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할랄 사업
라이꾸두가 커진 눈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슈퍼 블로거를 조직화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며 하마드 사장이 적극 추천했습니다. 본인도 일해 보고 싶다고 했답니다.”
“공부는 등한시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더니 그런 재주가 생겼나 봅니다.”
“학자로 키우실 게 아니면 이번 기회에 마야 씨의 재능을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 사장님이 맡아서 가르쳐 주신다면 저는 대찬성입니다. 오프라인 유통그룹들도 온라인 시장에 진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미리 배워 두면 좋을 것 같아 내가 오히려 부탁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대신 마야나 회장님도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제가 또 가르칠 때는 아주 혹독하거든요. 집에 와서 많이 울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제가 부탁드릴 일입니다. 아주 엄하게 혼내셔서 제대로 된 사업가로 만들어 주십시오.”
천하의 라이꾸두도 딸 마야의 일에서는 다른 어느 부모와 다르지 않았다.
그 후 회사로 돌아온 진혁은 마야를 불러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고 정식 직원으로 채용했다. 그러고 나서 저녁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요르단으로 건너가 라이나 왕비를 만나 덱스톨 사업에 대해 상의하려 했는데 미뤘다. 당분간 알쇼핑에 전력투구하기로 했다.
* * *
대한푸드 원주 공장에 마침내 할랄 라면 전용 라인의 증설이 완공됐다.
조촐하게 치러진 완공식에 참석한 뒤 진혁은 춘천의 유닉스로 넘어갔다.
박이동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황진선과 셋이서 모였다.
테이블에는 다양한 화장품들이 놓여 있었는데, 아기자기한 게 예쁜 장난감 같았다.
“동남아 여성들은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이런 케이스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 아자데 사장이 시제품을 만들어 보내온 것들이었다.
“인도네시아의 하마드 사장이 보내온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동남아에서는 요즘 글로우(Glow), 내추럴(Natural) 메이크업이 주목받고 있다고 합니다. 베이스 메이크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본연의 어두운 톤을 살려 매끄러우면서도 건강하게 빛나는 피부를 선호하게 됐답니다. 그래서 23호 이상의 어두운 톤의 제품을 생산하기로 했습니다.”
아자데와 하마드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잘해 주고 있었다.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유닉스에서는 특성을 살려 색조 화장품 위주로 생산하고 나머지는 이집트 공장에서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어 박이동이 보고했다.
“주변 지역에 빈 땅은 많았습니다. 헌데 문제가 있습니다.”
“뭔가요?”
“공장을 증설해도 직원을 구하는 게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 부분에서 황 이사님이 말씀해 주실 겁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다 나가고 없습니다. 지금 우리 공장의 평균 연령대도 40대 후반입니다.”
“임금 체계나 복리후생을 강화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건 큰 효과가 없을 겁니다.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말지, 시골에서 공원 소리는 듣지 않겠다는 주의입니다. 부모님들도 같은 마음이고요.”
생각지도 못한 암초에 부딪혔다.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한데 한쪽에서는 직원을 구하지 못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공장 증설 계획은 당분간 보류하기로 했다.
춘천을 나와 강릉의 부모님 집으로 가서 하루 쉴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참았다. 서울에서 처리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동성F&B 본사는 이전해 있었다.
박이동의 건의를 받아들여 을지로 3가 인근의 7층짜리 빌딩이 경매로 나온 것을 낙찰받았다.
돈은 충분했다.
비록 진혁이 이집트에 가지는 못하지만 그곳의 공장은 엄연히 동성F&B 소유였다.
중동에 팔리는 물건 대금은 이곳으로 모이게 되어 있었다.
헬스 케어 사업본부장이 된 노선기가 김상조, 신용찬과 함께 있다가 보고를 했다.
