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13화 (113/307)

113화. 화교와의 거래

쿤초로 임텍은 인도네시아에서는 대통령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화교 기업인 임텍 그룹은 농업, 금융업, 제조업, 임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사업을 전개하면서 총 매출이 인도네시아 국내총생산(GDP)의 10%에 달했다.

1995년에 개최한 쿤초로의 금혼식 파티에는 친족 이외에도 세계 각지에서 약 2,000명의 거래처 간부와 정부 고관들이 참석할 정도였다.

막내아들인 안톤 사장은 임텍 그룹의 대표 회사인 인니푸드를 이끌면서 ‘인니미’를 세계 1위의 라면으로 성장시킨 인물이었다.

“알쇼핑의 서 사장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서진혁입니다.”

라이꾸두의 소개에 진혁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요즘 인니에서 가장 유명한 사업가라 무례인지 알면서도 청했네. 결례를 용서하게.”

“아닙니다.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공손히 인사하고 소파에 앉자 시종이 차를 내왔다.

“본토에서 직접 공수해 온 보이차라네. 맛이 일품이야.”

“감사합니다.”

찻잔을 입에 가져가자 그윽한 향기가 났다.

“라이꾸두, 요즘 바쁘다면서?”

“서 사장님 덕분에 조금 바쁩니다.”

“손님들이 그쪽으로 다가서 인니마렛은 파리만 날리고 있다더군.”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이제 겨우 안톤 사장님 뒤꿈치를 쳐다볼 정도가 됐을 뿐입니다.”

인니마렛은 인니푸드에서 운영하는 인도네시아 최대 편의점 체인이었다.

라이꾸두 회장의 알라마트가 가맹점 수에서는 앞서지만 전체 매출은 인니마렛이 앞섰다.

쿤초로 회장이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고추볶음면이 없다고 그냥 돌아가는 손님들이 많아. 우리끼리 서로 그러면 안 되지 않겠나?”

“그런 상황인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서 사장님만 양해해 주신다면 물건을 대 드리겠습니다.”

“내가 자네 밥그릇을 빼앗은 건가?”

“천부당하신 말씀입니다. 회장님이 보살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은혜를 갚아 드려야지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안톤도 답례로 인니미를 공급해 드려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안톤의 답변에 라이꾸두 회장의 입이 찢어질 정도로 벌어졌다.

쿤초로 회장은 이곳 회교 그룹의 인도네시아 대표로 그의 말은 절대적 힘을 갖고 있었다.

무조건 공급해 달라고 해도 따라야 하는데 더 큰 선물을 안겨 주니 기쁜 게 당연했다.

지금 한창 뜨는 고추볶음면을 내놓는 것은 아깝지만 그건 특별식이었다. 반면 ‘인니미’는 주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장기적으로 어느 게 더 이득인지는 명확했다.

쿤초로 회장이 시선을 진혁에게 옮겼다.

“주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결정해서 불쾌한가?”

“전 라이꾸두 회장님께 물건을 넘겼으니 더 이상 주인이 아니지요. 제가 참견할 일이 아니기도 하지만, 더 많은 물건을 팔 수 있으니 오히려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고맙네. 그래도 그냥 받을 수 없으니 나도 선물을 하지. 안톤이 만든 제품을 자네에게 공급해 주겠네. 이곳뿐만 아니라 중동에서도 팔아 보게.”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고개를 숙인 진혁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쿤초로 회장이 이미 자신에 대한 뒷조사를 했다는 게 느껴졌다. 선물이라고는 하지만 인니푸드는 중동 판매망을 거저 가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자신에게도 이득이긴 하지만 왠지 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한 쿤초로 회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나만큼이나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리카렁이 직접 전화해서 소개를 부탁할 줄은 몰랐네.”

“리카렁?”

안톤 사장이 부가 설명을 했다.

“홍콩 메이왕 그룹의 회장님입니다.”

“……!”

“자네가 한국에서 재미난 물건을 만들었더군. 아마 그게 욕심이 나는 모양이야.”

메이왕 그룹은 드럭 스토어인 메이왕 매장을 25개국에 14,300개 이상을 가진 아시아 및 유럽 최대 건강 및 미용 전문 기업이었다.

진혁의 반짝이는 눈빛에 쿤초로 회장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 물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솔직히 나도 욕심이 나더군. 하지만 우리끼리 밥그릇 싸움을 할 수는 없지. 안 그런가, 라이꾸두?”

“맞습니다, 회장님.”

