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인도로 가다
“또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 떠오른 건가요?”
“이번은 사업이 아니라 기부 이야기입니다.”
“기부요?”
“그렇습니다. 왕비님을 보면서 느낀 게 많았고, 그 뒤로 세계 여기저기를 다녀보니 참 어려운 분들이 많더군요.”
“맞아요. 지금도 1달러가 없어서 어느 곳에서는 굶어 죽는 아이가 생겨나고 있을 거예요.”
라이나 왕비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모습에 진혁은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처한 상황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단기 자금을 운영하기 위해 투자 회사를 차려 거기서 나온 수익으로 기부하시겠다는 말씀이네요.”
“그건 아닙니다. 그 돈은 회사 자금이니 제가 함부로 할 수는 없지요. 당연히 전문가에게 맡길 겁니다. 그와는 상관없이 제 개인 자금을 따로 운영할 생각인데, 왕비님도 함께 해 보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투자 수익으로 기부를 한다? 재미있겠어요. ‘검은 머리 짐’의 능력을 한번 봐 보죠. 저도 참여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실망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알라딘 홀딩스의 첫 번째 기부 펀드가 만들어졌다. 운영 자금은 각 백만 달러씩 내놓기로 해서 2백만 달러가 종자돈이었다.
* * *
다음 날 진혁은 혼자 자카르타로 떠났다. 마르와는 며칠 더 쉬었다가 두바이로 돌아가기로 했다.
공항에 내리자 AA유통 사장이 된 선병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픈 마켓으로 전환 후 매출이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벤더들이 꾸준히 가입해 상품을 올리고 있어 우리가 맡은 지역에서는 자포라를 추월한 상태입니다.”
차 안에서 선병식이 업무 보고를 했다.
“고추볶음면의 판매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마야 씨의 소개로 ‘라면의 신’이라 불리는 미국 라면 블로거 ‘한크 리오쉬’가 고추볶음면에 대한 특집 글과 영상을 게재하자 이곳은 물론 전 세계 라면 마니아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대한푸드의 주가가 며칠째 계속 오르기만 하고 있습니다.”
“다른 라면 업체들은 입점했습니까?”
“할랄 인증을 받자마자 바로 올라왔습니다. 다양한 한국 라면들이 이곳 현지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다른 일들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에스크로 전환은 끝났고, 다양한 할인 프로모션과 포인트 제도에 대한 회원들의 반응도 뜨겁습니다.”
한상국의 전략에 따라 할인 쿠폰, 장바구니 할인, 공동 구매 할인 서비스 등 다양한 프로모션이 실시되고 있었다.
또한 적립된 쿠폰은 회원 간 선물이 가능하고 제휴를 맺은 거래처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다.
알쇼핑에서 물건을 구입해 받은 포인트로 ‘알라마트’에서 상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됐다.
“라이꾸두 회장님께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겠군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마야 씨의 설득으로 알라마트가 앞장서서 참여하는 바람에 다른 협력 업체는 수월했습니다.”
“마야가 열심히 하는 모양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도 있지만 사업적인 감각이 남다릅니다. 오픈 마켓으로 전환되자 알라마트의 물건을 입점시켜 꽤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곳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 알쇼핑에서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따라 일부 슈퍼 블로거들이 판매자로 활동하고 있고요. 볼수록 탐나는 인재입니다.”
수많은 현장을 누빈 선병식의 눈에 들었다면 빈말은 아닐 터였다.
“그리고 인니푸드의 안톤 사장님께서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인니마렛도 벤더로 참여하면서 협력 업체로 지정해 달라는 부탁을 할 것 같습니다.”
라이꾸두 회장과 달리 안톤 사장은 알쇼핑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결과 인니마렛은 매장 수는 물론 매출에서도 알라마트에 크게 밀리고 있었다.
“전 바빠서 시간이 안 됩니다. 선 사장님이 만나 보세요.”
“그렇지요. 쿤초로 회장님이라면 모르지만 어디 건방지게…….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선병식의 어깨가 딱 펴졌다.
조직은 나이를 떠나서 위계질서가 명확해야 했다.
회장이 저쪽 사장을 만나면 이쪽 사장은 그 밑인 부장을 상대해야 하는 건 당연했다.
