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지도에서 길 찾기
“지민이는 대체 뭐 하고 자네가 먼저 오는가?”
“그게…… 회사에 일이 남아서 좀 늦는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신혼을 즐길 여유도 없을 만큼 바빴다. 관광 홍보가 제대로 먹혔는지 동남아 관광객들이 한국을 찾고 있었다.
욕심을 부려 직접 모집까지 하는 바람에 지민의 일은 끝도 없었다.
지현은 신혼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노량진 학원가에 따로 방을 얻어 나갔다.
어색한 표정의 진혁이 얼른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투를 뒤로 숨겼지만 눈치 빠른 장모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쯔쯧. 남편부터 챙겨야지. 사돈 뵐 면목이 없네.”
“아닙니다. 제 일 때문에 바쁜 건데요. 금방 옷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일 없으니 씻고 나오게. 밥 차릴 테니.”
진혁은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팍 숙이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얼른 지민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빨리 오라고.
다행히 허겁지겁 퇴근한 지민이 저녁을 먹기 전에 도착해 얹힐 일은 없었다. 물론 지민은 엄청난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진혁은 오랜만에 편하게 침대에 누워 여유를 부렸다.
장모님 덕분에 식사 준비와 설거지에서 해방된 바람에 누리는 호사였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지민이 방으로 들어온 건 12시가 다 되어서였다.
“안 피곤해요?”
“오늘 당번을 개운하게 해결했더니 이상하게 덜 피곤하네.”
“좋아하지 마요, 내일로 미룬 것뿐이니까.”
“아니,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지금 엄청난 잔소리를 듣고 온 나한테 따지는 거예요?”
도끼눈이 된 지민을 보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알았어. 내일은 내가 준비할게요. 그럼 날짜가 바뀌는 건가?”
“아니요. 모레가 홀수 날이니 당신이 당번이죠.”
“헐.”
두 사람은 결혼하기 전에 날짜를 정해 식사 준비를 하기로 약속했었다.
결국 장모님이 오셔서 득을 본 건 진혁이 아니라 지민이었다.
지민이 옆에 눕자 말했다.
“일이 너무 많으면 신 사장님에게 직원을 더 채용해 달라고 요청해요.”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렸어요. 조만간 보고가 올라갈 텐데, 그것보다 할랄 식당이 너무 부족해요. 식당을 중심으로 움직이다 보니 제대로 된 관광 안내가 어려워요.”
그것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았다.
할랄 식당은 단순히 식사 장소의 의미만은 아니었다. 기도실을 갖추고 있어 무슬림 관광객들에게는 꼭 필요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관광 도시를 표방하는 제주도에서조차 기도실이 한 곳도 없을 정도로 그들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게다가 단체 관광객들이 예약된 날은 한국인 손님을 받을 수 없으니 그것도 문제였다.
“관광객들 덕분에 가맹점들의 수익이 흑자로 돌아섰으니 2차 가맹점 모집을 해야겠어요. 투자금도 충분히 들어왔고요.”
JK모건의 투자 유치는 성공적이었다. 각 계열사별로 자금이 넉넉히 쌓여 있었다.
지민이 말했다.
“가맹점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관광하다가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라 도시락으로 대체하고는 있는데, 날이 더워지면 음식이 상하기 쉬워 그것도 불안해요.”
“지금 당장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차근차근 고민해 봅시다. 그보다 못 한 숙제는 해야지요.”
“……?”
“장모님도 은근히 손주를 바라시는 것 같은데.”
“어머, 이이가 미쳤나 봐. 엄마도 와 있는데.”
“방음 잘되어 있으니 걱정 마요.”
“안 되는데…….”
지민은 말과 달리 밀어내지 않았다.
* * *
진혁은 회사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큰 지도 앞에 서 있었다.
두바이에서 갈리가 보고했던 세계에 분포된 무슬림 지도였다. 돌아온 즉시 크게 출력해 붙여 놓았다.
한국 사업이 안정을 찾아가자 그동안 애써 누르고 있었던 상사원의 피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상국의 오픈 마켓 전환 전략은 적중했다.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까지 속속 제품을 등록했다.
마땅한 노후 대책을 찾지 못하던 은퇴자, 가정주부, 취업에 실패한 청년들이 ‘당신도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카피 문구에 이끌려 쉼 없이 찾아왔다.
