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주머니 속 송곳
“지민 씨가 관리를 맡았던 곳입니다.”
“그럼 그렇지.”
김세동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대접이 지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눈에는 진혁이 아직도 예쁜 딸 훔쳐 가려는 도둑놈으로밖에 안 보였다.
그래도 진혁은 기분이 좋았다.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인데도 두 분 모두 맛있게 드셨다. 한국인 손님들을 위해 레시피를 달리해서 우리 입맛에도 맞았다.
식사 후에는 성산 일출봉이 보이는 전망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 * *
이틀간 제주도에서 쉬고 온 진혁과 지민은 다시 일에 매달렸다.
동탄의 덱스톨 생산 공장 건설에 신경 쓰는 한편 춘천의 유닉스 공장 증설도 챙겨야 했다.
언론에서는 연일 덱스톨의 재판매 사실을 알리고 떠들었다. 과거의 기사까지 꺼내면서 ‘세계 최초’라는 단어를 빠트리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밀려왔지만 진혁은 모두 고사했다.
세계적인 의료기기 회사들에서 판매권을 주면 투자금을 내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실 수는 없었다.
그사이 경력 사원 모집 공고에 응시한 이들을 면접 보고 두 사람을 뽑았다.
선병식은 지금은 해체된 국제상사의 총괄본부장을 한 이력을 높이 평가해 해외 사업을 총괄하게 하고 직급은 전무로 했다.
고용준은 한신그룹 기획실장 출신으로 회사 관리를 총괄하게 하고 부사장으로 임명했다.
두 사람에게 밑에서 일할 간부급 사원으로 재량껏 한 명씩 뽑게 했다.
김상조에게는 통조림과 화장품을 담당하면서 국내 사업을 총괄하게 했다.
지민도 사업팀을 맡아 관광객 유치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저녁에 만날 시간도 없었다.
그거 하나는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렇다고 해고시킬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진혁은 희준과 시간을 보내야 했다.
회사 조직이 안정을 찾아가자 진혁은 인도네시아로 날아갔다.
알쇼핑의 오픈식이 열리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비록 자포라에 몰인몰 형태로 입점하는 거지만 동남아 시장에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런 큰 의미와 달리 오픈식은 일부 관계자만 참석한 채 조용히 진행됐다.
TV나 언론에 들어가는 광고비를 슈퍼 블로거를 위해 투자해 달라는 마야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알쇼핑의 성공 여부는 SNS에 달려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진혁이라 가능한 방식이었다.
바이럴 마케팅의 특성상 시작은 미미했다. ‘고추볶음면’은 판매하는지 모를 정도로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현지 라면 대비 네 배 이상의 높은 가격이 문제라는 지적이 많았지만 진혁은 흔들리지 않았다.
문기영 회장도 생산하는 제품이 쌓이기만 하자 우려되어 전화를 할 정도였다. 100억의 선주문이 없었다면 당장 생산을 중단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는 사이 유튜브에서 재미있는 영상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 인도네시아인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즐거운 듯 깔깔거린다. 먹기 전에 ‘치얼스’를 외치며 면발을 부딪치거나 도전을 외치며 결의를 다졌다.
일명 고추볶음면 먹방 영상이었다.
그러자 이에 질세라 더 센 영상이 올라왔다. 고추볶음면 도전 대회가 열린 것이다.
총 상금 20만 달러에 우승 상금만 10만 달러이니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우습게도 이런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것은, 한 도전자가 매운 맛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신해 응급실에 실려 간 사고가 나서부터였다.
알쇼핑도 급히 자제 안내문을 내보냈지만 도전자들의 열의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런 사실들이 입소문을 통해 퍼져나가면서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비단 그것은 고추볶음면에 국한되지 않았다. 함께 등록된 화장품과 통조림에 대한 주문도 덩달아 늘어났다.
자포라가 판매하는 제품들 역시 효과를 봤다.
