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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16화 (116/307)

116화. 계륵이 된 이집트

국왕 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나자 노신사가 포옹을 해 왔다.

“사미 사파디입니다.”

“서진혁입니다. 청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선택해줘서 고맙습니다.”

사미 사파디는 요르단에 본사를 둔 중동 최고의 제약회사 하크마(Hakma)의 회장이었다.

그는 요르단 정부의 자원 장관을 지냈고, 요르단 무역 협회를 창설했으며, 왕의 경제 자문 위원이기도 했다.

무채혈 혈당 측정기 덱스톨의 공급을 요청한 제약회사 중 하크마란 이름을 보고 라이나 왕비에게 전화를 했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다 되어 있기에 신경전을 벌일 일은 없었다.

덱스톨을 제공해 주는 대신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의 디럭 스토어에 한국 의약품과 화장품을 공급해 주기로 했다.

양측 모두 수익금의 2.5%를 라이나 왕비가 운영하는 ‘요르단 리버 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

내일 사무실에서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한 뒤 사파디 회장은 돌아가고 진혁은 샤리프 국왕 부부와 식사를 했다.

“공주님들이 안 보이세요.”

“림이 미국으로 유학 가기로 결정해서 학교를 알아보러 갔어요. 디나도 졸라서 따라갔고요. 며칠 후에 돌아올 텐데, 얼마나 머무르실 건가요?”

“내일 계약을 마치면 이집트에 가려고 합니다. 떠난 지 너무 오래돼서요.”

“이제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입국 금지 조치가 풀렸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셰리피가 직접 전화해서 압델 국방장관이 찾는다고 했다.

샤리프 국왕이 혀를 찼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치러지는 연례행사지. 국민들이 원하는 바에 따랐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어. 왜들 권력에만 집착해 그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쯤에서 중동의 지도자 중 진정한 리더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시리아, 리비아, 이라크에 이어 이집트까지. 현재 중동의 여러 나라들이 궤도를 이탈해 각자 벼랑으로 내달리는 형국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상황이네. 그래서 중동의 여러 지도자들이 그들을 믿지 못하고 있지.”

“그러니까 더욱 리더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혼란을 틈타 이슬람 무장 단체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인의 시선에는 중동 하면 테러 단체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이 고착되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네. 뜻있는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눠 봐야겠어.”

샤리프가 말을 마치자 라이나 왕비가 우려의 목소리를 내놨다.

“이집트의 압델 국방장관은 상당히 호전적이라고 하는데, 그냥 들어가도 되시겠어요?”

“이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분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조심하셔야 해요. 권력을 쥐고 변하는 사람을 여럿 봤어요. 미스터 서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무슬림에게 대단히 중요한 사람입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조심하겠습니다.”

“나한테도 하지 않는 걱정을 자네에게 하는군. 이거 질투 나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내가 자네를 입국 금지 시켜야 할 것 같네.”

“그렇게 해 보세요, 나도 미스터 서를 따라 동남아로 갈 테니까. 당신이 잡지만 않았으면 나도 지금쯤 세계를 누비고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왕비님.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하하하하.”

샤리프 국왕도 집에서는 어느 남편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라이나가 진혁을 바라봤다.

“다음에 오실 때는 마르와 양을 데려와 주세요. 디나가 많이 찾아요.”

“알겠습니다.”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본 공연이 너무 신났나 봐요. 자꾸 가게 해 달라고 졸라서 말리느라 애를 먹고 있어요.”

“저 역시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뜁니다. 처음 그런 공연을 봤지만 온 청중이 한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를 때는 소름이 다 돋더군요.”

“대단하긴 대단했지요. 우리 젊은이들도 주말이면 공원에 모여 한국 아이돌 그룹의 노래는 물론 안무까지 따라하고 있을 정도예요. 한류 열풍을 실감하고 있답니다.”

라이나 여왕의 말에 진혁의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천진홍.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흥미로운 부탁을 받았습니다.”

“……?”

“아시는 분이 연예 기획사를 차리셨는데, 그 첫 해외 행사로 동남아 공연을 기획한다며 도움을 청하더군요. 요르단에서도 공연을 열어 달라고 부탁해 볼까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죠. 디나가 너무 좋아할 겁니다. 안 그래요, 여보?”

“디나뿐만 아니라 한류에 빠진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으니 잘 추진해 보게.”

“알겠습니다. 제가 꼭 성사시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요르단 정부에서 도와준다면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 왕국에서 밤을 보낸 진혁은 다음 날 하크마 본사에서 사미 사파디 회장과 계약서를 체결했다.

* * *

진혁이 카이로 공항에 내린 것은 근 6개월만이었다.

출국장을 나서자마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미스터 서!”

카심이 큰 소리로 외치며 달려왔다.

회색 양복이 잘 어울렸다.

수행비서 역할을 하다가 진혁이 쫓겨나자 할 일을 잃은 그에게 갈리가 공장과 협력업체 관리를 맡겼는데 의외로 일을 잘한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고생 많으셨지요?”

“아닙니다. 미스터 서가 더 고생이 많았지요. 이렇게 돌아와 줘서 고맙습니다.”

“여기가 제 터전인데 당연히 돌아와야지요. 그리고 이건 부탁하신 선물입니다.”

큰 박스를 건넸다.

덱스톨 시제품과 이번에 공급하기로 한 TG제약의 당뇨약들이었다.

카심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회사에 도착하자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벌게진 눈으로 인사를 했는데, 소마야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진혁도 감정이 격해져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안아 줬다.

그런 두 사람을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다.

