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방글라데시로
“이므란 회장도 끼워 달라고 하더군.”
“예?”
“기부 펀드 말이야.”
“아! 저야 그러면 감사하지요.”
기부로 이어진 끈끈한 관계가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라이나 왕비를 알게 된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자카르타 공항의 입국장을 나서는 선병식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마침내 인도에 이어 파키스탄에도 알쇼핑이 진출할 수 있게 됐다.
준비할 것들이 태산이지만 오히려 의욕이 넘쳐났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덕분에 AM에 체면이 서게 됐습니다.”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준비를 철저히 해서 조금도 소홀함이 없게 해 주십시오.”
“절대 회장님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선병식이 진심으로 진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 대해 여러 소문은 들었지만 과장됐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옆에서 지켜보니 오히려 소문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 나라에 동시다발로 진출해야 하는 상황이라 선병식 혼자 처리하기는 불가능했다.
한상국에게 이야기해 한국에서 전문가를 파견하게 했다.
AM도 새로운 시장 진출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도와줄 여력이 되지 않았다.
대신 카심이 전화를 해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퉁명스러운 소리부터 했다.
-사람이 그러시는 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바빠서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미스터 서 바쁜 거야 세상이 다 압니다. 내가 연락 못 받았다고 해서 이런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신 시장 개척에 따른 물량도 부족해서 이제 군용 오더까지 받으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이쪽 상황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공장 증설이 필요하다는 보고는 받았지요?
“예. 이야기는 들었지만 신중하게 생각할 문제라 결정을 미뤘습니다.”
-미스터 서가 당한 일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무조건 여기에 증설해 달라는 건 아닙니다. 어디건 빨리 결정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서두르겠습니다.”
카심이 전화까지 해서 재촉하는 것을 보니 진짜 어렵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진혁이 바로 끊기 뭐해서 물었다.
“이집트에 특별한 일은 없죠?”
-압델이 대통령으로 새로 취임한 것 말고는 특별한 것 없어요.
“다행이네요.”
-시장의 압둘라 사장 등이 미스터 서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어요. 재고품이 소진돼서 더 이상 물건 공급을 못 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간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지요.”
-핫산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도통 들어먹질 않는답니다. 미스터 서라면 방법을 찾아낼 거라면서요. 그리고 알트라드 씨도 안부를 물었어요.
어느새 기억 저편에 밀려 버린 고마운 이름들이었다.
초창기에 그들이 도움이 큰 힘이 됐었다. 압델이 미운 건 미운 거고, 이집트에 한번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공장 증설을 서두르겠다고 이야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
* * *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오가며 공장 후보지를 물색했는데 쉽지 않았다.
한국은 인건비는 차치하더라도 젊은층이 3D 업종을 기피하는 풍조에 직원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반대로 인도네시아는 직원 구하기는 쉬웠지만 부지가 없었다.
지금 화장품 공장도 임텍 회장에게 반 강제적으로 협박해서 겨우 구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인도와 파키스탄을 오가며 알쇼핑 서비스를 준비하고 군납도 해야 했다.
* * *
일에 파묻혀 살던 진혁이 두바이를 찾았다.
알라딘 홀딩스가 발족하는 날이었다.
“야맘입니다, 회장님.”
“서진혁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야맘은 아랍에미리트 국제 투자 회사(EIIC)의 채권 투자 전문 수석 매니저 출신으로 갈리가 영입한 인물이었다.
야맘이 보고를 했다.
“현재 알라딘 그룹의 투자 가용금은 3억 달러 정도입니다. 각 회사에 비축되어 있는 투자금이 2억 5천만 달러이고, 알쇼핑의 단기 보증금이 5천만 달러 수준입니다. 매출이 계속 신장되고 서비스 국가가 늘어나고 있으니 투자금도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사료됩니다.”
“제가 많은 사람 중에 채권 전문가인 야맘 사장님을 선택하신 이유는 들으셨지요?”
“갈리 사장님께 소중한 돈이고 돌려줘야 하는 돈이니 수익보다는 안전을 먼저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최대한 안정적으로 운영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원금 보장이 되는 상품위주로 투자하겠습니다.”
바로 알아듣는 게 갈리가 제대로 설명한 모양이었다.
진혁이 천만 달러가 든 기부 펀드 통장을 내밀었다.
파키스탄에서 세 명이 더 투자하기로 했다는 말에 라이나 왕비도 자신이 아는 사람도 투자하길 원한다고 하여 총 천만 달러가 됐다.
“이것도 투자해 주십시오. 기부하는 분들이 모아 주신 소중한 돈입니다.”
“알겠습니다. 이것까지 안전하게 채권…….”
“아닙니다. 이 돈은 유가 선물에 투자해 주십시오. 포지션은 풋입니다.”
“선물은 변동성이 큰 상품입니다. 기부할 소중한 돈이라면…….”
“그 부분은 나도 충분히 감안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고 투자해 주세요. 대신 이 사실은 철저히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하는 야맘의 모습에 갈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진혁이 ‘검은 머리 짐’이라 불리는 걸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알라딘 홀딩스의 창립 행사에 참석하고 바로 인도네시아로 돌아와서는 인도와 파키스탄 알쇼핑 오픈 기념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연이은 행사로 파김치가 되어 쉬고 있을 때 반가운 전화가 걸려 왔다.
라이나 왕비였다.