매일 출근해서 계속 갱신되는 판매량 보고를 받는 게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
1차 대회가 끝났을 때는 고추볶음면 하루 판매량이 5만 봉을 넘어섰다.
마야는 바로 다음 대회를 진행했는데 이번에는 레시피 경연 대회였다.
고추볶음면을 가장 맛있게 조리하고 궁합이 맞는 음식과 조합해서 차림상을 차리는 대회였다.
새로운 슈퍼 블로거들도 꾸준히 늘어났고 자포라에도 능력 있는 셀러들이 몰려왔다.
세계 경기의 하락으로 모든 상품의 매출이 줄어들고 있었지만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고추볶음면에 대한 인기는 날로 높아만 갔다.
대한푸드에서는 급히 일반 라인에서도 고추볶음면을 생산하고 거기서 나오는 제품은 다른 지역에서 판매하기로 했다.
진혁은 나흐얀에게 전화를 걸어 ‘할랄 키퍼’가 상주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할랄 인증 라인과 일반 라인의 제품이 섞이면 큰일이었다.
물론 그 비용은 동성F&B에서 내기로 했다.
출근한 진혁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하마드의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적응되실 때도 됐잖습니까. 얼마나 팔렸기에 그렇게 정신이 없으신 겁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이집트에 쿠데타가 일어났답니다.”
“쿠데타요?”
진혁이 즉시 TV를 켰다.
CNN에서 이집트 군부의 쿠데타 소식을 속보로 방송하고 있었다.
-금일 저녁 국방부 장관인 압델 팔라햐 장군은 하페즈 대통령 축출과 헌법의 효력 정지를 선언했습니다. 오들리 만수르가 이집트 임시 대통령을 맡기로 했고, 하페즈는 가택 연금에 처해졌으며, 곳곳에서 무슬림 형제단 간부들이 체포되고 있습니다.
진혁은 두 번이나 크게 놀랐다.
이집트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것보다 그 주역이 자신이 아는 압델 국방장관이란 사실에 더 크게 놀랐다.
“갈리 사장님께서 전화 주셨는데, 지금 친군부파와 친하페즈 시위대가 충돌해 곳곳에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답니다.”
“직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전해 주십시오. 필요하다면 공장 가동도 중단하고 안전하게 집에서 있을 수 있게 유급 휴가를 주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하마드가 진혁의 의견을 물었다.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바로 진혁만큼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이도 없었다.
“당분간 혼란이 이어질 겁니다. 무슬림 형제단이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지요. 아주 지독한 놈들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정리될 겁니다. 압델 장관이 전면에 나섰다는 것은 신군부가 군권을 장악했다는 상징적 모습입니다. 이집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간 겁니다.”
말하는 진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한국이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어땠는지 잘 알고 있었다.
* * *
그 시각, 김세동은 반가운 손님을 맞았다.
“바쁠 텐데 여기까지 어쩐 일인가?”
“아무리 바빠도 선배님 얼굴을 보고 가야지요. 형수님도 안녕하셨지요?”
“네. 잘 오셨어요. 차를 내올 테니 말씀들 나누세요.”
손님은 놀랍게도 국정원 차장 김상균이었다.
“진급했다더니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북한의 김 위원장 때문에 한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외국에서 유학하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을 거야.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준비되지 못한 채 권좌에 올라 더욱 혼란스러울 거고.”
“그래서 아무도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숙청이 일어나니 누구와 대화해야 할지 정하기도 힘듭니다.”
김세동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떠나 놓고 내가 괜한 참견을 한 거 같네. 김 차장이 어련히 알아서 잘할 텐데.”
“아닙니다. 선배님 같으신 분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이제 올라오셔도 되지 않습니까?”
“난 이미 잊었네. 여기가 좋아.”
딱 잘라 말하는 김세동의 태도에 김상균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누구보다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선배였다.
하지만 그게 독이 됐다.