저녁에는 세미라미스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갔다. 압델이 여전히 그곳을 안가로 이용하고 있었다.

셰리피 소장뿐만 아니라 낯익은 인물도 함께 있었다.

악연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브라힘 내무부 장관.

당연히 인사를 나누는 진혁의 눈빛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압델이 그 모습에 웃으며 말했다.

“세상이 뒤집어졌어. 지난 일은 잊게나.”

“예.”

대답은 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고문과 회유, 협박.

자신에게 했듯이 이브라힘은 지금도 무슬림 형제단 간부들을 잡아들여 그런 짓을 벌이고 있었다.

그걸 압델이 묵인해 주는 것도 모자라 지지까지 해 주고 있었다. 그 덕에 전 정권의 관료 중 유일하게 이브라힘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게 봐서인지 압델의 태도도 변해있었다.

원래 호전적이고 거침없었지만 예의를 잃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안중에 없는 태도였다.

“문화부 차관 한 명이 무슬림 형제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정황을 포착해서 내사 중입니다.”

“내사는 무슨. 당장 잡아들여서 윗선을 밝혀. 그런 놈들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줘야 해.”

“알겠습니다.”

이집트는 곁으로는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쿠데타를 반대하는 친하페즈파의 시위대를 군과 경찰이 발포까지 하며 탄압하니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공포 정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들리 만수르가 이집트 임시 대통령으로 있지만 실권은 압델이 쥐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압델이 진혁에게 시선을 줬다.

“다시 돌아와서 사업을 일으켜 주게. 외화 부족이 심각해.”

“알겠습니다만 그 전에 지난 정부에서 강탈해 간 제 돈은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이브라힘이 당장 반발하고 나섰다.

“말이 심하군. 그건 엄연히 광구를 매각하고 받은 정상적인 대금이었어. 계약서를 작성했지 않는가?”

“그거야 강압에 의해서…….”

“그만!”

압델의 호통에 두 사람은 입을 닫아야 했다.

“셰리피.”

“예, 각하.”

“미스터 서에게 군납 물량을 늘려 줘.”

“알겠습니다.”

“그 정도로 하고 지난 일은 끝내.”

“……예.”

“수출을 많이 해 주게. 달러를 들여와야 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혁에게는 뼈저리게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는 자리였다.

결국 진혁은 술을 입에 대지도 않고 그곳을 나왔다.

이집트에 미래는 없었다.

* * *

다음 날, 갈리는 진혁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지난밤 굴욕을 당한 진혁이 당장 이집트에서 사업을 철수할 준비를 하라고 해서 말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곳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습니다. 사업이 커질수록 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단 말입니다.”

“권력은 유한하지만 기업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장님도 벌써 세 명의 대통령을 겪으시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와 지금은 달라요. 압델의 독선이 너무 지나칩니다.”

“우리야 떠나면 되지만 여기 남은 직원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이뤄 놓은 것은 어떻게 하시고요.”

진혁이 답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그 부분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이집트에서 계속 머물자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하마드의 의견에 따라 데이터 센터를 옮기셨지 않습니까? 그렇게 사업의 중심지를 이동하는 겁니다. 서서히 말입니다.”

“음…….”

“현재 알라딘은 알라딘 컴퍼니, 알라딘 유통, 알라딘 무역, 알라딘 화장품으로 되어 있습니다. 공장은 한국의 동성F&B 것이니 별개로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이 중 우선 알라딘 컴퍼니와 화장품을 옮기시지요. 그리고 유통과 무역을 순차적으로 옮겨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부에서 막을 수 있으니 이곳에 지부를 두고 사업은 계속해야 합니다.”

갈리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진혁의 마음이 움직였다.

“지역은 어디가 좋겠습니까?”

“데이터 센터가 있는 두바이가 최적입니다. 세계 기업들이 다 들어와 있어 통치권자가 바뀌더라도 함부로 하기 힘들 겁니다. 정부도 투자 유치에 적극적입니다.”

“좋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해 주세요.”

“계획을 실행하려면 하마드가 필요합니다. 제가 두바이로 가면 얼마간이라도 이곳을 관리해야 합니다.”

“지금 동남아 쪽도 막 커 가는 상황이라 하마드 사장이 빠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의외의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안 되면 그 역할을 핫산에게 맡기기로 하고 일단 좀 더 세밀한 실행 계획을 세우라고 했다.

물론 이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잘못 알려지면 혼란이 커질 수 있었다.

* * *

며칠간 이집트에 머물던 진혁이 젯다로 건너갔다.

JK모건으로 가서 스미스 지점장을 만났다.

“갑자기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마침 이집트의 일이 끝나 인도네시아로 넘어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이집트는 좀 어떻던가요?”

“당분간은 사업하기에 최악일 듯합니다.”

진혁의 푸념에 스미스가 눈을 반짝였다.

“자포라를 맡아 보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지금도 하고 있잖아요?”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말입니다.”

“삼부 회장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베나토른 쪽에서 먼저 요청한 일입니다. 서 사장님이 맡으신 이후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매출이 열 배 이상 급성장했습니다. 다른 곳들도 두 배 이상 늘었고요. 기업 가치가 세 배나 커져서 서로 투자할 수 없냐고 문의할 정도입니다.”

진혁이 장고에 빠져들자 스미스가 다시 말했다.

“베나토른 경영진은 물론 최대 투자자인 싱가포르 국부 펀드 테마홀딩스도 같은 의견입니다. 물론 우리 JK모건도 마찬가지이고요. 서 사장님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든 설득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연봉이나 기타 부대조건은 최대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고민하던 진혁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스톡옵션을 추가해 주십시오. 가능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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