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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14화 (114/307)

114화. 오지랖도 참

진혁이 물은 후에야 노선기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인도네시아의 공장에도 기술자가 필요하겠지요?”

“그렇겠지요. 누구 추천하실 분이 있으십니까?”

“염치없지만 처남인 밤방을 써 주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제가 데리고 있어 보니 손재주가 좋습니다. 폐는 안 끼칠 겁니다.”

“저야 좋지만 사모님이 외롭지 않으시겠습니까?”

“장인 어르신의 건강이 좋지 못하십니다. 그 때문에 두 남매가 걱정하는 것을 보는 게 더 편치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무엇보다 본인 의견이 중요하니 오늘 가서 물어보시고, 그렇게 하겠다면 내일 찾아오라고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노선기가 깊이 머리를 숙이고 나갔다.

* * *

대한푸드 본사로 가자 문기영 명예 회장과 문종윤 회장, 이상미 사장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동남아시아에서 부는 고추볶음면의 열풍은 물론 이번에 인니마렛에도 입점하게 된 것도 알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앉자마자 물었다.

“생산 계획은 세우셨습니까?”

“24시간 3교대로 쉼 없이 생산하기로 했네.”

진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안일한 대책이었다.

“그렇게 해서 늘어나는 주문을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라인을 무조건 증설해야 합니다.”

“서 사장님은 판매만 하는 입장이시라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지만, 제조하는 저희들은 입장이 달라요. 이번 인기는 비정상적인 면이 많아요. 그걸 믿고 투자했다가 판매가 따라 주지 못한다면 주주들의 비난을 감당하기 힘들어요.”

“지난번같이 선주문을 넣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렵습니다.”

이상미에 이어 문종윤이 하는 말에 결국 진혁이 폭발하고 말았다.

“이 사람들이 손 안 대고 코 풀려고 하시네.”

“말씀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뭐가 심합니까? 최근 두 달간 주가가 15% 올랐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두 분의 재산 가치가 그보다는 많이 올랐을 겁니다. 그런데 또 선주문을 넣어달라고요? 제가 봉으로 보이십니까?”

“서 사장, 흥분하지 말게.”

“제가 지금 흥분하지 않게 생겼습니까? 관두십시오. 경쟁사들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자기들도 볶음면을 출시했다고요. 차라리 그쪽 걸 가져다 팔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보게, 서 사장.”

문기영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진혁을 불렀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 희준을 만나 술을 진탕 마셨다.

다음 날.

늦게 출근한 진혁은 사장실에서 기다리는 문기영을 봐야 했다.

“전화를 하시지요.”

“미안하네. 내가 자식을 잘못 가르친 것 같으이.”

“제가 찾아가 어르신께 도와달라고 하는 게 아니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소리 말게. 내 평생 지금처럼 보람된 적은 없네. 이보게, 서 사장.”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내 아들도 자식 놈이지만 고추볶음면도 똑같은 내 자식이네. 그놈만 봐 주면 안 되겠나?”

“…….”

“자네와의 사업은 내가 맡아서 하기로 했네. 더 이상 그들을 만날 필요도 없을 거야. 내 자식이 이렇게 묻히지 않게 도와주게.”

문기영의 간절한 소망을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었다. 어떻든 야인으로 지내던 그를 끌어들인 건 자신이었다.

“라인은 증설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하겠네. 뭐든 자네가 원하는 것은 다 해 주겠네. 그러니 판매만 해 주게.”

“그건 걱정 마시고 돈이나 더 준비하십시오. 얼마 못 가 더 늘리셔야 할 겁니다.”

“하하하. 속이 다 후련해지는 말이군. 내 집을 팔아서라도 마련할 테니 걱정 말게.”

“좋습니다. 그럼 신제품에 대한 말씀을 나누지요.”

두 사람 모두 어제의 일은 잊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했다.

“컵라면용으로도 만들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네.”

“치즈볶음면도 필요합니다.”

“라면에 치즈를 넣으라고?”

구세대인 문기영이 이해 못 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시겠지만 매운 음식엔 캅사이신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그게 혀에 통증을 줌으로써 매운맛이 느껴지는 겁니다. 치즈 속 단백질이 캅사이신을 녹여 분해합니다.”