정부의 하수인으로 낙하산을 타고 온 원장의 입장에서는 할 말 다 하는 김세동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김세동이 옷을 벗고 내려온 지 5년이 흘렀다.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김상균이 물었다.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둘 다 서울에 있지.”
“적적하시겠습니다.”
“적적할 시간도 없어. 여길 관리하고 주말에는 손님을 받다 보면 한 달이 금방 가.”
“큰딸 이름이 지민이었나요? 조그만 게 눈만 커서 참 예뻤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다 커서 직장 다녀. 요즘 남자 친구랑 같이 와서 시집보내 달라고 시위하는 중이야.”
“벌써 그렇게 됐군요. 참 세월이 빠릅니다.”
옛 추억을 더듬다가 김세동이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네. 지민이 남자 친구 놈에 대해서 좀 알아봐 주게.”
“이상한 놈을 데려온 겁니까?”
“그건 아닌데, 젊은 놈이 사업한다는데 영 미덥지 못해. 뻑하면 중동이나 동남아로 출장 갔다고 하고 말이야.”
“인적 사항을 알려 주시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지민이는 제 조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서진혁이야. 나이는 한 삼십 정도.”
“예? 서 사장이 지민이 남자 친구라고요?”
“자네가 서 군을 아는가?”
“그럼요. 아주 잘 압니다.”
김상균의 대답에 김세동의 얼굴이 굳어졌다. 국정원 고위간부가 알 정도라면 문제가 있는 놈이 틀림없었다.
중동이니 동남아니 하는 걸 보니 국제적으로 문제가 있을지도…….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김상균의 말에 기절초풍할 뻔했다.
“저뿐만 아니라 청와대에서도 잘 압니다.”
“청와대까지? 대체 놈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단 말인가?”
“대통령의 청와대 입성 일등 공신이 바로 서 사장입니다.”
“뭐?”
그럼 이야기가 이상하게 되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좀 이야기해 보게.”
김상균은 시나이 반도의 납치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대선 캠프 때 이현국 보좌관을 통해 선거 전략을 조언한 것까지 빠짐없이 들려줬다.
“제가 그동안 국내 전・현직 기업가들은 거의 다 만나 봤는데 서 사장 같은 사람은 처음입니다. 다들 없는 인연도 만들어서 정치권에 줄을 대려고 하는데, 서 사장은 청와대의 면담 요청도 거절할 정도로 곧은 사람입니다.”
“그 정도인가?”
“얼마 전에 요르단 왕비가 방문한 것도 다 서 사장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서 사장을 소개해 준 곳이 CIA고요. 해외에서는 영향력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고,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벌이는 사업도 웬만한 그룹 수준은 되는 것으로 압니다.”
“음…….”
“생각도 곧은 게 향후 우리나라 재계를 이끌어 갈 큰 재목이 될 겁니다.”
알고 보니 문제 있는 미꾸라지가 아니라 영양가 좋은 대어다.
그것도 아주 큰.
“이거 제가 선배님, 아니, 지민이에게 잘 보여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하.”
김상균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 * *
한창 일을 하던 진혁은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갔다.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차 안에는 라이꾸두 회장이 타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서두르라고 한 것입니까?”
“서 사장을 보자는 분이 계시네. 지난번에 이야기하다 만 그 기회가 온 것 같네.”
무채혈 혈당 측정기 덱스톨의 식약청의 승인과 유통을 해 줄 능력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진혁은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입니까?”
“가 보면 아네.”
라이꾸두 회장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누군데 저러지?’
진혁은 가는 곳도 모른 채 따라가야만 했다. 자카르타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터라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얼마 후 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내렸는데 커다란 저택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라이꾸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응접실이 나왔는데, 체구가 좋은 후덕한 인상의 노인과 인상 좋게 생긴 장년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꾸두가 얼른 인사하고 소개했다.
“쿤초로 임텍 회장님과 안톤 사장님이시네.”
진혁은 인사하는 것도 잊을 정도로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