“공장 부지로는 동탄 산업 단지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접근이 가깝고 인근에 신도시가 건설되어 직원들의 주거 여건도 좋습니다. 무엇보다 경기도의 산업 단지가 공급 과잉이라 지자체가 다양한 지원과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럼 동탄으로 결정하고, 과거 직원들 모집은 어떻게 됐습니까?”
“다들 다른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고맙게도 정리가 되는 대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번에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왔습니다. 한번 실패한 일이니 천천히 가더라도 제대로 갈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노선기가 굳은 의지를 보였다.
인도네시아의 처가에 가서 제대로 대접받고 온 터였다.
진혁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는 처가에 돈을 드리는 대신 집과 땅, 가축들을 사 드렸다. 친척을 모두 불러 잔치를 열고, 못했던 결혼식도 열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처가가 단숨에 그 마을 최고 부잣집이 되었다. 그게 모두 다 진혁 덕분에 이뤄진 일이니 노선기가 충성을 맹세한 것은 당연했다.
노선기의 보고가 끝나자 이번에는 신용찬이 나섰다.
“지난번에 확정한 홍보 계획은 차질 없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지민 팀장이 이번에도 썩 괜찮은 아이디어를 내놨습니다.”
“뭡니까?”
“사장님이 소유하신 알쇼핑을 통해 자유 여행권을 판매하는 안을 건의해 달라고 했습니다.”
“알쇼핑에서요?”
진혁이 모른 척 물었다.
“현지 공항에서 출발해 한국에서 자유 여행을 하다가 식사는 할랄 여행에서 하고 돌아가는 여행 상품을 개발하면, 알쇼핑에서 해당 제품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방식입니다.”
“항공사도 그렇고 한국 여행을 담당할 여행사까지 섭외하려면 일이 만만치 않겠는데요?”
“항공사에 문의했더니 반응이 괜찮았습니다. 국내 여행사는 무조건 환영하는 분위기였고요.”
“알쇼핑의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일입니다. 항공사나 여행사는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에 관광객들에게 소홀할 수 있습니다. 잘못하면 오히려 나쁜 이미지만 심어 주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도 김지민 팀장이 보완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초기에는 우리 측 직원이 동행하고, 끝나면 설문조사를 해서 불량 여행사를 솎아낼 거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준비가 철저하다면 한번 맡겨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진혁은 속으로 뿌듯했지만 내색할 수 없어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래서 김지민 팀장에게 사업팀을 맡겨 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가맹점 지원 부문은 이제 안정이 되어서 다른 직원들이 해도 됩니다.”
“본부장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의욕이 넘쳐나는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김상조는 얼굴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진혁의 거듭된 재촉에 김상조가 결국 입을 열었다.
“사장님은 계속 사업을 키우시는 데 반해 관리 인력은 너무 부족합니다.”
“저도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부사장님이 일요일도 나오셨습니다.”
“이런. 부사장님이 통조림과 화장품 사업까지 맡고 계시다는 것을 잠시 잊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이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다만, 더 신경 쓰지 못해 말씀드린 것이니 너무 심각하게는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었다. 행복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지 행복을 포기하면서까지 일하는 것은 맞지 않았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요. 통조림과 화장품 사업을 맡아 추진할 경력자를 알아봐 주십시오.”
“그럴 거면 차라리 전체 관리를 맡으실 분을 뽑아 주십시오.”
“……?”
“사장님이 저를 믿어 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저는 제 한계를 압니다. 현재 동성F&B는 알라딘 그룹에서 사업 파트로 구분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독립된 회사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중동에 이어 동남아 사업까지 신경 써야 합니다. 제 능력으로는 더 이상 감당을 못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김상조가 솔직한 마음을 밝혔다.
그는 고래표 통조림만 보고 한 평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됐지만 다른 쪽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걸 밝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가 회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이상 권할 수 없었다.
진혁은 관리와 해외 사업 파트 경력자 모집 공고를 내기로 결정했다.
다들 나가고 혼자 서류들을 결재하고 있을 때 이춘성 변호사가 찾아왔다.