회사에 들려 매출 보고를 받고 공장까지 둘러보고 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에 비해 선병식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니긴요. 말씀해 보세요.”
“좀 답답합니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시장인데 화교의 농간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선병식의 하소연이 진혁이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뜨거운 상사원의 피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가 온 것 아닙니까? 우리 상사원이 언제 포기한 적 있습니까? 길이 없으면 터널이라도 뚫어야지요.”
“무슨 대책이 있으신 겁니까?”
“내일부터 며칠 출장을 가야 하니 준비하십시오. 전 약속 시간이 되어서 이만.”
“아니, 회장님!”
선병식이 급히 불렀지만 진혁은 부리나케 나가 버렸다.
궁금증만 잔뜩 불러 일으켜 놓고 얌체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에 선병식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부하 직원이었다면, 그냥 확……!
* * *
다음 날, 진혁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았다.
라이꾸두 회장과 마야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알라마트의 매출 신장에 라이꾸두 회장은 기분이 좋았고, 진혁의 칭찬을 받은 마야도 기분이 업 됐다.
그 두 사람으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은 진혁도 즐겁기는 마찬가지라 식사 내내 웃고 떠들었더니 스트레스가 확 날아갔다.
그에 반해 공항에서 합류한 선병식의 표정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
진혁이 던진 궁금증으로 잠을 설쳤다.
“그러시는 게 아닙니다.”
“신 시장 개척하시고 나면 그 원망은 없어질 겁니다.”
“좋습니다. 지켜보겠습니다.”
이를 가는 선병식과 함께 진혁은 탑승구로 걸어갔다.
인도 뉴델리 공항에 도착하자 삐뚤삐뚤한 한글로 ‘서진혁’이라고 쓰인 피켓을 머리 위로 들고 있는 사내가 눈에 띄었다.
“제가 서진혁입니다.”
“반갑습니다. 다부다 인디아 그룹에서 나왔습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내를 따라 밖으로 나오자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의 한 빌딩에서 차가 멈춰 내리자 양복 차림의 사내가 맞이했다.
“뉴아이(NewI)를 맡고 있는 타밀입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타밀과 함께 의장실로 가자 아넌드 루먼 박사와 아먼 루먼 부의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인도의 4대 소비재 유통 그룹 ‘다부다 인디아 그룹’ 설립자의 5대손들이었다.
“알라딘 그룹의 서진혁입니다.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귀한 선물을 가지고 오신다는데 당연히 기다려야지요. 앉으십시다.”
아넌드 의장의 말에 모두 자리에 앉았다.
“세계 각국에서 그렇게 연구해도 성공하지 못한 무채혈 혈당 측정기를 한국에서 이뤄낸 것을 먼저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만 그 인사는 그 제품을 개발하신 분이 받으시는 게 마땅할 것 같습니다. 전 다만 운 좋게 그분을 만난게 다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 인재를 찾아낸 서 회장의 안목이 탁월하신 겁니다. 하하하하.”
아넌드는 후덕한 인상에 걸맞게 진심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다부다 인도 그룹’은 제약 회사로부터 출발해서 아넌드 의장도 의학 박사였다.
그에 반해 아먼 부회장은 경영학도 출신으로 취급 품목을 의약 외품까지 확대해 그룹의 덩치를 키운 인물이었다.
“제가 드린 제안은 검토해 보셨습니까?”
“덱스톨을 공급해 주신 대신에 자회사인 뉴아이 디럭 스토어 매장에 한국의 화장품과 약품을 판매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매점을 통해 알쇼핑 제품의 배송을 도와달라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우리 그룹이 도시와 농촌 시장 모두에서 높은 침투력을 가진, 280만 개 이상의 소매점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유통망을 갖추기 위해서 몇 대에 걸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걸 순순히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 노력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세계의 그 누구도 개발하지 못한 제품을 여러 다국적 제약 회사의 좋은 조건을 뿌리치고 귀 그룹에 가져왔다는 점은 잊지 마십시오.”
장내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그 분위기가 길어지자 진혁이 유화책을 내놓았다.
“부의장님이 인도 최초로 종합 쇼핑몰을 오픈해서 성과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우리 그룹의 자랑이지요. 다른 그룹에서 따라하고 있지만 부의장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넌드 의장도 답답했던 참이라 얼른 맞장구를 쳤다.