각 계열사도 사장들의 지휘 아래 충분하게 비축된 자금을 기반으로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가 됐다.
한국을 떠난 진혁의 첫 방문지는 두바이였다.
AM 본부도 계획대로 두바이로 넘어와 있었다.
이집트에는 AM무역만 남아 핫산과 카심이 공장과 함께 관리하고 있었다.
이제는 부회장이 된 갈리가 AM을 총괄하고 AM유통 사장인 하마드가 알쇼핑을 키우고 있었다.
아자데도 남편과 함께 두바이로 와서 알라딘 그룹 화장품 사업 전반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미스터 한이 물건이었습니다. 알쇼핑의 매출 기록이 계속 갱신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조사들이 먼저 찾아와서 입점을 부탁할 정도입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해 주신 덕분에 좋은 분이 알아본 겁니다.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한상국을 영입한 것은 자신이지만, 진혁은 그게 혼자 이룬 게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이 함께하며 버텨 주었기에 그런 인재도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겸손함에 다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레바논과 나이지리아에 알쇼핑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두바이에서 시작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도요?”
“하이다르 회장님이 도움을 주셔서 빨리 진행할 수 있게 됐습니다.”
“고마운 분입니다.”
말과는 달리 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쑤피넷은 더 이상 투자 여력이 없었다. JK모건의 기업 실사 결과 알쇼핑의 가치가 더 높았다. 현재 가치보다 미래 성장 가능성에서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진혁은 조건 없이 10%의 주식을 맞교환하자고 해서 하이다르의 체면을 세워 줬다.
그에 따른 보상으로 두바이를 넘겨준 거다.
아자데가 입을 열었다.
“화장품 공장의 생산 능력이 한계에 달하고 있어요. 증설이 필요해요.”
“통조림 가공 공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리카 지역까지 진출해서 추가 증설이 필요합니다.”
하마드도 거들었다.
현재 중동 국가들은 넘쳐나는 오일 머니를 주체 못할 정도로 돈이 넘쳐나고 있었다.
100달러가 넘는 고유가가 수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사막의 낙타도 백 달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서민들의 구매력이 커지니 저질의 중국산이 밀려나고 중가의 한국 제품이 팔려 나가면서 알쇼핑의 매출이 오르는 중이었다.
TG전자에서 내놓은 ‘금장 PDP TV’는 만 달러가 넘는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압둘라 TV’라는 애칭까지 붙어 왕족이나 귀족들이 스스럼없이 사 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먼저 공장 증설 이야기를 꺼냈을 진혁이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집트 공장 증설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그쪽 정치 상황은 어떻습니까?”
“압델이 국방장관을 사임하고 선거에 나왔는데, 대통령 당선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다행인 것은 셰리피 소장님께서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겁니다.”
“최악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도 없습니다. 조금 힘들겠지만 3교대를 해서라도 생산량을 맞추면서 사태 추이를 지켜본 다음에 결정하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이후 계열사별로 실적 보고를 받았는데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회사를 분리하고 이전까지 하느라 정신없으셨을 텐데도 다들 맡은 바 업무를 소홀히 하지 않은 덕분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한 것은 맞지만 고유가에 따른 반사 이익의 영향이 큽니다.”
갈리가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분위기가 머쓱해졌다.
진혁이 얼른 진화에 나섰다.
“어떻든 뛰어난 실적을 올렸으니 직원들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포상 계획을 세워 보십시오.”
“고마워요. 다들 좋아할 거예요.”
“포상은 신중히 생각했으면 합니다. 고유가로 미국이 세일 가스 개발에 나선다고 합니다. 지금의 호황이 오래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OPEC이 가만두고 보겠어요?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감산을 해서 유가 하락은 막을 거예요. 부회장님은 너무 걱정이 많으신 것 같아요.”
아자데가 대놓고 불편함을 드러냈다.
부부 직원이라 상여금이 지급되면 상당한 액수였다.
‘아!’
진혁의 뇌가 갑자기 빨라졌다.
미국. 세일 가스. OPEC. 감산…….
갈리의 말이 맞다.
곧 유가는 하락하고 저유가 시대가 도래한다. 그렇다면 또다시 투자의 기회가 생긴다.
진혁이 갈리에게 물었다.
“단기 자금을 운영할 투자처는 찾으셨습니까?”
“아직 못 찾았습니다. 자금의 규모도 불명확하고, 사업 초기라며 선뜻 나서는 곳이 없습니다.”
