하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 식약청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판매망도 확보해야 합니다.”
“그렇겠지요.”
“염치없지만 다시 한번 이 일에 적합한 분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진혁이 직접 여기까지 온 이유가 이거였다.
식약청의 승인을 받는 데에 로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약품 유통망을 가지고 있고 식약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을 라이꾸두 회장을 통해 소개받으려는 것이었다.
잠시 진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라이꾸두가 말했다.
“역시 젊음이 좋긴 좋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개시켜 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업가들입니다. 서 사장은 사업 상대가 적극적으로 매달릴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
진혁은 몸이 굳은 듯 꼿꼿이 앉아서 라이꾸두만 바라보았다.
망치가 세차게 뇌리를 때린 듯했다.
“상도의 기본은 상대가 찾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뭐가 급하다고 그렇게 조급하게 매달리시려는 겁니까?”
진혁은 그 말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많은 사람들이 서 사장을 관심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모르긴 몰라도 여러 군데서 서 사장에게 제품을 공급해 달라고 매달릴 겁니다. 오늘 일은 그때 선택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라이꾸두의 말이 백번 천 번 맞았다.
지금은 알쇼핑의 성공적인 동남아 시장 진출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걸 잊었다.
노선기가 그렇게도 주의를 주었던 초심을 잃었다, 바보같이.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났다. 그리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무슬림이 고개를 숙이는 대상은 신뿐이다. 이런 인사는 격식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오늘 라이꾸두를 통해 큰 깨달음을 얻었지 않은가.
“오늘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요.”
“아닙니다. 비단 오늘뿐만 아니라 사업하는 내내 대인의 말씀을 가슴속에 새기고 살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진혁의 행동에 라이꾸두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런데도 진혁은 전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모자라 상대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시에 자리에 앉은 진혁은 덱스톨의 ‘덱’ 자도 꺼내지 않았다. 오직 알쇼핑의 성공 전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라이꾸두도 조금 전의 일은 기억에도 없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다.
한참 이야기하던 진혁이 말했다.
“참,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뭔가요?”
“마야를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고 싶습니다.”
“마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