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고생 끝에 인정
인영은 자리를 옮겨 술을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진혁은 사적인 이야기까지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단순히 정인영을 돕기 위해 만난 자리가 아니었다.
화교계의 거목인 쿤초로 회장, 리카렁 회장과의 연이은 만남은 진혁의 눈을 한 단계 더 높아지게 했다.
독불장군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진혁은 알쇼핑의 모든 물건을 자신이 직접 채우려고 했었다.
그게 얼마나 우매한 짓인지 이제는 알았다.
이미 완성된 판매망과 유통망이니 물건을 하나라도 더 올려 파는 게 이득이었다.
그게 누구 것인지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인영의 물건에도 수수료는 붙는다. 나중에 인영이 개발한 네트워크에 자신 역시 판매를 맡길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뒤에는 태후가 버티고 있었다.
서로가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무궁무진했다. 정호영같이 싸가지 없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
* * *
다음 날은 TG그룹 사람들을 만났다.
소명준 전자 사장과 박진욱 제약 사장이었다.
소명준 사장의 얼굴이 활짝 펴져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판매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고추볶음면이 떠들썩하게 인기를 끌고 있다면 TG전자의 모기 쫓는 에어컨은 소리 없는 강자였다.
임산부 가족을 둔 가정을 중심으로 꾸준한 구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구매는 알쇼핑에서 하고 제품은 TG전자에서 배달, 설치해 주는 방식이었다.
가격이 나가는 만큼 매출 면에서는 큰 도움이 됐다.
“다른 제품도 속히 개발해 주십시오. 조만간 2차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희희낙락한 소명준과 달리 박진욱의 표정은 초조했다.
“일단 아시아 지역의 판매망은 확보했습니다. 당뇨약뿐만 아니라 일반 의약품도 가능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조만간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제 역량이 미치지 못하니 직접 개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제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좋아하는 박진욱에게 진혁이 제동을 걸었다.
“이 내용은 TG제약뿐만 아니라 다른 국내 제약사에게도 동일하게 알려질 겁니다.”
“그건…….”
“아시아 지역의 판매를 맡아 주기로 한 곳은 화교 그룹입니다. 화교 네트워크를 보면서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들은 각자 영역을 지키면서 서로 협력하고 돕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업들은 국내는 물론 밖에 나가서도 서로를 헐뜯고 경쟁하기 바쁩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맞는 말이었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줄 세우기 교육을 받으며 끊임없이 경쟁하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박진욱의 다음 말이 그걸 증명했다.
“부탁하는 입장에서 서 사장님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압니다. 대신 다른 기업들에게는 조금만 늦게 통보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대신 수수료는 충분히 책정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박진욱은 언론 보도를 선점해 자신의 업적과 회사 이미지를 높이겠다는 꼼수를 부렸다.
덕분에 진혁만 좋아졌다.
다른 기업과의 협상 시 TG제약의 수수료가 기준이 될 테니,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다.
박진욱은 명분을, 진혁은 실리를 챙겼다.
다음 날, TG제약은 증권 거래소 공시를 통해 당뇨 신약 ‘로미글로’뿐만 아니라 일반 의약품에 대한 아시아 지역 판매 계약을 체결했고,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판매망 확보도 논의 중이라고 발표했다.
주가가 당장 10% 상승해 박진욱의 계획이 성공적임을 증명했다.
* * *
동탄 공장 건설의 진척 상황을 확인한 진혁은 서울로 올라와 일을 보다가 퇴근 후 이모집으로 갔다.
이모와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지민이 늦게 퇴근해 들어왔다.
사업 시행 초기라 일이 엄청나게 많았다. 귀국 후 이렇게 얼굴 보는 건 처음이었다. 회사에서도 사무실이 달라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다.
얼굴이 퀭해서 그러지 않아도 큰 눈이 더 커 보이는 지민의 모습에 진혁이 우려를 나타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닙니까?”
“저보다 진혁 씨가 걱정이에요. 난 집에서 다니지만 진혁 씨는 계속 외국을 오가잖아요. 그렇다고 들어와서 쉬는 것도 아니고.”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몸은 힘들지만 기분은 좋아요. 저뿐만 아니라 팀원들 모두 직장 생활 할 맛 난다고 해요. 신 이사님이 직원들 의견을 적극 수용해 주시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런데 이번에 선 전무님을 따라 동남아에 다녀오겠다고요?”