알쇼핑의 결제 방식은 현재 에스크로 서비스로 전환되어 있었다.
이는 소비자가 최종 물품 확인 시까지 보관했다가 판매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인데, 그 기간이 최장 15일이었다.
그 자금의 운영을 믿고 맡길 수 있는 투자 회사를 찾으라고 지시했었다.
두바이는 세계 금융의 허브로 모든 투자 회사가 들어와 있었다.
진혁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잘됐군요. 투자 전문가를 영입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겠습니다.”
“우리가 직접 운영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알라딘 홀딩스를 설립하는 안을 세워 주세요.”
진혁은 이번 기회에 칼라드 왕자와의 만남에서 얻은 교훈대로 투자를 실천할 생각이었다.
그때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자데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진혁이 말했다.
“알라딘은 한 가족입니다. 그건 희로애락을 같이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일어날 일은 그때 또 같이 헤쳐 나가기로 하고, 일단 기쁨을 나눕시다. 성과급 지급을 진행하세요.”
아자데가 바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진혁이 기억하는 오너는 거짓말쟁이였다.
그들은 호황 때는 불황에 대비해야 한다며 이득을 나눠 주지 않았다. 그러다 불황이 닥치면 또 어렵다며 더 쥐어짰다.
자신은 그런 오너로 기억되기 싫었다.
“그럼 이쯤해서 끝내고 내일 떠나야 하니 오늘 저녁은 같이 식사를 합시다.”
“인도네시아로 바로 가십니까?”
“요르단에 들렀다 갈 작정입니다. 지난번 일에 대한 감사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감사는 오히려 저희가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말하는 갈리의 눈에는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지난 번 기업 공개 때 요르단 왕실에서 가장 먼저 알라딘에 1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연락을 주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계열사들의 기업 공개가 성공적이어서 알라딘은 투자금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른 투자자들로부터 받은 제안은 모두 거절했지만 요르단 왕실은 인연이 깊어 그러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5%의 지분을 양도했다.
사정이 그러니 갈리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어떻든 믿고 결정해 주신 그 마음은 고마운 거고, 개인적으로 부탁한 K-POP 공연도 도와주셨으니 인사는 드려야지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마르와도 데려가세요. 가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그렇게 하죠. 왕비님과 공주님도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으니.”
마르와도 아자데를 따라 두바이로 건너와 있었다.
“참, 그리고 카심 씨가 전화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안부 전화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오라고 할 수도 없고…….”
카심을 떠올리자 입 안이 썼다. 주변 사람 모두가 소중하지만 카심은 다른 의미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두바이로 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가족들을 끔찍이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알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다시 한번 압델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 * *
다음 날 공항에서 만난 마르와는 몰라보게 예뻐져 있었다.
물론 예전에도 예뻤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두바이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경험해서인지 세련미까지 더해져서 흠잡을 곳이 없었다.
“너 많이 예뻐졌다?”
“원래 예뻤거든요?”
“자식이. 옷차림도 세련됐고…….”
“제가 원래 한 몸매 하잖아요.”
“놀고 있네.”
“치. 수잔나 마리아 씨 작품이에요. 라이나 왕비님 전속 디자이너신데 나한테 모델 할 생각 없냐는 제안까지 하셨단 말이에요.”
“꿈 깨라, 모델은 무슨.”
“흥이네요. 가요.”
말과는 달리 팔짱까지 끼어 오는 마르와의 거침없는 행동에 주변 남성들에게서 질투의 화살이 날아왔다.
요르단 왕실에 도착하자 또 다른 미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나 왕비의 미모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림 공주 또한 어느새 사춘기 티를 벗고 숙녀가 되어 있었다.
디나 공주도 더 이상 애가 아니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고 마르와와 두 공주가 올라가자 진혁은 라이나 왕비와 차를 마셨다.
“지난번 도움은 감사했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국왕께서도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를 줘서 고맙고, 국민들이 즐거워해서 기뻤다는 말씀까지 하셨어요.”
“요르단 국민들은 행운아입니다.”
진혁은 최대한 짧게 샤리프 국왕에 대한 마음을 전했다.
아부가 판치는 세상이라 길어지면 오히려 그 느낌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라이나 왕비는 미소를 지어 답하고 담담하게 물었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
진혁이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한 가지 드릴 제안이 있어서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