이게 화교의 힘이었다. 솔직히 부러웠다. 그리고 계속 끌려가는 분위기에 반발심도 일었다.

진혁이 쿤초로 회장을 보고 물었다.

“다른 선물은 없으십니까?”

“그건 자네가 줄 줄 알았는데?”

“무채혈 혈당 측정기 ‘덱스톨’을 달라는 곳들이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와서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말씀을 하실 줄 알았으면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

“그렇다고 회장님이 부탁하시는데 안 들어드릴 수도 없고, 아주 난감한 상황입니다.”

결국 한 번도 떠나지 않던 쿤초로 회장의 미소가 얼굴에서 사라졌다.

자신 앞에서 감히 이렇게 말하는 놈은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진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라이꾸두는 물론 안톤도 숨소리를 죽여야 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하하하하하. 내가 나이가 많아서 판단력이 예전만 같지 못하니 이해해 주게. 원하는 게 뭔가?”

“회장님의 청으로 메이왕 매장에 물건을 공급하려면 화장품 공장을 새로 세워야 합니다.”

“화장품을?”

“무채혈 혈당 측정기와 화장품은 패키지입니다. 설마 리카렁 회장님이 그렇게 경우 없는 제안을 하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끙. 계속 이야기해 보게.”

“임텍 그룹이 웨스트 자바 베카시 공단에 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거기에 공장을 세울 수 있게 도와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이미…….”

나서려는 안톤을 쿤초로 회장이 손을 들어 막았다.

인니푸드의 음료수 생산 공장을 세우기 위해 설계까지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그보다 이 일이 더 중요했다.

쿤초로 회장이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리카렁의 허락을 받아낼 자신이 있는가?”

“상관없습니다.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회장님의 부탁을 들어드린 거고, 더 좋은 파트너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제겐 손해가 아니지요.”

“알겠네. 자네에게 땅을 넘기기로 하지.”

“감사합니다. 답례는 리카렁 회장님이 대신 해 주실 것이니 저는 받기만 하겠습니다.”

쿤초로 회장의 눈이 더 날카로워졌다.

진혁은 자신과 리카렁 간에 이 일로 거래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눈 진혁은 리카렁 회장을 만나고 나서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라이꾸두와 그곳을 나왔다.

리무진이 출발하자 라이꾸두 회장이 혀를 내둘렀다.

“서 사장이 대단한 것은 알았지만, 쿤초로 회장님 면전에서 그렇게 말씀을 똑바로 하실 줄은 몰랐소.”

“전 화교가 아니지 않습니까? 쿤초로 회장님은 그걸 간과하신 겁니다.”

“그건 그렇지요.”

“조만간 동남아시아가 새로운 투자처로 각광받게 되면 해외 자금이 물밀듯이 몰려올 겁니다. 지금같이 자신이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크게 실수하시는 겁니다.”

“그동안 독선이 좀 심하시긴 했지요.”

라이꾸두도 같은 화교라 대놓고 비판하지는 못했지만 진혁의 말에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 시각, 쿤초로 회장의 저택에서도 진혁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위험한 놈이다.”

“건방진 자입니다. 화교들을 모아 압박해서 쫓아 버리겠습니다.”

“멍청한 놈. 겨우 생각하는 게 그것이냐?”

“죄송합니다.”

“우리는 이곳이 전부지만 놈은 언제 떠나도 상관없는 입장이란 것을 먼저 생각했어야지. 근거지를 말레이시아로 옮긴다면 테홍녠만 좋은 일을 시키는 것이다.”

테홍녠은 말레이시아의 가스왕, 고무왕으로 불리는 자인 그룹 회장이자 그곳 화교 기업의 대표로 쿤초로와는 경쟁 상대였다.

“지금은 오히려 놈을 도와 인도네시아에 정착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놈을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 것 아닙니까?”

“건방 떨지 마라. 한국에 K-POP이 있다면 인도네시아에는 인니미가 있다고 떠들더니, 코가 납작해지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거냐?”

“죄송합니다.”

“위험한 놈이지만 잘만 다루면 네게 큰 힘이 될 수 있는 자다. 예로부터 우리 중화인은 오랑캐를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여서 교화시켜 가며 성장해 왔다. 너도 그걸 배워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아들의 뒷머리를 바라보는 쿤초로 회장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유약한 안톤이 상대하기에는 진혁의 기가 너무 강했다.

자신이 상대해야 하는데 요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이 원망스러웠다.

* * *

홍공에서 이루어진 리카렁 회장과의 협상은 쉽지 않았다.

