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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19화 (119/307)

119화. 알라딘 그룹

“수락산으로 등산을 다니면서 쉬고 있다.”

사실이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원래부터 등산을 좋아한 것도 아니고, 남들 출근할 때 산에 오르니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아 그만두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TV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각각 기숙사에서 지내고 부인은 직장에 다니는데 회식이라도 하며 늦는 날은 세끼를 혼자 챙겨 먹어야 했다.

홀로 식탁에 앉아 직접 차린 밥을 먹을 때는 서러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괜히 늦게까지 일하고 온 부인에게 짜증을 내는 바람에 부부 관계까지 악화됐다.

“계속 쉬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어.”

또 거짓말을 했다.

태후물산 부장 출신이라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대기업은 있는 직원도 내보내는 판이라 채용 계획이 없었고, 중소기업은 경력에 맞는 연봉을 맞춰 줄 수 없는 데다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선입감 때문에 오히려 채용을 기피했다.

오퍼상이라도 차릴까 하고 알아봤는데 모두 극구 말렸다. 세계 경기 하락으로 다들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먼저 나간 김동식이 오퍼상을 차려 잘나간다고 떠들어서 찾아봤더니 말짱 거짓말이었다. 직원도 없이 혼자 사무실을 지키며 점심도 라면으로 때우고 있었다.

진혁은 박이동을 통해 손민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내색을 하진 않았다.

“나오셨으면 전화라도 하지 그러셨습니까?”

“사람이 염치가 있지. 어려울 때 두 번이나 모른 척했는데 어떻게 연락해. 미안해서 못 했어.”

“미안한 마음이 있으시면 저 좀 도와주십시오.”

“……?”

“이번에 동남아까지 사업이 확대되어서 한국에서 무역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직급은 이사로 하고 대우는 태후 못지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찾아보면 나 말고도 더 뛰어난 사람들이 많을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사장님이 맡아 줘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두 번이나 도와달라며 고개를 숙이는 진혁의 모습에 손민한은 눈물이 날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들었다.

한참 만에 감정을 추스른 손민한이 입을 열었다.

“고맙다. 아니, 고맙습니다, 사장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아닙니다. 조직은 위계질서가 명확해야 합니다. 제 존칭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저는 안 갑니다.”

“알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사무실에 첫 출근한 다음부터 받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믿어 주신 만큼 죽을 각오로 보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앉은 손민한이 이후에는 약속대로 이전처럼 하대를 해 줬다.

“자, 한잔 받아라!”

덕분에 진혁도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었다.

* * *

토요일 저녁, 시내의 한 호텔에서 양가의 상견례가 열렸다. 진혁과 지민의 잦은 출장으로 몇 번이나 미뤄졌었다.

딸이 없어 아쉬운 집안과 아들이 없어 허전했던 집안이 만난 자리라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특히나 서로 나이가 비슷해서인지 양가 부모님은 금방 친해졌다.

혹시라도 분위기가 어색하면 어쩌나 잔뜩 긴장했던 진혁과 지민은 허탈했다.

다음 주에 진혁의 부모님이 제주도에 놀러가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할 정도였으니 대성공이었다.

* * *

두바이의 한 호텔의 비지니스 룸에 진혁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집트에서 갈리와 하마드가 왔고 한국에서는 고용준과 선병식이 참석했다.

양쪽에서 회사 분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진혁은 이참에 서로 인사도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방안에 대해 함께 토의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자리를 마련했다.

중심은 알라딘으로 하고, 중동 지역은 AM(Aladin Middle)을 붙여 유통, 화장품, 무역으로, 한국은 AK(Aladin Korea)에 유통, 화장품, 헬스케어로, 아시아는 AA(Aladin Asia)로 하고 일단 유통만 두기로 했다.

동성F&B는 상징성을 고려해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좌중을 둘러보는 진혁의 얼굴에는 흡족함이 가득했다.

인생의 실패자로, 일개 상사원으로 시작한 게 엊그제였다. 그런데 이제 계열사까지 거느리는 자리에 올라와 있었다.

이만하면 성공한 게 아니냐는 자부심이 들기도 했다.

뿌듯함이 가득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갈리가 회의를 시작했다.

“우리 사업의 중심은 알쇼핑입니다. 따라서 알라딘에서 알쇼핑을 운영하면서 지역별 역할을 조율하는 게 적합하다고 사료됩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지역별 유통 회사가 중심이 되어 계열사들을 관리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계열 회사 분리는 계획한 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하고, 알라딘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갈리와 고용준의 생각이 같으니 진혁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간 사장님 이하 모든 임직원들이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사업부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만큼 성장해 온 겁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조직이 체계적이지 못했고, 그걸 개선하고자 오늘 회사 분리를 결정하게 된 겁니다.”

“회사 분리 작업은 그간의 비효율성을 해소하는 것이지, 달리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신 시장 진출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갈리와 하마드가 연이어 입을 열었다. 손발이 맞는 게 오기 전에 이미 이야기를 나눈 듯 했다.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동안 계속해서 새로운 시장에 진출해 왔던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건 엄밀히 말하면 쑤피넷과 자포라가 진출한 시장에 같이 참여한 것이지, 우리가 개척했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독자적으로 시장을 개척하자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알쇼핑은 현재 이집트를 제외하고는 몰인몰 형태로 진출하고 있어 쑤피넷과 자포라가 진출한 곳에서만 영업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사업 진입 초기에는 그들의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밖에 없어서 선택한 일이지만, 이제는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할 상황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뭡니까?”

