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18화 (118/307)

118화. 사람을 얻다

일반적으로 화장품은 유통업자가 판매가의 50%를 수수료로 가져가는 게 관행이었다.

세계적인 유통 업체라면 더 많은 수수료를 요구하는 게 당연했다. CSV만 해도 65%, 세코라는 75%를 요구했다.

“걱정 말고 나를 믿고 한번 질러 봐요. 지금까지 받은 수모가 확 날아갈 겁니다.”

“알겠어요. 어차피 애초에 계획도 없던 업체이니 그렇게 해 볼게요.”

인영의 대답을 들은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니, 식사도 안 하시고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데이트는 두 분만 합니까? 오늘도 바람맞히면 저 맞아 죽습니다.”

“하하하하하. 서 사장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시군요. 다음에는 꼭 식사 대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약속은 못 드리지만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진혁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인영에게 주도권을 준 것은 현재 자신의 역량으로 미주 시장까지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특히나 주력인 화장품은 무슬림에 특화된 제품이라 판매가 저조할 게 분명했다.

이모네 집에 가자 지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은 그녀가 추진한 태국 관광객 20여 명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 날이었다.

그 준비로 지민이 며칠 전부터 야근을 하느라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기어코 관광지까지 따라가겠다는 바람에 내일부터는 서울에도 없었다.

아쉬운 마음 때문인지 더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 *

진혁은 다음 날 출근해서 선병식 전무와 이야기를 나눴다.

“동남아를 둘러본 소감이 어떠십니까?”

“제가 근무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장이 되었더군요. 성장 속도가 눈에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세상이지요. 그런데 하마드 사장님 이야기로는 한국 업체의 약진에 대해 알아보신다고 했다던데, 그건 어떻게 됐습니까?”

“안 그래도 보고드리려고 했습니다.”

선병식은 이미 조사를 마쳤는지 가져온 서류를 펼쳐 놨다.

“한국 업체가 약진하는 것은 일찍 IT가 발달해 국내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쌓은 다양한 판매 노하우 때문이었습니다. 실례로 결제 시스템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기업들은 카드 결제부터 포인트 서비스 제도까지 운영할 정도로 판매 전략이 다양합니다.”

“그것 때문에 큐온이 카드 결제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싱가포르에서 약진하고 있는 거군요.”

“잘 보셨습니다. 한국만 해도 고객들이 카드 포인트에 민감합니다. 게다가 자포라와는 차별화된 강점도 있습니다.”

“다른 것도 있습니까?”

진혁의 관심이 급상승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자포라 운영을 맡고 있는 만큼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제 방법도 자포라는 ‘캐시온 딜리버리’ 방식을 택한 반면 한국 업체들은 ‘에스크로’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요?”

“결제 시점이 다릅니다. 에스크로는 고객이 물건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 후 대금을 지불합니다. 캐시온 딜리버리는 물건만 받으면 즉시 대금이 결제됩니다. 소비자가 에스크로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라도 에스크로를 택할 것 같았다.

“자포라의 캐시온 딜리버리는 은행 이용률이 낮고 신용카드 결제 시스템이 열악한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초창기 큰 효과를 거뒀겠지만, 최근 반품률이 높아지면서 되레 이익 감소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을 겁니다.”

“상황이 심각할 수 있겠군요.”

“이 밖에도 한국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할인 쿠폰, 장바구니 할인, 공동 구매 할인 서비스 등 다양한 프로모션이 실시하면서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는 게 약진의 비결로 보입니다.”

보고를 마친 선병식을 잠시 바라보던 진혁이 물었다.

“선 전무님이 이커머스 전문가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아니고 후배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뛰어난 후배를 두셨군요.”

“혹시 저녁에 시간이 되십니까? 그 후배가 사장님을 뵙고 싶다고 해서요.”

“시간이 없어도 빼야지요. 당장 약속을 잡아 주십시오.”

진혁이 오히려 부탁하려던 참이었다.

* * *

한상국은 깔끔한 인상이었다.

명함에는 ‘구스닥 기술운영본부장’으로 되어 있었다.

“서진혁입니다. 귀한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회사 근처 일식집에서 선병식과 함께 만났다.

“고등학교 후배로 한영대를 나온 IT 전문가입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제가 들은 보고는 기술 쪽보다는 사업적인 부분이 많았던 것 같은데요.”

“처음 직장 생활은 기술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사업팀 일을 맡으면서 기획, 사업의 일을 익힌 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술직이 사업적인 감각을 익히는 게 쉽지 않은데, 능력이 뛰어나신 모양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맡은 일에 충실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겁니다.”

겸손한 자세도 마음에 들었다.

한상국이 말을 이었다.

“아실지 모르지만, 아이파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정보 통신 회사인 ‘데이컴’의 사내 기업으로 시작했다가 분사해서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했었습니다.”

“그러시군요.”

“아이파크의 사업이 커지자 다시 사내 벤처 기업으로 오픈 마켓인 ‘구스닥’을 만들고 분사시켜 성공도 했고요.”

진혁은 그제야 한상국이 짧은 시간에 자포라의 문제점을 파악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한국 이커머스 시장의 성장과 함께한 인물이었다.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는데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선배님이 회사를 옮기셨다고 해서 조사하다가 ‘알쇼핑’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조사하면서 여러 번 놀랐습니다. 바이럴 마케팅으로 홍보하는 방식이나 ‘몰인몰’ 형태로 기존 시장에 무난하게 진입한 전략에 감탄했습니다.”

“에이, 그렇게 대단한 전략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시장은 보이는데 자금은 없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짜낸 생각이었습니다.”