특유의 만만디 전법으로 핵심은 피한 채 시간을 끄는데, 아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중국에서 사업하면서 수없이 겪어 본 터라 진혁은 전혀 조급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다 중간에 세계 최대 다국적 약국 주도 건강 및 미용 그룹인 얼리언스 부스의 바실리키 부회장의 전화가 오자, 결국 리카렁 회장이 손을 들었다.

“졌습니다. 서 사장이 제시한 대로 화장품뿐만 아니라 의약품 판매도 대행해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최선의 제품을 만들어서 공급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양측 변호사의 입회하에 계약서를 작성했다.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에 대한 덱스톨의 독점 공급권을 주는 대신 화장품과 의약품을 판매해 주기로 했다.

물론 이에 따른 해당국 식약청의 허가도 메이왕 그룹이 책임지는 조건이었다.

시간이 꽤 걸렸다.

무채혈 혈당 측정기와 의약품은 동성F&B, 화장품은 유닉스가 계약자였다.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와 쿤초로 회장을 만나 공단 부지를 분양가로 매입하는 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진혁이 공단 부지에 집착한 것은 춘천의 공장 증설이 종업원을 구하지 못해 좌절되자 대체지로 인도네시아를 생각하고 검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투자의 귀재들이 이미 인도네시아가 중국 다음의 신흥 시장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미리 선점해서 공단용지가 부족했다. 게다가 가격이 분양가의 두 배가 넘었는데 그마저 매물도 없었다.

그때 걸린 게 임텍 그룹이 투자해 놓은 부지였으니 쿤초로 회장으로서는 운이 없었다.

그동안 고추볶음면의 인기는 계속 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일 매출이 십만 봉을 넘어서고 있었다.

* * *

한국으로 급히 돌아온 진혁은 임원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춘천에 있던 황진선도 오고, 동탄에서 공장 건설을 감독하던 노선기도 올라왔다.

진혁이 인도네시아의 일을 말하자 환호성이 터졌다.

고추볶음면의 유명세는 여기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큰일을 해내고 돌아온 것이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집트에 공장 건설 경험이 있는 황진선이었다.

“그럼 지난번과 같이 기술팀을 꾸려 인도네시아로 보내야겠군요.”

“이번에는 좀 다르게 갈 생각입니다. 원료를 춘천 공장에서 만들어 보내면 인도네시아 공장에서는 용기에 담고 포장만 하는 단순 작업만 할 겁니다. 황 이사님은 빈 부지에 재료 배합 시설을 세우시는 데 집중해 주십시오. 인도네시아는 이집트의 기술자들을 불러와도 충분할 겁니다.”

“그럼 한시름 놨습니다. 계획을 세워 보고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김상조였다.

“하마드 사장님의 전화를 받았는데 꽁치 통조림의 생산량을 늘려 달라고 하시더군요.”

“동남아시아인들은 바다가 가까워 생선 통조림의 수요가 적을 거라 판단했는데, 착각이었습니다. 오히려 콩 통조림의 판매가 더 저조합니다. 산청 공장의 작업은 줄이고 구룡포의 생산량을 늘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작업 인원도 재조정하겠습니다.”

그동안 김상조는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 양쪽 공장 직원의 교류 근무제를 고안해 냈다.

원하는 직원에 한해 작업량이 많은 공장으로 파견 가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둔 건데 이번에 빛을 발했다.

다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새로 영입된 선병식 전무였다.

“임텍 그룹에서 공급받을 물품을 선정하는 일도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특히나 중동에서 먹힐 제품을 골라내는 작업은 신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하마드 사장이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선 전무님은 동남아에서 잘 팔리는 상품을 조사해 주십시오.”

“아무래도 직접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가신 김에 하마드 사장부터 만나서 일정을 조율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말한 이는 고용준 부사장이었다.

“대한푸드 전 명예 회장님이 들어오시는 대로 바로 연락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회의가 끝나면 바로 건너갈 작정입니다. 인니마렛까지 공급하려면 지금의 작업량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게다가 신제품도 내놓아야 하고요.”

“다음으로 다국적 의료기기 회사에서 계속 면담을 요청해 오고 있습니다.”

“최대한 미뤄 주시고 미주 시장 쪽은 어느 업체가 유망한지 조사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태후 화장품의 정인영 사장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제가 연락하지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으시면 최대한 빨리 계획을 세워 보고해 주십시오. 그만들 나가 보세요.”

다를 맡겨진 일을 처리할 생각에 바삐 나갔다.

그런데 노선기가 남아서 머뭇거렸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