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코트라, 이영석
나즈마 총리는 불우한 과거가 있었다.
대통령의 딸로 태어났지만 군사 쿠데타로 아버지는 물론 일가족이 모두 피살됐다. 나즈마는 그때 여동생과 외국에 나가 겨우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즈마의 얼굴과 눈빛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믿지 않고 자신을 감추면서 살아온 세월의 아픔이 느껴졌다.
식사를 끝나고 차를 마실 때야 나즈마가 부른 이유를 꺼냈다.
“왕비가 도움을 청한 사람이 너무 젊어서 놀랐어요.”
“왕비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조사해 봤더니 오히려 더 놀라웠어요. 굉장히 능력 있는 사업가시더군요.”
“과찬이십니다.”
“아까 대화 중에 우리나라에 진출할 생각이라고 하셨는데, 결정은 하셨나요?”
“죄송합니다만 제가 하는 사업이 온라인 유통이라 이곳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해 포기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무슬림 인구는 1억 5천만 명으로 인도네시아, 인도, 파키스탄에 이어 4위였다.
당연히 관심을 갖고 조사하다가 이내 접었다.
최빈국인 데다가 온라인 시장이라고 부르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온라인 상거래 플랫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 경제 규모의 1%도 되지 않았다.
“온라인 유통도 결국 제품이 있어야 돌아가지 않나요? 실제 한국, 이집트, 인도네시아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그건 그쪽 시장에 팔리는 일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방글라데시는 최빈국이 갖는 다양한 혜택과 낮은 임금 등 여러 가지 장점과 각종 지원책으로 세계 여러 기업들이 들어와 있어요. 한국 기업들도 섬유, 의류 분야를 중심으로 150여 개 사가 들어와 있고, 주재원만 1,200명이 넘어요.”
“……!”
“서 회장님이 투자를 결정한다면 최고의 혜택을 드리겠어요. 로힝야족의 난민 문제도 아무리 국제 사회가 관심을 갖는다고 해도 결국 우리나라가 잘살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총리님께서 그렇게 부탁하시니 다시 한번 검토해 보겠습니다만 약속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이해해요. 하지만 꼭 부탁드려요.”
간곡한 말과는 달리 나즈마 총리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들어 있지 않았다.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 * *
다음 날, 조나단 기자가 도착하자 함께 남부의 테크나프 난민캠프로 갔다.
수도 다카에서 약 300킬로나 떨어진 데다 비포장도로라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다시 한번 온라인 시장 진출은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도 NGO의 꾸준한 관심 덕인지, 열악하기는 했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방글라데시 군이 경비를 강화해 국경 근처에 머물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입니다. 게다가 미얀마에 남아 있는 이들은 지옥 속에 살고 있습니다.”
NGO 직원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나단이 현지 취재를 끝내고 국경과 미얀마의 실상을 취재하러 떠난다기에, 진혁은 라이나 왕비와 함께 다카로 돌아왔다.
다카 국제공항에서 라이나 왕비를 배웅한 진혁은 쿨산에 있는 코트라를 찾았다.
“전화 드렸던 서진혁입니다.”
“이영석 과장입니다. 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영석은 30대 중반으로 이곳 코트라 소장이었다. 진혁이 미리 전화를 해서 면담을 예약했었다.
“제가 온 줄 아셨습니까?”
“그럼요. 유명하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총리실을 방문한 것도 알고 있는데요.”
“이런.”
“소문이 빠른 곳입니다. 총리님과의 대화는 즐거우셨습니까?”
“즐겁기보다는, 이곳에 공장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그것 때문에 의견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현지 직원이 차를 내놓고 나자 이영석이 말했다.
“충분히 검토해 보실 만하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신중을 기하셔야 합니다. 이곳 사정이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한동안은 저임금으로 각광받았습니다만 두 번의 큰 참사와 정치 불안으로 일부 기업들이 철수하거나 공장 이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영석이 들려준 이야기는 진혁이 알고 있는 것보다 심각했다.