이번 대답은 갈리가 먼저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사장님이 중동과 동남아시아의 사업을 연달아 성공시키시면서 대형 유통 기업과 업무 협약을 맺은 점입니다. 그들은 쑤피넷과 자포라가 서비스하는 국가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을 커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곳들입니다. 얼마든지 시장을 넓힐 수 있습니다.”

“알쇼핑이 온라인 유통이라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그간 구축한 플랫폼과 다양한 노하우를 이용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시장에 진입할 수 있을 겁니다.”

하마드의 이어진 답변에 진혁이 우려를 나타냈다.

“그렇긴 합니다만 우리의 독자적인 움직임이 쑤피넷과 자포라 측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큰 문제가 될 거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우선 그들이 진출하지 못한 나라를 대상으로 하니 시장이 겹치지 않습니다. 또한 두 회사의 성장은 사장님과 알쇼핑에 기인한 점이 큽니다. 무조건 반대는 못 할 겁니다.”

“음…….”

“그래도 우려가 되신다면 이번 사업에서는 역으로 몰인몰 입점을 제안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이집트에서의 선례가 있으니 꼭 그들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마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선병식이 바로 입을 열었다.

AM 측이 내놓은 예고 없는 카드에 당황했지만 이대로 밀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동남아시아의 온라인 시장에 대한 보고에서도 보셨듯이 지금 세계 이커머스 시장은 치열한 각축장이 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업체가 시장을 독식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결국 업체 간 합종연횡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 이 점은 쑤피넷이나 자포라도 인지하고 있을 테니, 우리의 제안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할 겁니다.”

“한마디 첨언하자면, 우리의 가장 큰 강점은 무슬림에 특화된 제품을 판매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비중이 높은 나라를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용준의 이어진 말에 갈리가 미소를 지었다. AK 측도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애써 준비한 것을 먼저 말씀해 버리시면 김이 빠지잖습니까?”

“먼저 상의 없이 보고하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지요.”

말과는 달리 공용준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그 역시 AM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갈리가 화면에 지도를 띄웠다.

“그림에서 보시듯이 중동 국가들 대부분 무슬림 비중이 높은데, 쑤피넷의 서비스 국가는 겨우 7개국에 불과합니다. 터키와 이란은 이집트와 필적할 만한 인구를 보유한 국가입니다. 나이지리아, 알제리 같은 아프리카에는 아예 진출도 못 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순으로 무슬림 인구가 많은데 자포라는 겨우 인도네시아에만 진출해 있는 상황입니다.”

“……!”

진혁은 지도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서비스하는 국가는 겨우 12개국에 불과했다.

자신이 굴복시켰다고 생각했던 한 메이왕의 리카렁 회장만 해도 두 배가 넘는 국가에 진출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만심에 빠져 있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진혁의 얼굴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에 다들 말을 멈추고 긴장한 채 바라봤다.

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아닙니다. 제가 조그만 성취에 도취되어 그간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 덕분에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 깨달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어떤 상황인지 깨달은 이들이 함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직위에 연연하지 않고 진솔하게 자신의 잘못을 밝히는 진혁의 태도에 존경심이 일었다.

분위기가 정리되자 진혁이 이전과는 달리 긴장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시장이 엄청나게 넓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시장 개척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계획도 생각하셨습니까?”

“이쯤에서 알라딘도 투자를 받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기업 공개를 하자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현재 알라딘은 사장님의 개인 회사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의사 결정에는 효율적일지 모르지만 성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기업과의 연합에도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갈리의 의견에 고용준도 뜻을 같이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있던 한상국과 그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AK에서 상장된 곳이 유닉스밖에 없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기업 공개를 추진해 들어온 투자금으로 서비스 국가를 늘리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일부 증권사에서 동성F&B의 재상장을 추진할 의향이 없냐는 의사를 타진해 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얼마 전에 사우디아라비아 출장길에 스미스 지점장을 만났는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업 공개를 하게 되면 JK모건에게 맡겨 달라며 성공을 확신한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진혁은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원래 그는 가용한 자금 내에서 핵심 국가들에 먼저 진출하고, 차근차근 대상 국가들을 넓히면서 한상국이 준비한 계획에 따라 내실을 기하는 데 치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보다 더 크고 넓게 보고 있었다.

진혁의 눈짓을 받은 한상국이 앞으로 나와 준비한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둘러앉은 사람들의 눈이 화면에 집중되었다.

한상국이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알쇼핑 사업을 맡게 된 한상국입니다. 사장님들이 시장 개척을 생각하실 때 저는 다른 각도에서 알쇼핑을 성장시킬 방안에 대해 고민해 봤습니다. 제가 생각한 방법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그가 화면의 어느 한 곳을 레이저 포인터로 찍었다.

그곳에는 굵은 글씨체로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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