“KFDA에서 서류를 갖춰 오면 의료기기 품목 허가 승인을 유지시켜 주겠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쪽에서 이미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예?”
“나중에 인사나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올라 있었다.
국정원 김상균 차장.
그가 식약청에 힘을 쓴 것 같았다.
어떻든 걱정했던 큰 문제가 잘 해결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진혁은 퇴근하고 양재동의 일식집으로 갔다.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자 얼마 후 김상균이 들어왔다.
“또 무슨 일 있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꼭 문제아 같습니다.”
“그건 아니지만 워낙 글로벌하게 움직이는 분이시다 보니 항상 큰일만 몰고 다니셔서요. 서 사장님의 전화를 받으면 저도 모르게 긴장되거든요.”
“오늘은 감사한 마음에 식사 대접하려고 모신 자리이니 편하게 드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신선한 회가 나오자 소주를 마셨다.
“노선기 씨는 열심히 근무하십니까?”
“너무 의욕적으로 하고 계셔서 고마울 정도입니다. 감사합니다.”
“노선기 씨의 마음을 끌어내신 것은 서 사장님입니다. 전 다만 옆에서 조금 도와드린 것뿐이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 일도 그렇고 KFDA의 일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KFDA라니요?”
“차장님이 그쪽에 말씀해 주신 것 아닙니까?”
“요즘 때가 어느 때인데 함부로 전화를 합니까? 전 아닙…… 아!”
갑자기 김상균이 탄성을 터트렸다.
“짚이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이현국 비서실장님이 움직이신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청와대에 보고를 하러 들어갔다가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서 사장님의 근황을 물어보셔서 말씀드렸었거든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세계 최초로 개발한 제품이 잘못된 경영자 때문에 그동안 묻혔다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서 사장님도 칭찬하셨거든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된 일이군요. 나중에 감사 전화라도 드려야겠습니다.”
“그러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
“그분은 국익을 위한 순수한 마음에서 하신 일일 겁니다. 그런데 그런 전화를 받으면 오히려 불쾌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큰 실례를 할 뻔했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또 하나 배웠다.
* * *
좋은 일만 있는 한 주였다.
대한푸드의 ‘고추볶음면’이 마침내 할랄 인증을 획득했다.
이름은 슈퍼 블로거들이 공모를 통해 결정했다.
소스는 닭고기로 만들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라면 못지않게 닭 소비량도 엄청났다. 하루 소비량만도 약 3,700만 마리로 한국의 15배에 이를 정도였다.
무슬림이 대부분이라 돼지고기 대신 닭을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프도 닭고기를 이용해서 만들었다.
마침 KFDA의 의료기기 품목 허가 승인서도 동성F&B 이름으로 재발행됐다.
덕분에 주말을 맞아 지민과 함께 제주도로 가는 진혁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한동안 갈 때마다 일만 하다 와야 했는데 이젠 아니었다. 제주도 정착을 원하는 젊은 부부가 적응 기간 동안 펜션에 머무르는 대신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래서 저녁은 마음 편하게 외식을 하기로 했다.
‘할랄 여행’ 제주 가맹점은 제주시에 있었다. 공항에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민이 미리 예약해서인지 가맹점주까지 나와 인사하는 바람에 진혁이 오히려 당황했다.
차려진 음식은 더했다.
오는 내내 밥 한번 먹으러 멀리 간다며 투덜거렸던 김세동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중동과 동남아의 대표 요리들로 테이블이 가득했다.
무슬림을 위한 전용 냄비는 물론 숟가락, 젓가락, 컵들도 그들에게 맞게 따로 준비되어 있을 정도로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다.
이게 다 지민이 하나하나 신경 쓴 덕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손님은 많지 않았다. 아직 관광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탓이었다.
진혁이 가게 안을 둘러보는데, 김세동이 눈을 슬쩍 치켜 올리고 물었다.
“자네, 여기 사장이랑 무슨 관련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