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실패로부터 얻은 교훈
“스톡옵션을 말입니까?”
“성과로 평가받는 데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지 않습니까?”
스톡옵션은 주식 매입 선택권 및 주식 매수 선택권이라고도 부른다.
자사의 주식을 일정 한도 내에서 액면가 또는 시세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매입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스미스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검토해서 만족하실 수 있는 답을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도움은 제가 더 많이 받았는데요.”
그날 저녁은 아우다 그룹의 아메만 사장이 대접했다.
진혁의 제안대로 일본 주식에 투자해 대박을 터트리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스미스가 다음 투자처를 물었다가 진혁이 당분간은 사업에만 몰두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잠시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진혁이 요르단에서 K-POP 공연을 열기로 했다는 말에 아메만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열 수 있도록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중도에 주식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던 진혁에 대한 보상이었다.
* * *
진혁이 자카르타에 도착한 건 지민이 막 돌아간 다음이었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면서 얼굴도 보기 힘든 불쌍한 커플이었다.
하마드를 만나 이집트와 젯다의 일을 차례로 들려주었다.
“이집트의 일은 안타깝지만 자포라의 제안은 정말 좋은 기회입니다. 이곳 시장이 엄청나게 커질 겁니다. 이건 선병식 전무님도 같은 생각이셨습니다.”
“만나 보시니 어떻던가요?”
“무역에 대한 경험이 많으셔서 그런지 감각도 뛰어나고 의욕도 넘치시는 분이셨습니다. 제가 오히려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다행이군요. 문제는 이집트입니다. 갈리 사장님이 계획을 세우고는 있는데 하마드가 꼭 필요하다고 합니다. 핫산을 대안으로 검토하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미덥지 못한 것 같습니다.”
“몸을 둘로 나눌 수도 없고. 저도 참 답답합니다. 자포라를 맡게 되시면 이곳 일도 엄청 커질 텐데. 중동 시장을 전체를 생각하면 그쪽도 소홀히 할 수 없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인재를 확보할 걸 후회스럽습니다. 그렇다고 도와줄 사람이…… 아!”
갑자기 진혁의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하마드가 낌새를 알아차리고 물었다.
“누구 적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한데 일단 알아봐야겠습니다. 어찌 될지 모르니 하마드 사장님도 다각도로 계획을 세워 두세요.”
“알겠습니다.”
앞으로의 일은 그 정도로 마무리하고 현재 벌어지는 일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인니마렛에서 판매가 시작되자 잠시 주춤하던 ‘고추볶음면’의 매출이 다시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로 인해 준비했던 이벤트를 급히 뒤로 미뤄야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혜택은 다른 데 있었다.
인니푸드로부터 물건을 공급받게 되자 알쇼핑의 상품군이 풍성해졌다. 인터넷 쇼핑의 특성상 묶음 배송이 많아 객단가도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공장 건설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거의 마무리돼 가고 있습니다. 관리직 사원들은 이미 선발되어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공원들 모집에도 경쟁률이 50:1을 넘어 섰습니다.”
“세계 어디건 청년 실업률이 문제입니다. 그나저나 밤방 씨는 잘 근무하고 있습니까?”
“그럼요. 건설 현장에서 먹고 자며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공장장이 성실하다며 칭찬이 자자합니다.”
“다행이군요.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한 가지 우려할 만한 상황이 있습니다.”
진혁의 눈가가 굳었다.
“뭡니까?”
“현재 동남아 온라인 쇼핑몰 시장은 세계적인 이커머스 강자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만 해도 일본 소프트호크스가 투자한 토코피니아, 화교 자본인 리포그룹의 마타하리넷, 이베이의 블란자몰, 인도네시아의 볼리볼리, 중국의 알리바마 등이 속속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래요?”
“특이하게 한국의 ‘일레븐스’와 ‘큐온’이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큐온이 시장 1위입니다.”
“이유가 뭡니까?”
“IT 강국으로 축적된 노하우가 원인인 것 같습니다만, 정확한 이유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 전무님이 한국에 가서 알아보시겠다고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큰 댐도 조그만 구멍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고 대비하셔야 합니다.”
진혁이 당부했다.
그 후에는 웨스트 자바 베카시 공단의 공장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
공장장의 보고를 받으며 시찰하다가 밤방도 만났다. 피부가 흑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새까매져 있었다. 하마드의 말대로 열심히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따로 아는 체를 하지는 않았다. 특별 대우는 밤방 개인이나 조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 * *
이틀 후, 싱가포르로 건너간 진혁은 베나토른의 알렉스 삼부 회장과 JK모건 싱가포르 지점장인 요한슨을 만났다.
“스미스 지점장님으로부터 제안은 들었습니다만, 우리 쪽에서 검토한 결과 스톡옵션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지금 하시는 일에 더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 다른 약속이 있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삼부 회장이 서둘러 자신의 말만 하고 나갔다.
진혁으로서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요청은 자신들이 먼저 해 놓고는 협상도 하지 않고 서둘러 덮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굳어진 얼굴로 쳐다보는 시선에 요한슨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사회에서 반대했습니다.”
“스톡옵션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지만…….”
“JK모건 쪽에서 먼저 제안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전 정확한 내막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혁의 압박에 요한슨은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진혁이 JK모건과 척이라도 진다면 스미스에게 어떤 말을 들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2대 주주인 싱가포르의 국부 펀드 테마홀딩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알리바마의 입김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쪽에서 오래전부터 자포라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결국 파워 싸움에서 밀렸다는 의미다.