인도는 세계 2위의 인구 대국답게 당뇨병 환자에서도 중국과 함께 세계 1위를 다투고 있었다. 올리브유를 과다 섭취하는 식습관 때문이었다.
의사인 그의 입장에서 ‘덱스톨’은 무조건 확보해야 할 제품이었다.
하지만 경영자인 아먼의 생각은 달랐다.
진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탁월한 선택이기는 했지만 세상은 훨씬 더 빨리 발전하고 있습니다. 대세는 종합 쇼핑몰에서 오픈 마켓입니다. 아마존과 알리바마의 성장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알쇼핑에게 유통망을 내놓기가 쉽지 않단 말입니다. 우리도 조사해서 최근 알쇼핑이 오픈 마켓으로 전환해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를 막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세계 3대 소비 시장이 될 거라는 것을 세계 경제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거대 자본인 아마존과 알리바마가 상륙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막으실 겁니까?”
눈이 커진 아먼을 두고 아넌드 의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장님께 한 가지 추가적인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말씀해 보시오.”
“알쇼핑 인디아의 공동 설립을 제안합니다.”
“합작하자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지분은 반반으로 하고, 관리는 저희가 하겠지만 경영자 선정은 다부다 인디아 그룹에 맡기겠습니다.”
아넌드의 시선을 받은 아먼이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저할 일이 아니었다. 한국의 뛰어난 이커머스 노하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넌드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다음 날 양해각서를 체결하기로 하고 나와 타밀 사장의 안내로 뉴아이 매장을 둘러보았다.
빠른 경제 성장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개발이 안 된 곳이 많은 데 비해 매장은 현대식으로 깔끔했다.
진열된 제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진혁이 선병식만 듣게 일부러 한국말로 말했다.
“이곳에서의 홍보는 신중을 기하셔야 합니다. 인도네시아에 이어 2억 명이 넘는 무슬림이 살고 있지만 전체 인구의 20%도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관계도 좋지 않고요.”
“알고 있습니다. 최대한 무슬림의 색채는 지우겠습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관계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만큼이나 좋지 않았다.
분리 독립된 파키스탄과는 지금도 카슈미르의 영토권을 가지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을 하고 있었다.
서너 개의 매장을 구경하고 나자 타밀 사장이 저녁 대접을 했다.
그 자리에는 아먼 부의장도 참석했는데, 오픈 마켓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내놓았다.
그 답변은 선병식이 맡았다.
실무 작업은 그가 맡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진혁의 체면을 세우기 위함이기도 했다.
숙소는 다부다 인디아 그룹에서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으로 잡아 줬다.
다음 날, 아넌드 의장과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조만간 양측이 실무팀을 꾸려 만나기로 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회장님의 추진력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이런 계획은 언제 세우신 겁니까?”
“화교의 농간에 굴복할 때였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함을 절감하고 힘을 기를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두바이에서 첫 회의 때 올려진 지도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서남아시아가 신천지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힘을 길러 동남아시아에서 정면 대결을 펼칠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후덥지근한 날씨에 땀을 흘리면서도 선병식은 갑자기 밀려온 한기에 몸을 떨었다.
그만큼 진혁의 말에서 전해지는 차가운 기운이 대단했다.
“인도네시아로 돌아가면 바로 한 본부장과 상의해서 실무팀을 꾸리겠습니다.”
“그 일은 잠시 미루셔야 합니다.”
“다른 일이 있습니까?”
“한군데 더 들를 곳이 있습니다.”
진혁이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였다.
“여기서도 계획이 있으신 겁니까?”
“이제부터 세워 봐야지요.”
호텔을 잡고 룸에 들어가자마자 인터폰이 울렸다.
진혁이 서둘러 선병식을 내보내자, 얼마 후 체구가 조그마한 백인과 콧수염을 기른 파키스탄 현지인이 들어왔다.
“해리슨이오. 이쪽은 샤바즈 준장이시고.”
“서진혁입니다.”
악수를 하고 앉았다.
“잭슨에게서는 연락을 받으셨지요?”
“받았습니다만 이곳에 가 보라고만 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카심이 전화를 해 달라고 한 이유는 CIA 요원인 잭슨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왜 저를 부르셨는지 말씀해 보시지요.”
해리슨이 진혁을 빤히 바라보며 본론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