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새로운 출발
“바로 오픈 마켓입니다.”
한상국은 진혁과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알쇼핑이 나아갈 방향에 발표했다.
발표가 이어질수록 사장들의 눈이 커졌다. 이건 자신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이었다.
진혁과 선병식만 사전에 이야기를 들어 담담할 수 있었다.
“알라바바가 알리바마, 타오마오, 토몰로 B2B, C2C, 개인 간 거래를 한다면 우리는 이 모두를 알쇼핑 한 곳에서 하게 됩니다. 좋은 제품만 가지고 있다면 소비자도 판매자가 되고, 나아가 기업 간 거래도 가능하며 수출까지 할 수 있게 됩니다.”
“대단하군요.”
“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알쇼핑에서 물건을 직접 파는 데 주력했다면, 앞으로는 우수 판매자를 유치하고 그들이 편하게 팔 수 있는 시장으로 만드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판매자에 대한 교육과 지원 제도도 운영될 겁니다. 이상입니다.”
짝짝짝짝짝.
박수가 절로 나왔다. 다들 흥분된 얼굴이었다.
진혁이 마무리를 지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저 혼자라면 선택을 고민하겠지만 여러분들이 있기에 전 두 가지 길을 모두 가고자 합니다. 그게 치열한 이커머스 시장에서 알쇼핑이 살고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러앉은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따라서 사장님들은 회사 분리 작업을 진행하시면서 신 시장 개척 방안을 마련해 주십시오. 한 본부장님은 알쇼핑의 개편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만들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기업 공개는 신중하게 생각할 일이니 좀 더 알아보고 고민한 다음에 결정하겠습니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흡족한 표정으로 회의가 마무리됐다.
* * *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두바이몰 내의 한 레스토랑에서 떨어지는 석양을 보며 식사를 하는 것은 색다른 감동을 주었다.
하이다르 회장이 붉게 물든 유리창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진혁을 보고 말했다.
“난 귀한 손님들이 오면 이곳에서 꼭 식사 대접을 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장관이군요. 오늘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선물이 아니라 답례죠. 쑤피넷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서 사장 덕분이지 않소.”
“아닙니다. 그때 회장님이 제 제안을 받아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요. 그럼 답례라고 하지 말고 뇌물로 합시다.”
“뇌물요?”
“하페즈, 그 빌어먹을 놈 때문에 서 사장이 중동을 떠나 동남아시아로 옮겨 가는 바람에 요즘 매출이 정체입니다. 이제 이쪽 사업에도 집중을 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한 뇌물이란 말입니다.”
하이다르의 말은 농담만이 아니었다.
가파르게 상승하던 매출이 진혁이 자리를 비우자 거짓말처럼 완만하게 변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사업하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마켓팅 전략을 세웠는데 쑤피넷에도 적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우리로서는 대환영입니다. 역시 서 사장이 돌아오니 뭔가 일을 하는 것 같군요.”
흡족한 표정을 짓는 하이다르를 보다가 진혁이 본론을 꺼냈다.
“그렇게 하면 매출이 오르기는 하겠지만 결국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합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지만 자금이 상당히 투여되는 일입니다. 현지 유력 인사의 도움이 없다면 배송망을 갖추기도 힘들고요.”
“제가 이번에 동남아시아의 사업을 진행하면서 여러 유통 체인들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중동과 아프리카는 하크마에서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오, 하크마라면 곳곳의 약국에 물품을 공급하고 있으니 걱정은 없겠습니다. 큰일을 해내셨습니다.”
중동과 아프리카는 의료 후진국이라 병원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약국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어 그 수가 엄청났다. 카이로 중심가에는 한 집 건너 약국이 있을 정도였다.
“알쇼핑에서 새로운 나라에 진출하려고 합니다.”
“……!”
하이다르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도 사업가였다. 진혁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금방 짐작했다.
“독자적으로 시장을 개척할 생각이오?”
“이집트의 사례를 따를까 합니다.”
알쇼핑에 쑤피넷이 몰인몰 형태로 입점되는 형태였다.
하이다르는 불쾌했지만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감정보다는 실익을 먼저 따져야 했다.
자신이 거부해도 진혁은 혼자서도 진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선점한 7개국 중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진혁이 배송망을 갖춰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하크마’까지 있다면…….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하하하하. 서 사장의 추진력에 두 손 두발 다 들었습니다. 좋습니다. 쑤피넷에서 몰인몰 형태로 입점하지요.”
“단순한 입점을 원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함께 성장해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같이 갔으면 합니다.”
“설마 합병할 테니 기업을 내놓으라는 말이오?”
하이다르의 말투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적대적 M&A를 생각한다면 그건 무조건 전쟁이었다.
그 모습에 진혁이 손을 저었다.
“제가 그렇게 염치없지는 않습니다. 지분 맞교환 형태로 파트너십을 맺고 싶습니다.”
“……!”
“그렇게 되면 알쇼핑의 성장이 쑤피넷에게도 이득이 될 테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JK모건에 기업 평가를 맡길 작정입니다. 거기에 준해서 일정 부분 지분을 맞교환하는 것으로 했으면 합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진혁이 진두지휘하는 알쇼핑의 성공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쑤피넷에게 지분을 나눠 준다니 무조건 환영이었다.
중간에 어색한 상황이 있었지만 마지막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진혁은 알쇼핑의 시장 확대를 투 트랙으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중동은 쑤피넷의 협력을 받아낼 자신이 있으니 함께 가지만 동남아시아는 아니었다. 자포라와는 따로 가야 했다.
