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파키스탄의 행운
“아실지 모르지만 현재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단계적인 철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빈 라덴이 사살되어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다는 백악관의 판단이지만, 현지 사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탈레반 잔당들이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습니다.”
오바마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 내 반전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은 끝을 알 수 없는 수렁이라 서둘러 빠져나가려는 몸부림이었다.
“대신 파키스탄 군을 지원해서 그들의 준동을 막기로 전략을 수정했습니다. 지원 내역에는 전투 식량과 의약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하!”
진혁은 왜 자신을 불렀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샤바즈 준장의 다음 말이 그 예상을 확인시켜 줬다.
“미스터 서가 무슬림에게 맞는 군용 통조림을 생산하고 공급한 것으로 압니다. 그걸 보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만, 여기 군인들에게 맞는 제품을 개발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구해 미리 시식해 봤는데 수산물은 그대로 보내 주시면 될 것 같고, 콩 종류는 카레를 조금 첨가해 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라면 언제든지 공급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비상 의약품뿐만 아니라 붕대와 반창고 같은 의료용 소모품도 많이 필요합니다.”
“충분히 준비가 가능합니다.”
“내역은 이미 미군에 통보했으니 확인해 보시고 내일 국방부에서 계약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렇게 하지요.”
샤바즈 준장이 할 말만 하고 나갔는데, 아프가니스탄을 자신들에게 떠넘기고 빠지려는 미군의 태도에 불만이 많은 듯했다.
둘만 남자 샤리프가 혀를 찼다.
“쯧. 속 좁기는. 우리가 빠지면 어차피 그놈들이 이리로 넘어올 텐데…….”
“각자 사정이 있겠지요.”
“아무튼 이게 그 내역이니 빠른 시간 안에 준비해 주시오.”
“그 전에 보실 게 있습니다.”
진혁은 해리슨이 내민 종이를 무시하고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다부다 인디아 그룹과 맺은 양해각서였다.
“이런!”
해리슨이 바로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인도와 파키스탄의 앙숙 관계는 잘 알고 있었다. 적군에게 군납을 하는 게 알려지면 언제 어디서 저격을 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잭슨 씨가 미리 말씀하셨다면 조금 미뤘을 텐데, 아쉽습니다.”
“인도의 일을 미루면 안 되겠소? 겨우 설득했단 말입니다.”
“그건 어렵겠습니다.”
해리슨의 다급한 표정을 보고도 진혁이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안절부절못하는 해리슨의 행동을 잠시 지켜보다가 말했다.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뭡니까?”
“인도 군에도 납품할 수 있게 주선해 주십시오.”
“인도 군에요?”
“그렇습니다. 양쪽 모두 납품하면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CIA에 그 정도의 영향력은 있었다.
“알겠소. 그 문제만 해결되면 바로 가능한 거죠?”
“그렇습니다.”
“좋소. 내일 연락드리리다.”
서둘러 나가는 해리슨의 모습에 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인도는 파키스탄과만 전쟁을 하는 게 아니었다. 티벳을 두고는 중국과 대치하고 있었다. 상비군만 150만이 넘으니 거기에 납품할 수 있다면 그 양은 엄청났다.
알쇼핑의 인도 진출이 이상한 쪽으로 사업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조짐이 좋았다.
얼마 후 선병식이 들어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를 만나신 겁니까?”
“군 관계자들입니다. 어쩌면 파키스탄과 인도 군에 통조림과 의약품을 납품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준비를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선병식은 진혁이 중동의 일부 국가에 군납 통조림을 납품하는 것을 알기에 그러나 보다 생각했다.
* * *
다음 날, 진혁은 혼자서 메리어트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 앉아 있다가 급히 일어났다.
반가운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니로브의 메이슨 회장이었는데, 체구가 당당한 중년의 현지인이 옆에 있었다.
“미스터 서, 아니, 이제 서 회장이라고 불러야지. 아무튼 반갑네.”
“이렇게 먼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소리 말게. 자네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와야지. 큰 도움을 준 것도 그렇고, 알쇼핑의 매출이 계속 늘고 있어 담당자들이 아주 흡족해하고 있다네.”
“회장님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이쪽은 TCS의 아완 회장님이시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서진혁입니다.”
“제가 더 영광입니다. 오면서 들으니 상당히 유명하신 분이시더군요.”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진혁이 파키스탄 시장 진출 방안을 강구하다가 찾아낸 업체가 TSC라는 이곳 최대의 물류 업체였다.
파키스탄은 아직 현대적 유통 시장이 발달하지 못해 기존 방식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했다.
결국 오프라인 유통은 포기하고 온라인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TSC와 접촉할 방법을 강구하다가 찾아낸 게 메이슨 회장이었다.
유니로브는 이곳에서 여러 개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니 TSC의 배송을 이용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는데, 그게 적중했다.
아완 회장이 물었다.
“온라인 쇼핑몰 사업을 시작하실 생각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알쇼핑이라고 중동과 동남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 서남아시아까지 확대하려고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뭐든 물어보십시오.”
“서 회장은 사업을 하는 이유가 뭐요?”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었다. TSC의 협조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이번에 조직을 그룹 체계로 전환했습니다. 그때 발표한 사훈이 있습니다. 상생과 공존.”
“……!”
“이걸로 답이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반응한 것은 메이슨 회장이었다.
“그것 보게, 아완. 틀림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소말리아 난민 캠프를 도운 것도 그렇고, 지금도 라이나 왕비의 재단에 꾸준히 기부하고 있다니까.”
“그렇게 칭찬받을 일은 아닙니다.”
겸손한 자세도 마음에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아완이 물었다.