“그렇군.”

“아직 발표는 안 했지만 지금 열리고 있는 궁합이 맞는 최고 음식에 치즈와 삼각 김밥이 선정되었습니다. 충분히 팔릴 겁니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렇게 되겠지. 알았네. 최대한 빨리 시제품을 만들어서 보내겠네.”

식사라도 하고 가시라는 말에 문기영은 새 제품 개발 욕심에 거절했다.

진혁은 차를 타는 곳까지 배웅했다.

저녁에는 정인영을 만났다.

강남의 레스토랑으로 가자 정인영이 먼저 와 있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천진홍입니다. 꼭 뵙고 싶어서 실례인 줄 알면서도 같이 나왔습니다.”

“진홍 씨가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해서요. 우리 약혼한 건 아시지요?”

“아, 서진혁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진혁은 그제야 정인영이 약혼했다는 지민의 말이 기억났다.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 진홍이 말했다.

“저는 용건만 이야기하고 일어나겠습니다.”

“전 상관없으니 함께 하시지요.”

“아닙니다. 오랜만에 만나셨으니 하실 말도 많으실 거고, 제가 머리 아픈 사업 이야기는 질색이라서요.”

그렇지 않아도 불편했던 진혁이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뭡니까?”

“제가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차렸습니다. 첫 해외 공연을 기획하고 있는데 동남아를 생각 중입니다.”

“좋은 선택입니다. 한류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은 곳입니다.”

“그 때문에 선택했는데, 현지에 인맥이 없다 보니 난감하던 차에 서 사장님이 그쪽에서 사업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같이 나왔습니다.”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원하신다면 최대한 알아보겠습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천진홍은 시종일관 예의 발랐다.

메일로 회사 소개서와 공연 계획서를 전해주기로 하고 먼저 떠났다.

“좋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일에 대한 열정도 느껴지고요.”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니까요. 일단 주문부터 해요.”

정인영은 배가 고픈지 음식부터 시켰다.

“얼굴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저도 하고 싶은 일을 해서 그럴 겁니다. 인영 씨는 어때요?”

“조금 힘들어요.”

“원했던 일이잖아요.”

“사업을 하는 것과 회사를 운영하는 건 다른 것 같아요.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요. 결재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요.”

충분히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결국 다시 정소연으로 돌아갔군요.”

“무슨 말이에요?”

“자신의 위치를 잃고 헤매고 있다고요. 무슨 결재를 하루가 다 갈 정도로 합니까? 그 시간에 매출 올릴 생각을 하셔야지요. 결재 잘하면 돈이 벌린답니까? 아래 사람들을 믿고 맡기세요. 인영 씨는 지휘자지 단원이 아니잖아요.”

“아는데…… 그게 잘 안 돼요. 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겨우 얻은 자리예요.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부담이 커요.”

지난번에 인영은 자신의 목표가 인정받는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 집안 어른들, 주주, 그리고 사업가로서.

그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인영 씨 자신만 생각하세요. 난 뭘 하고 싶은 건지.”

“당연히 태후 화장품을 세계 최고의 회사로 키우고 싶어요.”

“그럼 그것만 신경 쓰세요. 그러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됩니다. 나나 천진홍 씨를 봐요. 누가 시켜서 일하나요?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죠.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어요. 지들 인생 지들이 사는 거고, 내 인생 내가 사는 건데요.”

“…….”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은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내가 도와줄게요.”

“정말요?”

인영이 놀라 물었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오늘 나오지도 않았고 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혁 씨에게 한 짓을…….”

“그만. 그때는 그렇게 결정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지금 그걸 되돌릴 수도 없고요. 사업은 정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마워요.”

“사업의 빚은 말로 갚는 게 아닙니다. 나중에 내가 필요할 때, 그때 도와주면 됩니다.”

얼마 전의 진혁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거다. 아니, 오늘 이 자리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화교들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끊임없이 협력하고 있었다. 그게 10%도 안 되는 이방인이면서 90%의 현지인을 거느리는 방법이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게 뭡니까?”

“중국 시장 매출이 생각만큼 늘지 않고 있어요. 소비 시장의 성장세보다 경쟁이 더 치열해요.”

“거기에 전력투구하면 매출이 늘어날까요?”