회사에서 신용찬에게 김지민이 팀원들과 함께 동남아 현지 조사차 출장계획을 올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동남아시아를 경험해 보지 못하고 홍보 전략을 짜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요. 현지 여행사 관계자들도 직접 만나 보고 싶고요.”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난 같이 못 갈 것 같아요. 중동에 다녀와야 해서요.”
지민의 얼굴에 실망감이 드러났다. 일이 우선이긴 하지만 낯선 곳에서의 진혁과의 데이트도 기대했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털어냈다.
일 때문일 텐데 자신이 그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빠가 이번 주말에 제주도로 내려오래요.”
“제주도요?”
“바빠서 어렵다고 했는데도 무조건 내려오래요. 진혁 씨도 함께요.”
“그럽시다. 다음 주에 한국을 떠나면 또 언제 갈지 모르는데.”
원래는 이번 주에 강릉에 같이 갈 생각이었다.
내일 춘천 공장 증설 현장은 오후에 방문하는 것으로 하고, 진혁 혼자 강릉으로 가서 부모님을 뵙는 것으로 했다.
다음 날 점심 약속 상대는 한지철이었다.
갑자기 전화해 와 무조건 보자고 우겨서 어쩔 수 없었다. 희준도 함께 나와 있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바쁠 텐데 불러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전화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혹시 정인영 사장님 만났냐?”
한지철의 질문에 짐작되는 바가 있었지만 모른 척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갑자기 부르셔서 도와달라며 화장품으로 옮기란다.”
“그럼 가세요. 가서 하실 일이 엄청 많을 겁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지금까지 의류 쪽으로만 돌아서 화장품은 전혀 생소한 분야야.”
“선배는 유통 전문가시잖아요. 뭐가 됐든 사업은 얼마나 많이 파느냐로 승패가 갈립니다. 제품 생산은 공장에 맡기고 선배는 유통망 확보에 집중하시면 되니 딱 맞는 일이네요.”
“정 사장님을 만나긴 만난 거구나.”
“유통망 확보에 신경 쓰라고 했더니 ‘스페이스 워커’에서 손발을 맞춘 선배를 생각해 낸 모양입니다. 인영 씨가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요.”
진혁은 한지철의 입장을 생각해서 끝까지 인영이 그를 택한 것이라고 했다.
“정 사장님이 나를 선택해 준 게 기쁘기는 한데, 잘해낼 수 있을지 솔직히 고민이 앞선다.”
“선배라면 잘하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무조건 가셔야지요. 이사 대우로 올려 주시기로 했다면서요?”
희준의 말에 진혁이 환하게 웃었다.
“우와,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별을 다셨네요.”
“아직은 아니야. 가서 잘해야지.”
“내년에는 분명 ‘대우’ 딱지를 따실 겁니다. 제가 그건 장담합니다.
진혁의 격려에 한지철이 마음을 굳혔다.
모든 직장인의 꿈은 임원, ‘별’을 다는 것이다. 거기에 가까워졌으니 더 이상 꿈만은 아니었다.
희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참, 너 카이로 지사가 연락 사무소로 바뀐 것은 모르지?”
“그렇게 됐어?”
“너 떠나고 최영재가 맡아서 운영했었거든. 그런데 실적도 급락한 데다 쿠데타가 터지자마자 말도 없이 귀국해서 사표 한 장 던지고 사라졌어. 참 무책임한 사람이야.”
“…….”
“그 덕에 죄 없는 손민한 부장님만 날아갔어.”
“손 부장님이?”
“100억이 허공에 날아갔어. 그냥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지. 원래는 지사를 폐쇄하기로 했는데 책임 문제 때문에 연락 사무소로 격을 낮춰서 유지하기로 한 거야. 대신 손민한 부장님이 옷을 벗게 됐어. 씨펄. 진짜 책임질 놈은 따로 있는데 말이야.”
정호영을 지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후계자였고 손민한은 일개 고용인일 뿐이었다.
* * *
주말에는 제주도로 내려갔다.
오랜만이라 지민의 여동생 지현이도 데리고 갔다.