“유통을 맡아 줄 파트너는 정하셨소?”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대형 유통회사가 아직은 없어서 온라인 쪽만 우선 진출할 작정입니다.”
“그럼 나와 함께해 보지 않겠소?”
“회장님과 말입니까?”
“우리도 이제 사업을 넓힐 단계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언제까지 남의 물품만 배달해 줄 수는 없지 않겠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야 무조건 대환영입니다.”
“지분은 반반씩 하기로 하고 경영은 그쪽에 맡기겠소.”
“아닙니다. 이곳 사업이니 회장님이 맡으시는 게 맞습니다.”
“사업은 전문가가 맡아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오. 대신 나는 오프라인 유통망 확충을 진행하겠소.”
너무 많은 편의를 봐주는 모습에 진혁은 오히려 아완 회장의 저의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 마음을 눈치채고 메이슨 회장이 말했다.
“아완과 내가 처음 만난 게 어디인 줄 아는가?”
“…….”
“십여 년 전 이곳에 큰 홍수가 나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는데 그때 구호 현장에서 만났다네. 아완도 라이나 왕비와 마찬가지로 사회 공헌 활동가라네.”
“그분에 비할 바는 못 되지. PSO의 이무란이 들었으면 웃을 일이네.”
PSO(Pakistan State Oil)는 파키스탄 국영 다국적 석유 회사로 사회 공헌 활동의 선두 기업이었다.
메이슨이 진혁에게 웃으며 말했다.
“서 회장이 마음에 들어서 제안하는 것이니 받아들이게.”
“고맙습니다. TSC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방금 전에 말한 마음 변치 말아 주시게.”
“지켜봐 주십시오.”
진혁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메이슨 회장이 소개시켜 준 데다 뜻하지 않은 선물까지 받았으니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감사한 선물을 받았으니 유통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 보시게.”
허락을 받은 진혁이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소매업에 진출하시려면 드럭 스토어 매장으로 생각하시는 게 좋으실 것 같습니다. 요즘 그쪽이 대세입니다.”
진혁은 현재 편의점 시장의 변화와 홍콩의 메이왕을 예로 들었다.
“메이슨 회장님의 유니로브에서 개인위생 용품을 생산하니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화장품과 일반 의약품은 제가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쪽을 검토해 보았는데 기존 약국의 반발이 심해요. 잘 모르시겠지만 파키스탄의 의료 체계는 일반 병원과 민간 병원으로 되어 있는데, 약국의 대부분이 민간 병원과 관계된 곳이라 로비력이 막강합니다.”
“그건 또 제가 막아낼 방법이 있습니다.”
진혁이 ‘덱스톨’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세계 모든 제약 회사에서 탐내는 제품입니다. 특히나 파키스탄은 당뇨병 환자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많은 나라입니다. 이것과 한국에서 개발한 값싼 당뇨 신약을 공급해 주겠다고 설득하시면 될 겁니다.”
“음, 그리 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군.”
“네가 그랬지 않는가. 서 회장을 만나면 뭐든 해결된다니까.”
“큰 도움이 됐소. 그럼 나도 뭔가를 해 줘야 하는데…….”
“아이고, 이제 그러지 마십시오. 그럼 제가 또 뭔가를 드려야 하는데 이제 진짜 내놓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하하하. 이야기가 또 그렇게 되는 건가? 아무튼 우리 함께 열심히 해 보세.”
“바라던 바입니다.”
이어진 식사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사업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공통 관심사인 기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세계 곳곳에서 이상 기온과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걱정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도울 곳은 많은데 세계 경기 하락으로 매출이 줄자 기업들의 기부금은 오히려 줄고 있습니다.”
두 회장의 걱정을 듣던 진혁이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제가 라이나 왕비님과 재미난 일을 하는데, 함께 참여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또 무슨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가?”
“기부 펀드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진혁은 알라딘 홀딩스와 기부 펀드에 대해 설명해 줬다.
아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투자금까지 날릴 수도 있네.”
“이 사람이 ‘검은 머리 짐’ 앞에서 그 무슨 망발을……. 난 무조건 참여하겠네.”
“검은 머리 짐?”
“아, 내가 그 이야기는 안 했나 보군. 서 회장이 사실은 말이야…….”
메이슨이 아완에게 설명하려는 모습에 진혁이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갔다. 듣고 있으면 낯이 뜨거워질 것 같았다.
얼마 후 돌아오자 아완이 탄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재주까지 있다니 대단하네. 나도 끼워 주게.”
“절 믿고 맡겨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반드시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운영하겠습니다.”
두 사람도 각기 백만 달러씩 내놓기로 해서 기부 펀드의 운영자금이 4백만 달러로 늘어났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해리슨이 다시 호텔 방을 찾아왔다.
인도 군에도 통조림을 납품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다음 날, 진혁은 선병식과 함께 TSC 본사를 찾아가 아완 회장과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그 자리에서 아완 회장이 반가운 말을 전했다.
“PSO의 이므란 회장도 우리 사업을 도와주기로 했네. 알쇼핑의 좋은 물건을 소개해 주면 자신들도 팔아주겠다는군.”
진혁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은 감사한데, 저희 제품 중에 주유소에서 팔 수 있는 물건은 많지 않습니다.”
“하하하하하. 서 회장이 농담도 할 줄 아는군. PSO가 주유소를 운영하는 것은 맞지만, 그중 3,500개에서 매점을 운영하고 있고, 200개는 대형 마트 수준일세.”
“아, 그렇습니까?”
현지인만 알 수 있는 정보였다. 다시 한번 TSC와 합작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 하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