“솔직히 자신하지 못하겠어요.”

“그런데 왜 거기에 매달립니까? 거긴 직원들에게 맡기고 인영 씨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어야지요.”

“……!”

“정체된 의류 시장에서 아웃도어로, 그리고 뷰티로.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발굴해 낸 정인영은 어디 간 겁니까?”

“그때는…….”

인영은 다음에 이어질 말을 억지로 참았다. 그 말을 해 버리면 자신이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았다.

진혁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이미 끝난 인연이었다.

일부러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제가 뛰어난 사업가는 아니지만, 경험으로 말하자면 결국은 ‘같다’는 거였습니다. 한 번의 성공이 어렵지, 나머지는 같더군요. 아이템과 지역만 변할 뿐 룰은 같습니다.”

“전 진혁 씨같이 그렇게 머리가 뛰어나지 못해요.”

“아웃도어를 생각해 보세요. 바람막이 다음은 뭐였지요?”

“패딩이었어요.”

“그럼 화장품 다음은?”

“미용?”

“빙고!”

진혁이 일부러 과장되게 큰 소리로 외치고 엄지까지 치켜들었다.

“한국 화장품을 찾는 이유는 드라마와 K-POP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그들을 닮고 싶어서 그들과 같은 화장품을 쓰는 거죠. 하지만 그걸로는 다른 외모를 감출 수 없죠.”

“설마 성형을?”

“연예인치고 성형 안 한 사람이 있나요?”

되묻는 진혁에게 인영은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연예인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고마워요. 이제 뭔가 보이는 것 같아요.”

“노, 노. 거기서 멈추면 안 되죠.”

“뭐가 더 있나요?”

“인영 씨는 이제 사장입니다. 본분을 잊으면 안 됩니다. 미용은 서브 아이템이지 주력이 아니잖아요. 화장품도 중국 이외의 신 시장을 개척해야 해요.”

“그것에 대해 검토했는데 쉽지 않아요. 현지 유통망과 연계하는 것은 단순히 돈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해요. 그쪽 유력 인사와 선이 닿아야 하는데, 그것도 이미 경쟁 업체들이 차지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해요.”

진혁은 어이가 없었다.

“천진홍 씨에게 많이 배우셔야겠습니다.”

“예?”

“약혼자와 과거 이런저런 소문이 있던 남자를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꼭 성공시키고 말겠다는 절박함 때문일 겁니다.”

“…….”

“강이 가로막으면 다리를 놔서 건너고, 산이 나타나면 터널을 뚫어서라도 반드시 내가 세운 목표로 도달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사업은 약혼자에게 맡기시고 신부 수업이나 하세요.”

진혁은 일부러 차갑게 말해 버렸다.

부족함 없이 자란 인영이라 자신 같은 절박감이 없었다.

분한 기분에 입술을 곱씹는 인영의 모습에 진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룹에 요청하세요. 세계로 뻗어 있는 태후의 네트워크를 이용할 생각은 왜 못 하세요? 공간이 없으면 매장 안에 샵인샵 개념으로 자리라도 만들어 달라고 하세요. 인영 씨가 남입니까? 태후 가족이잖아요. 당당히 요구하고 실적으로 보여 주면 되잖아요.”

“알겠어요. 아버지께 말씀드려 볼게요.”

“어렵다고 보고했던 그 직원은 쫓아 버리세요. 그리고 한지철 본부장님을 부르세요. 그분 없다고 아웃도어 사업이 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은 인영 씨 일만 챙기세요. 남을 배려하는 것은 성공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풀죽은 인영의 모습에 진혁이 가져간 선물을 내놓았다.

“빈손으로 도와달라고 하면 회장님도 난감해하실 겁니다.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는 내가 같이 팔아 드릴게요.”

“정말요?”

“좋아하지 마세요. 수수료 많이 받을 겁니다. 그리고 할랄 인증도 받아 와야 해요.”

“그건 당연히 해야죠.”

인영의 얼굴이 활짝 폈다.

고민해야 할 지역이 반으로 줄었다. 특히나 유럽과 미주는 선진국들로 태후의 강세 지역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져 있었다.

인영이 진혁을 보며 은근하게 물었다.

“오랜만인데, 술 한잔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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