기분이 더러웠다.
요한슨이 말을 이었다.
“삼부 회장님도 이번 결정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물론 우리 JK모건도 그렇고요. 표 대결로 가면 이길 수 있지만 그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화교 전체와 척을 질 수 있는 상황이라서요.”
“어떤 상황이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안타깝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요. 어떻든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의 힘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요한슨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은 엄청 나빴다.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호텔방에 처박혀 술을 진탕 먹었다.
하마드를 불러서 같이 먹고 싶었지만 그는 무슬림이라 술을 먹지 않았다.
유달리 희준의 얼굴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 * *
한국으로 돌아와 출근하자 고용준 부사장부터 줄줄이 업무 보고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동탄과 춘천의 공장은 완공이 되어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TG제약을 제외한 국내 제약 회사로부터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에 대한 물품 공급 의향서를 받았는데 전문 의약품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세계적 제약 회사에 독점 공급권을 주는 바람에 우리와 별도 계약이 어렵다고 합니다.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앞으로 개발되는 신약을 제값 받게 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요.”
진혁의 계획이 성공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같이 횡포에 당하지만 않아도 됐다.
“미국의 양대 드럭 스토어 체인인 월크린과 CSV가 모두 사장님을 뵙기를 희망한다는 연락을 해 왔습니다. 그중에 한 곳을 선정해 미주 시장을 맡기시면 약품과 화장품의 유통망은 완성됩니다.”
“자료를 검토하고 결정하겠습니다.”
모든 보고가 끝나자 진혁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들이 한국의 사업을 이끄는 주역들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집트의 입국 금지 조치가 풀려서 당분간은 중동 사업에 관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한국 사업의 조직을 보다 효율적으로 개편할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조직만 개편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다른 의견이 있으십니까?”
고용준이 잠시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현재 한국 사업의 규모를 감안하면 조직 개편으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례로 품목이 식품, 화장품, 의료기기의 제조와 유통, 거기에 의약품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중동과 동남아의 사업도 신경 써야 하는 상황입니다.”
“듣고 보니 적은 일은 아니네요.”
“그래서 사업을 분리했으면 합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개별 회사로 따로 떼어냈으면 합니다.”
“회사로 만들자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동성F&B는 식품만 남기고, 화장품은 유닉스로 통폐합하고, 의료기기도 별도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유통은 별도 회사를 만들어 맡게 하고, 프랜차이즈 사업도 거기에 포함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이집트에서 갈리가 앞으로 회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했듯이, 한국에서는 고용준이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진혁이 주변을 둘러보고 물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부사장님의 계획이 효율적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같은 직원이지만 하는 업무가 너무 이질적이라 가끔은 할 말이 없을 때도 있거든요.”
“하하하하하. 그래서 신 본부장님이 술 먹자고 해도 매번 약속을 핑계로 거절하신 거군요.”
“그건 아닙니다.”
“농담입니다, 농담.”
다들 같은 의견이라 진혁의 결정은 쉬었다.
“그럼 부사장님 의견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하고,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 보십시오. 혹여라도 일 욕심에 서로 간에 오해가 없도록 신경 쓰십시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모르긴 몰라도 서로 일 떠넘기려고 할 겁니다.”
“맞습니다. 정시에 퇴근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납니다.”
걸어온 길도 다르고 맡은 일도 제각각이었지만 공통분모가 하나 있었다.
서진혁.
그가 이들 모두의 리더였다.
* * *
그날 퇴근하고는 정인영 커플을 만났다.
“동남아시아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으로 선정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마다요.”
“구체적인 계획은 알라마트의 라이꾸두 회장님과 상의하시면 될 겁니다.”
진혁은 라이꾸두 회장의 화교 영향력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혹시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공연하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헉, 거기까지요?”
“요르단 왕실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유통 그룹에서 적극 후원해 주시겠다고 해서요.”
“그럼 당연히 해야죠. 정말 대단하십니다.”
입이 활짝 벌어진 천진홍의 눈에는 존경심마저 깃들어 있었다.
연락처를 알려 주고 시선을 정인영에게 돌렸다.
“할랄 인증은 받으셨습니까?”
“한국할랄인증원이 도와줘서 다행히 마칠 수 있었어요. 요청만 하면 물건을 보내 드릴 수 있어요.”
“유럽과 미주 시장 쪽은 어떻습니까?”
“세코라와 협상하고 있는데 쉽지 않아요. 우리 제품을 완전히 저가 중국산 취급해서 기분 나빴어요.”
“다른 유통망은요?”
“CSV와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 독점 판매권을 요구하고 있어요. 수수료도 비싸고요.”
“월크린을 만나 보세요.”
“월크린을요?”
인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라고 다를 게 없을 것 같아서였다.
“저와 제휴했다고 하면 태도가 달라질 겁니다.”
“그들이 진혁 씨를 알아요?”
“만나자고 연락했으니 알 겁니다. 사무실로 오라고 해서 상담해 봐요.”
“찾아가는 게 아니라 오라고 하라고요?”
“급한 쪽이 달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수수료는 40% 이상은 안 된다고 하시고요. 못 받아들이겠다면 그냥 가라고 하세요.”
인영의 눈이 커졌다.
“정말 그렇게 제안해도 괜찮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