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새살림 꾸미기
“강남에 마침 좋은 건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요? 어디입니까?”
“역삼역에 바로 붙어 있어 입지가 아주 좋습니다. 지하 4층, 지상 15층짜리 건물입니다.”
“그 정도면 꽤 비싸겠는데요?”
진혁이 우려를 나타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박이동에게 알쇼핑이 사용할 건물을 IT 기업이 몰려 있는 강남 지역에서 알아보라고 했었다.
“525억이란 싼 가격에 나온 겁니다. 공시 지가만도 285억이 넘는 금싸라기 빌딩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만큼 자금을 투입할 여력이 안 됩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당장은 계약금 10%만 있으면 매입할 수 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그럼요. 매각가는 525억이지만 건물주가 사용하는 두 개 층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임대되어 있는데 보증금만 15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공시 지가가 그러니 은행에서 300억을 빌리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게다가 이게 운 좋게도 계약이 파기될 상황이라고 합니다.”
박이동이 들려주는 사정을 들은 진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건물주는 벤처 붐이 한창 불 때 테헤란로에 비슷한 빌딩 네 개를 무리해서 사들였는데, 거품이 꺼지자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결국 차례로 팔고 마지막으로 이 빌딩을 내놓아서 한 부동산 투자 회사와 매매 계약을 체결했는데 상대방이 잔금을 입금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욕심이 화를 두 번이나 불렀다.
“계약하고 건물주가 엄청 후회했다고 합니다. 50억이 넘는 계약금을 받아 챙겼으니 한동안은 내놓지 않을 거고, 다시 나와도 이보다는 더 높게 부를 게 틀림없습니다. 부동산 투자 회사는 50억을 날릴 판이니 10억만 줘도 감지덕지하고 건물을 넘겨줄 겁니다.”
“그런 호조건인데 왜 잔금을 구하지 못한 겁니까?”
“사장님은 외국에 나가셔서 모르지만 한국 기업들은 지금 죽을 맛입니다. 세계 경기 하락에 엔저, 고유가까지 삼각파도에 휩쓸려 빈사상태입니다. 있는 자산도 매각해야 판인데 부동산에 투자할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꼼꼼히 다시 한번 체크하시고 문제없으면 계약을 진행하세요.”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자신에게 맞는 일을 맡아서인지 박이동이 신이 난 표정으로 나갔다.
이어 고용준에게 한국 사업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회사 분리 계획에 맞춰 고용준이 AK유통을 맡아 한국 사업을 총괄하게 되어, 전체 사업에 대한 보고는 그를 통해 듣기로 했다.
선병식은 AA유통을 맡아 인도네시아에서 하마드에게 인수인계를 받고 있었고, 선병식이 맡았던 무역 파트는 손민한이 담당하고 있었다.
* * *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역삼동의 빌딩을 매입해 알쇼핑이 본격적인 사업을 준비했고, JK모건의 그룹 실사가 한국과 이집트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회사 분리에 따른 각종 인허가 서류를 준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유닉스는 상장 회사라 건별로 증권 거래소를 통해 공시까지 해야 했다.
자포라 사업도 소홀히 할 수 없어 인도네시아도 다녀와야 했다.
각자 바쁘니 지민과는 주말이 돼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서울의 대형 호텔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신랑 서진혁, 신부 김지민. 두 사람이 마침내 부부가 되는 날이었다.
최대한 조용하게 치르고 싶어 가까운 사람만 초대했는데도 빈자리가 없어 서 있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렇게 말렸는데도 이집트에서 갈리 사장과 카심이 대표로 축하해 주러 왔고, 요르단 왕실에서도 화환을 보내왔다.
JK모건을 대표해서 스미스 지점장도 와서 아우다 그룹 이름으로 축의금까지 전달했다.
한지철이 멋진 한 쌍의 커플을 안내하고 나타났는데, 정인영과 천진홍이었다.
“이렇게 찾아 주시고 감사합니다.”
“당연히 축하하러 와야지요. 덕분에 동남아, 중동 5개국 투어는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열기가 대단해서 조만간 다시 열기로 했습니다.”
“저도 축하드려요. 덕분에 계약이 잘 끝났어요.”