“유럽 순방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지금 어디세요?
“인도네시아에 있습니다.”
-잘됐군요. 방글라데시로 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진혁은 전화를 끊고 서둘러 공항으로 갔다. 라이나 왕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굳어 있어서 불안했다.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 공항에 도착하자 검은 양복 차림의 사내들이 다가왔다.
“서진혁 회장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총리실에서 나왔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무슨 일이십니까?”
“라이나 왕비님은 총리님과 계십니다. 그쪽으로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진혁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총리실에 도착하자 라이나 왕비와 나즈마 총리가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무거웠다.
“서진혁입니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혹시 미얀마의 로힝야족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죄송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라이나 왕비가 진혁에게 빠르게 설명했는데 안타까운 이름이었다.
로힝야족은 미얀마에 사는 핍박받는 무슬림들이었다.
정부로부터 국민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온갖 탄압과 박해를 받고 있는 불쌍한 종족이었다.
“국경을 넘어 탈출한 난민 3만 명이 두 난민 캠프에 수용되어 보호를 받고 있어요.”
“원래 정원은 2만 명입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불법 체류자들이 10만이나 있어요. 슬럼가에 숨어든 이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고요.”
나즈마 총리가 차가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잠시 노려보던 라이나 왕비가 말을 이었다.
“난민 캠프에 있는 이들은 유엔난민기구(UNHCR)를 통해 지원받고 있지만, 캠프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은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NGO 등 세계 구호 단체가 돕고 있는데, 내가 지원하는 무슬림 에이드(Muslim Aid)도 그중 한 곳입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진혁이 일부러 끼어들어 물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계속 말싸움만 하게 생겼다.
“나즈마 총리께서 우리의 활동을 중단하라고 하고 계세요. 우리의 도움이 없으면 그들은 당장 굶어 죽는데도 말입니다.”
“왕비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저도 그들의 사정이 딱하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런 구호 활동 소식이 전해질수록 더 많은 난민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그들을 감당해야 할 우리나라 사정도 생각해 주셔야지요.”
“그렇다고 뻔히 죽을 걸 알면서도 그냥 두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모든 책임을 져 주시든지요. 앞으로 밀려오는 난민까지 말입니다.”
두 여자의 설전으로 진혁은 사태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난민을 보호하려는 라이나나 그들에 대한 지원이 난망한 나즈마 모두 이해가 됐다.
진혁은 방글라데시의 경제 사정이 얼마나 최악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방글라데시는 1인당 국민 소득이 천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UN이 정한 최빈국이었다. 자국 국민들도 굶어 죽는 판에 난민까지 책임질 수는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 없이 내모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은 한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이었다.
한동안 설전을 이어가던 라이나 왕비가 참지 못하고 진혁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NS통신의 조나단 기자를 불러 주세요. 로힝야족의 참혹한 실상을 세상에 알려 주세요. 더불어 미얀마 정부의 반인도주의적 형태도 말입니다.”
“조나단 기자를 부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난민들에게 도움이 될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럼 이대로 쫓겨나야 한다는 말인가요?”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진혁은 입장이 난처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조나단 기자에게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풀어야 했다.
나즈마 총리를 보고 물었다.
“총리님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 보세요.”
“저도 방글라데시에 진출할 생각으로 조사해서 이곳의 경제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총리님도 개인으로는 안타깝지만 일국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앉아 계시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으로 압니다.”
“맞아요. 우리도 지원이 절실해요. 그런데 국제 사회는 오히려 로힝야족 사태를 방관하면서 우리보고 책임지라고 하고 있어요. 이건 부당해요.”
“그 점에 대해서 세계인의 한 사람으로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을 보호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로힝야족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고 국제 사회가 나서게 하는 것은 왕비님을 도와 최대한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그러니 총리님도 기왕 지금까지 해 오신 것, 조금만 더 보호해 주십시오. 미력하나마 저도 돕겠습니다.”
진혁의 제안은 출구 전략을 찾던 나즈마 총리에게 좋은 기회였다.
그녀 역시 강제로 NGO를 내쫓았다가는 국제 사회의 엄청난 비난에 직면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좋아요. 그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하지만 더 이상의 난민 유입은 안 됩니다. 그 점은 이해해 주세요.”
“왕비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아쉽지만 어쩌겠어요. 내 나라가 아니니.”
“그럼 그렇게 합의된 것으로 알고 조나단 기자에게 부탁하겠습니다.”
겨우 사태를 수습한 진혁은 총리실을 나와 조나단 기자에게 전화했다.
조나단은 두말없이 취재진을 이끌고 달려오겠다고 했다.
라이나 왕비와 함께 난민 캠프로 가려 했지만 관계자와 회의를 해야 하니 조나단 기자가 도착하면 함께 오라고 했다.
결국 진혁은 혼자 호텔에 머무르면서 기다려야 했다.
갑자기 받은 휴가에 늘어지게 자고 나자 배가 고팠다.
룸서비스를 부르려고 인터폰을 들려는 순간 먼저 울렸다.
-총리 비서실입니다. 총리님께서 저녁 만찬에 초대하고자 하시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갑작스런 만찬 초대였다.
말투를 보아하니 라이나 왕비는 부르지 않은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 시간 후에 차를 그쪽으로 차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다 합의가 되었기에 자신을 따로 부를 이유가 없었다.
그럼 왜?
‘어쨌든 가보면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