그렇다면 힘들더라도 하나씩 넓혀 가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일단 첫발은 잘 내딛었다.
* * *
사우디아라비아의 젯다로 건너가 스미스 지점장을 만났다.
“사과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요한슨이 일 처리를 그렇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제게 몇 번이나 사과 전화를 했습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큰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도…….”
“다른 일로 보자고 한 겁니다. JK모건에서 알라딘의 기업 평가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마침내 기업 공개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공격적으로 신 시장 개척에 나서기 위해 투자를 받을 생각입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아니, 이미 훨씬 전에 했어야 하는 일입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희가 적극 돕겠습니다.”
스미스 지점장이 반색하며 반겼다.
누구보다 진혁의 능력을 잘 알고 있어 성공은 의심치 않았다. 그의 사업에 끼어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게다가 기업 평가에 투자금 유치까지 대행하면 떨어지는 수수료만도 상당했다.
진혁은 갈리와 고용준과 구체적인 일정을 상의하라고 했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한국의 일이 바빠서 바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하루 쉬었다 가시지요.”
“무슨 일 있습니까?”
“귀한 분을 만나기로 했는데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기업 공개를 결정하셨다면 꼭 만나 보셔야 할 분이십니다. 아메만 사장님도 함께 만납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스미스와 헤어진 진혁은 호텔에서 쉬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약속 장소로 갔다.
호텔의 식당으로 가자 스미스와 아메만이 먼저 와 있었는데 낯선 사람과 함께였다. 단정하게 정리된 콧수염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검은 머리 짐’을 이렇게 보는군요. 칼라드요.”
“서진혁입니다. ‘사막의 조지 소로스’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자님.”
진혁이 정중히 인사를 했다.
칼라드 빈 압둘라즈 알자우드라는 긴 이름을 가진 사내는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드 왕가의 일원으로 기업가이자 투자자였다.
파벌 싸움에 밀려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5만 달러로 투자를 시작해 현재 250억 달러의 자산을 가진, 세계에서 17번째 대부호였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거물이었다.
“한국은 IMF를 겪을 때 나도 투자를 해서 친숙한 나라입니다. 높은 교육열과 ‘금 모으기 운동’을 하는 국민들의 모습에 이 나라는 반드시 위기를 극복할 거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때는 제가 어려서 알지 못했는데, 도움을 주셨다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 감사드립니다.”
진혁이 감사의 말을 했지만 표정은 좋지 못했다.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몰랐다.
이후 칼라드는 이런저런 투자 성공담을 이야기했는데 아메만과 스미스는 한마디도 놓칠세라 집중했다.
하지만 진혁은 아니었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색을 느꼈는지 칼라드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내가 ‘검은 머리 짐’ 앞에서 추태를 부린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각자의 투자 방식이 있으니까요.”
이후 칼라드는 진혁에게 세계 경기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지만 최대한 언급을 자제했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칼라드가 입맛을 다셨다.
“조금만 일찍 인연을 맺었다면 나도 여기 두 사람처럼 일본 주식에 투자했을 텐데 아쉽네요.”
“실제 투자를 권유한 저도 중도에 하차했습니다. 인연 따라 가는 거겠지요.”
“이번에 기업 공개를 추진하신다고 들었는데,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자금은 얼마든지 지원하겠습니다.”
“아직 확정된 게 아니라서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혁이 이번에도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칼라드의 전략은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적대적 인수 합병(M&A)을 단행하고, 과감한 구조 조정과 유망 산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이었다.
위기에 처해 주가가 곤두박질한 기업들의 주식을 싸게 매입해 주가가 상승하면 팔아 이득을 취했다. 진혁이 추구하는 ‘상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다를 뿐이라 관심이 없었다.
“사업 때문에 투자를 쉬신다며 두 사람 모두 아쉬워하고 있더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투자로 이익을 얻는 게 사업으로 버는 것보다 훨씬 크고 빠릅니다.”
“알고 있습니다만 전 투자자보다 사업가로 불리고 싶을 뿐입니다.”
“아쉽군요. 투자에 관심이 있다면 함께 큰일을 도모해 보고 싶었는데.”
“높이 평가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결국 진혁에게 흥미를 잃은 칼라드가 다시 아메만과 스미스와 대화를 나눴다.
얼마간 앉아 있던 진혁은 피곤하다며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났다. 눈치 빠른 아메만이 따라 나와 다음에는 따로 만나자며 미안함을 전했다.
칼라드와의 만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투자를 통한 자금 확보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 * *
한국으로 돌아가자 한상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넘어와 있었다.
“직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떠난 직원들 일부는 이미 합류했고 나머지도 정리되는 대로 오기로 했습니다. 구스닥에 남아 있던 직원들은 한꺼번에 빠지면 그쪽 일에 문제가 있고, 이쪽에서도 당장 사업을 시작할 건 아니기에 연말까지 순차적으로 넘어오기로 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꼭 한국에서 알쇼핑을 시작하셔야겠습니까?”
“그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한국은 IT 최강국입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신기술을 제일 먼저 선보이는 곳입니다. 한국에서 버텨내지 못하면 세계에서 성공하지 못합니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께 전권을 드리기로 했으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시장은 이곳만 있는 것이 아니니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꼭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한상국이 굳은 의지를 보이고 물러나자 박이동이 들어왔다.
왠지 들뜬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