태후 화장품이 미국과 유럽의 유통 사업자로 월크린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기사가 나오자 주가가 급등했던 게 지난 달 말이었다.
물론 진혁과의 계약 내용은 옵션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비공개로 했다.
진혁이 화제를 돌리려 일부러 농담을 했다.
“이렇게 예쁘게 하고 오는 건 민폐인 거 아시죠?”
“치. 신부는 더 예쁠 텐데요, 뭘. 그나저나 아버지께서 한번 뵙자고 하세요.”
진혁이 답을 하기 전에 뒤가 시끄러웠다. 커다란 화환이 들어오고 있는데 봉황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청와대에서 보내온 거다.
그 뒤로 낯익은 얼굴이 걸어왔는데 이현국 비서실장이었고, 그 옆에 김상균이 따라오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진혁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것 같아서 연락을 안 드린 건데. 아무튼 감사합니다.”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께서도 서운해하고 계셔요.”
“그냥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서 죽어라 일만 하고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 감사하다는 말씀도 함께요.”
“사람 참.”
진혁의 한결 같은 태도에 이현국이 고개를 저으며 식장으로 들어갔다.
김상균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달은 경조사비가 너무 많이 나가서 한동안은 걸어 다녀야겠습니다.”
“걷는 것만큼 운동에 좋은 게 없답니다. 이왕 넣으실 거면 많이 넣어 주십시오.”
“내가 말을 말아야지.”
김상균이 졌다는 표정으로 축의금을 냈는데 한 곳만이 아니었다.
신부 측에도 내더니 가족과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아는 한 상균과 지민이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멈춰야 했다.
TG그룹의 소명준, 박진욱 사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새해가 밝아오자 알라딘 그룹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사업별로 계열사 체제로 전환됐고, 알쇼핑 코리아도 정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JK모건의 주관하에 투자 설명회도 개최하고 정식으로 투자금을 받았다.
이전과 달리 진혁은 언론의 인터뷰를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응하며 투자 유치와 알쇼핑 홍보에 앞장섰다.
한국의 가장 촉망받는 사업가라는 극찬도 들었다.
진혁이 공식적으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중소기업청이었다.
김형영 중소기업청장은 호인이었다.
“요즘 가장 핫한 사업가께서 이렇게 직접 방문해 주시고, 영광입니다.”
“오히려 일개 사업가의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덕담을 나누고 진혁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요즘 중소기업들이 많이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
“말도 마십시오. 하루에 쓰러지는 중소기업이 부지기수입니다.”
“현재 대내외 여건상 국내에서는 답이 없는 실정입니다. 결국 살길은 수출뿐입니다.”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다들 영세하다 보니 수출 판로를 개척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알쇼핑은 오픈 마켓으로 국내보다는 해외 시장, 정확히 말씀드리면 무슬림 시장을 염두에 두고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 한류 열풍이 불고 있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중동과 동남아에서도 한국 제품에 대한 호감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지역에 물건을 팔려면 할랄 인증인가 하는 아주 까다로운 검사를 거쳐야 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던데요?”
“과거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한국에도 할랄인증원이 생겨서 비용과 시간이 많이 줄었습니다. 할랄 인증에 따른 절차는 저희에게 전화 주시면 상세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비용이 부담스럽다면 저희 쪽에서 미리 납부하고 나중에 물건이 팔리면 받는 제도도 있습니다.”
진혁은 이미 언론에 보도된 내용인데도 모르는 것이 답답했지만 꾹 참고 최대한 자세히 알려줬다.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회원사에게 안내 공문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였다.
그곳은 이미 알쇼핑의 다양한 정책들을 알고 있다고 오히려 고마워하며 적극 홍보해 주겠다고 했다.
온라인 홍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 * *
며칠 후, 진혁은 태후빌딩을 찾아갔다.
사장실로 들어가자 정진호, 정호영 부자와 부사장이 된 김선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바쁠 텐데 이렇게 시간 내 줘서 고맙네.”
“그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귀한 시간 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진호와 김선혁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하지만 정호영에게는 눈인사로 끝냈다.
두 사람의 악연을 알기에 아무도 뭐라 하지 못했다.