진혁이 손을 저으며 부인했지만 얼굴에는 뿌듯함이 배어 있었다. 전문가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한상국의 말에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서 정체된 느낌을 받았군요. 애초에 전략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한 본부장, 말이 과했네.”

도를 넘는 발언에 선병식이 주의를 줬다.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직설적인 성격이라서요.”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한상국은 그 정도로 이야기를 멈추려고 했다가 진혁의 거듭된 요청에 말을 이어갔다.

“물론 중동에 이어 동남아까지 성공적으로 진출했으니 규모가 커진 것은 맞지만, 사업이 확대됐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동남아 사업은 중동 사업의 복사판으로, 전혀 새로울 게 없이 그냥 판매 시장만 넓힌 것에 불과합니다. 사장님의 방식으로 사업이 성장하려면 계속 시장을 넓혀 가야 하는데, 그건 많은 시간과 자금이 필요한 일입니다. 결국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음…….”

“개척한 시장에서 최대의 효과를 끌어내려는 노력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게다가 각 지역 간 연대도 거의 없고요. 이렇게 가다가는 결국 세계적인 온라인 강자들에게 먹혀서 사라지게 될 겁니다.”

진혁에게는 전혀 생소한 이야기였다.

그는 시장이 넓히는 게 최상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런데 한상국은 전혀 다른 진단을 내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반발하지 못한 것은 자포라의 일 때문이었다.

알리바마가 자포라를 노리는 것 때문에 자신의 계획이 좌절됐다. 중동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아니, 지금 당장 동남아시아 시장에서의 사업 확장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진혁이 자세를 바로 하며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그럼 어떻게 가야 합니까?”

“오픈 마켓 형태로 사업을 전환하셔야 합니다.”

“오픈 마켓?”

“지금 알쇼핑은 사장님이 확보한 상품만을 파는 온라인 쇼핑몰입니다. 그래서 한계에 부딪히신 겁니다. 다른 기업과 벤더들은 물론 개인 사업자들에게 시장을 개방하셔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

“알쇼핑에 등록된 상품은 겨우 백만 개 수준인 반면 알리바마는 8억 개가 넘습니다. 비교하기조차 민망할 지경입니다. 그 차이가 오픈 마켓에 있습니다.”

맞는 말이었지만 쉬운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알쇼핑을 여기까지 성장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목숨을 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걸 그냥 열어 주자는데 쉽게 동의할 인간은 없었다.

“각각 흩어져 있던 온라인 쇼핑몰을 하나로 모은 건 이베이였습니다. 그 뒤를 아마존이 자체 물류 창고를 운영하면서 추월했습니다. 지금의 알리바마는 그들의 장점만을 받아들여 두 회사 매출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인 것 같지만 결국은 이익이 될 겁니다.”

“확신하십니까?”

“전 기획자이지 사업가는 아닙니다. 다만, 싱가포르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큐온을 이끄시는 분이 ‘구스닥’의 전 사장님입니다.”

“그래요?”

“아이파크는 회사가 어려워지자 ‘구스닥’을 아마존에 팔았습니다. 세계 시장 진출의 꿈이 좌절된 순간이었지요. 전 두려워서 사장님을 따라 나가지 못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한상국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술잔을 비웠다.

진혁이 잔을 채우고 물었다.

“그 꿈을 다시 펼쳐 보시지 않겠습니까?”

“……!”

“모든 지원은 다 해 드리겠습니다. 알쇼핑을 아마존이나 알리바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해 보십시다.”

여기서 망설이면 경영자가 될 자격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커머스 전문가를 미리 확보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한참 생각하던 한상국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뭐든 말씀하십시오. 연봉이든 직위든 원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알쇼핑을 제일 마지막에 팔겠다는 약속이면 됩니다.”

전혀 의외의 말이었다.

데이컴에서 아이파크로, 다시 구스닥으로, 경영자들은 싹수가 보이면 키울 생각보다는 돈을 받고 팔기에 바빴다.

그들의 결정에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옮길 수밖에 없었던 게 한상국에게는 한이 된 모양이었다.

“약속합니다. 이건 한 본부장님이 아닌 저 자신에게 오래 전에 한 약속입니다. 제가 사업하는 한 알쇼핑은 끝까지 놓지 않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을 믿고 제 모든 것을 쏟아붓겠습니다.”

마침내 한상국이 합류를 결정했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알쇼핑에 대한 매력이 가장 컸지만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한생국의 원래 직책은 사업팀장이었다. 하지만 구스닥을 인수한 아마존은 핵심 자리를 자신의 사람으로 채웠다.

자신이 밀려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부하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희망 없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게 느껴지던 참이었다.

* * *

저녁 무렵.

진혁은 상계동의 한 음식점에 앉아서 신문을 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얼마 후, 문이 열리고 그가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왔다. 손민한이었다.

그는 평상복 차림이었는데,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추레해 보였다.

항상 깔끔한 양복 차림의 당당한 모습만 봐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냐?”

“지사장님이 연락을 안 주시니 저라도 찾아뵈어야지요.”

“사람도 참. 그때가 언제 적인데 아직도 지사장이야.”

“제게는 영원한 지사장님이십니다.”

“말이라도 고맙다.”

절반은 진심이었다. 쫓겨나다시피 퇴사하고 밖에 나와 보니 세상인심이 얼마나 각박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처음 한 달은 간간이 안부 전화라도 왔다. 하지만 세 달이 지난 지금은 그마저도 뚝 끊겼다. 가끔 오는 전화라고는 청첩장을 보내기 위한 형식적인 인사뿐이었다.

주문한 찌개와 소주가 나오자 진혁이 잔을 따라 줬다.

그러고는 자신이 찾아온 진짜 목적을 꺼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