장모님이 차려놓으신 푸짐한 밥상을 보자 식욕이 절로 났다.
허겁지겁 먹는 진혁의 모습에 김세동이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 쌀만 축낼 작정인가?”
“맛있잖습니까. 거리가 가까우면 매일 와서 얻어먹겠습니다.”
“당신은 왜 자꾸 밥 잘 먹는 사람을 뭐라 하세요?”
“내가 지금 밥 먹는 것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이 눈치가 없잖아. 이런 눈치로 사업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
“……?”
“부모님께 한번 뵙자고 말씀드려.”
“어머, 그럼 당신도 이제 서 군을 인정하는 거예요?”
“내가 인정 안 한다고 지민이 저놈이 물러날 것 같아? 에이, 딸자식 키워 봐야 다 헛일이야. 아무튼 빠른 시간 안에 날 잡아.”
“고맙습니다, 아버님.”
진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아빠.”
“축하해요, 형부.”
김세동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지현의 ‘형부’라는 소리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이어진 식사 자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했다.
식사가 끝나고 세 모녀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을 때 응접실에서는 진혁이 김세동과 술을 마셨다.
“외국에서 사업하기 힘들지 않은가?”
“힘듭니다만 그보다 보람이 큽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물론 많이 버니 좋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기획한 일이 성공하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모습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한국을 알리는 기쁨도 있고요.”
“그런 이유라면 한국에서 해도 되지 않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좁은 땅 덩어리가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변변한 천연 자원도 없습니다. 굳이 여기서 서로 더 차지하겠다고 우리끼리 피 터지게 싸울 필요도 없지요. 세계는 넓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그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물론입니다. 세계에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인의 저력을 알리는 일입니다.”
진혁은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을 보며 느낀 점을 들려주었다.
“그들의 뿌리는 중국이지만 사업하는 곳은 각기 다릅니다. 하지만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어 서로 도우며 세계 경제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유태인들처럼 말입니다. 한민족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아니, 서로 합심할 수 있다면 그들보다 더 크게 성공할 겁니다.”
“한민족 네트워크라…….”
“그렇습니다. 외국에서는 한민족을 모래알이라고 비하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아무도 그 길을 걷지 않아 모를 뿐 누군가 시도해 성공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민족의 적응력은 세계 최강이잖습니까?”
“그걸 자네가 해내겠다는 말인가?”
“해낼지는 자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시도해야 합니다. 설사 저는 실패하더라도 다음 사람이 제 실패로부터 배울 수는 있겠지요.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공하겠지요. 전 그걸 믿고 달려갈 겁니다.”
“엄청난 일이야. 자네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 큰일이네.”
“인정합니다. 화교를 보고 합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들어와서는 이런저런 기업들과 연대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진혁이 들려준 이야기를 들은 김세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기업들만의 힘만으로는 부족해. 그들의 행동은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
“그렇기는 합니다만, 과거의 사례를 보면 정치권과 얽힌 기업가치고 뒤가 좋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건 정경 유착 때문이지. 국익보다는 개인의 사욕을 먼저 내세워서 그렇게 된 거야.”
“그것도 외국에서 사업하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한국에서 사업하려면 정치권과 얽히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외국으로 돌아만 다닐 수는 없지 않는가? 자네가 구상하는 한민족 네트워크도 결국 중심은 한국이 될 거네.”
“그렇기는 합니다만,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많거든요.”
“당장 한국의 정치권과 인연을 맺으라는 게 아니야. 하지만 준비는 해야지. 무조건 피한다고 능사는 아니네. 언젠가는 결국 부딪힐 일이야.”
“알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뜨뜻미지근한 대답에도 김세동은 더 이상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고, 무엇보다 진혁 본인이 그 필요성을 느껴야 할 일이었다.
* * *
제주도에서 푹 쉬고 돌아온 진혁과 지민은 각기 해외 출장을 떠났다.
진혁은 비행기 시간이 늦어 선병식 전무가 인솔하는 동남아 시장 조사단을 먼저 보내고 요르단으로 향했다.
요르단에 도착해서 왕궁으로 가자 라이나 왕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샤리프 국왕뿐만 아니라, 양복 차림의 체구가 건장한 노신사도 함께 있었다.
진혁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역시 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