자리에 앉자 정진호가 말했다.
“사업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인영이 부부 일을 도와줘서 고맙네.”
“제 사업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 거든 것뿐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건 자네 입장이고, 두 아이의 생각은 다른 것 같더군.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계속 말을 받아 주면 어색한 시간만 길어질 것 같아서 진혁이 사업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제가 오늘 찾아온 것은 협조를 부탁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그룹에 비해 알쇼핑에 태후 제품의 입점률이 저조합니다. 각 대리점의 권한이라 강제하지는 못하더라도 홍보를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그쪽 시장은 TG그룹의 제품들이 선점하는 바람에 아무래도 좀 꺼리는 것 같네.”
김선혁의 말에 진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의 제안을 무시한 건 태후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태후의 제품을 팔고 있을 것이다.
그 배후에 정호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제 와서 그 일을 꺼내봐야 자신만 쪼잔해 보일 뿐이다.
“TG그룹이 선점한 제품이라고 해 봤자 TV, 냉장고, 에어컨 정도입니다. 태후는 그보다 더 나은 제품을 만들 기술력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태후의 스마트폰은 세계인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제품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제품도 팔아 주겠다는 것인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소비자가 원한다면 그 이상의 것이라도 파는 게 우리 상사원의 역할이라고 부사장님께 배웠습니다. 물건만 공급해 주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팔겠습니다.”
“……!”
“아울러 투자 의향서를 제출한 곳에 태후 이름만 빠져 있더군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네만…….”
“그렇다면 적극적인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알쇼핑 코리아를 발족한 건 국내 시장을 염두에 둬서가 아닙니다. 한국 우수 제품을 발굴하고 이를 해외에 적극 홍보하기 위한 전초 기지입니다. 태후도 함께해 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정진호의 말을 자른 건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정호영의 인상이 굳어졌지만 당사자인 정진호는 아니었다.
“정말 우리 그룹을 받아 주겠다는 건가?”
“전부를 다 수용해 드리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최대한 많은 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제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제품의 우수성을 입증하려고 벌인 일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진혁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태후가 왜 소극적인 줄은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과거의 악연으로 배제할 것이라 생각해 미리 포기한 것이다.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고맙네.”
“회장님이 믿어 주신 은혜는 매출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이런저런 덕담을 나누다가 진혁이 일어나려고 하자 정진호가 물었다.
“자네가 중동에 지인이 많다고 하는데, 이라크에도 아는 사람이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쪽과는 거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진혁이 한마디로 잘랐다. 묻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 정치권은 엄청 시끄러웠다.
지난 정권에서 벌인 4대강 사업과 자원 개발에 대한 국정 감사까지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정호영이 한국가스공사와 투자한 이라크 북부 두 곳의 가스전도 도마에 올라 있었다.
이라크는 지금 거의 반정부 상태로, 북부는 이슬람 무장 단체가 장악하고 있었다.
가스전 개발이 중단된 것은 당연했고 그게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호영의 코가 쑥 빠져 있는 건 당연했다.
진혁이 인사를 하고 나오자, 김선혁이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다.
“이렇게 찾아와 먼저 풀어 줘서 고맙다.”
“사업은 정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말도 부사장님에게 배운 겁니다. 항상 가슴에 새기고 다니는 말 중에 하나입니다.”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 고맙다. 손 부장을 거둬 준 것도 고맙고.”
“제게 꼭 필요한 사람이어서 모신 겁니다.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고 계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언제 시간 나면 다 함께 보자. 나이를 먹는지 자꾸 뒤를 보게 된다.”
“강녕하십시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진혁이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 * *
퇴근한 진혁은 서둘러 왕십리 집으로 향했다.
회사에서 가까워 정했지만 전세였다.
새로 구입한 강남의 빌딩으로 순차적으로 이전할 계획이라 조만간 집도 그쪽으로 옮겨야 할 것 같아 구입을 미뤘다.
오늘은 진혁이 식사 당번이어서 마트에 들러 간단한 반찬거리를 사서 들어갔는데 뜻밖의 사람이 맞아주었다.
“일찍 들어오네?”
“헛! 장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