재작년 타즈린 의류 공장 화재, 지난 4월 라나 플라자 공장 건물 붕괴로 1,200명이 이상이 목숨을 잃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
그 뒤로 근로자들이 공장의 안전 대책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가, 노조 가입이 허용되고 최저 임금이 50% 오르는 등 기업 환경이 급격히 나빠졌다고 했다.
“무엇보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의 여파가 컸습니다.”
대형 사고로 방글라데시 근로자들의 열악한 근로 환경과 임금 착취가 세상에 알려졌다.
세계 소비자들과 선진국들은 방글라데시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글로벌 의류 업체에 대한 비난을 했고, 책임 있는 조치 강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로 인해 세계적 의류 기업인 Hexa와 유니핏 등이 방글라데시의 공장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게다가 지난 선거에서 나즈마 총리가 재선에 성공했지만 야당의 보이콧으로 반쪽 선거로 치러져서 국정 운영에 걸림돌이 될 거라고들 예상하고 있습니다.”
“나즈마 총리가 일개 사업가인 저를 불러 직접 부탁한 이유가 있었군요.”
“총리 입장에서는 한 곳이라도 더 투자를 유치하는 게 시급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이곳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최저 임금이 올랐다고 하지만 여전히 주변의 캄보디아나 베트남, 인도네시아보다는 아직도 낮습니다. 여전히 매력적인 시장이긴 합니다.”
“그것과 함께 최빈국의 혜택과 각종 지원책을 거론하며 부탁하시더군요.”
“거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미국이 최빈국 특혜 관세(GSP) 혜택을 중단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각종 지원책을 받기 위해서는 수출 가공 지역(EPZ)에 입주해야 하는데, 입지 여건이 좋은 다카와 치타공에는 자리가 없습니다. 다른 곳은 기반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입주를 안 하는 게 맞습니다.”
크게 고개를 저은 이영석이 주의를 줬다.
“EPZ 입주 기업의 혜택에도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후진국 특유의 공무원의 늑장 처리와 부정부패는 차치하더라도, 이중 과세와 수입품에 대한 높은 관세는 앞선 혜택을 모두 합친 것보다 큽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수입을 억제하기 위해 일부 사치품에 대해서는 350%까지 특별 소비세를 부과하고 있다고 했다.
진혁은 이곳을 찾아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여우같은 나즈마 총리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가는 코가 꿸 뻔했다.
“정말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할 일이고, 특히나 손기성 부장님이 특별한 부탁도 있었습니다.”
“아, 진급하셨군요. 아직도 사우디에 계십니까?”
“아닙니다. 진급하셔서 한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서 회장님을 여러 번 칭찬하시면서, 여기 오셨다니 적극적으로 도우라는 당부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참 고마운 분인데 사업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한국에 들어가면 꼭 찾아뵙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제가 낱낱이 사정을 말씀드린 것은 그간 들은 회장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총리님까지 나서서 부탁할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은 맞지만, 그 또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략을 잘 짜서 접근하시면 의외로 좋은 결과를 얻으실 수도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부탁드리고, 오늘은 제가 식사 대접을 하고 있으니 함께 나가시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영석이 안내해 간 곳은 한국 식당 ‘대장금’이었다.
입구는 한옥 대문이었고 지붕도 기와가 올라가 있었다. 내부도 한옥 구조로 물레방아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현지인 종업원만 아니었으면 마치 서울의 한정식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이곳 한인 수가 1,200명이 넘습니다. 미약하지만 한류도 전파되어 각국 대사관이나 고위 공무원들이 자주 이용해 장사가 잘된답니다. 다카 시내에만 이런 한식당이 열 개도 넘습니다.”
“그 정도인가요?”
“노래방도 있고, 미용실과 떡집도 있습니다. 태권도장까지 있으니 한국이나 마찬가지지요.”
“대단하군요.”
“이곳 사람들은 순박하고 한국에 대해서도 굉장히 우호적입니다.”
자리에 앉자 깨끗한 와이셔츠 차림의 웨이터가 메뉴판과 물을 가져왔는데 앳돼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과장님.”
“샤물, 어떻게 된 거냐?”
“오더가 줄어들어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쉬고 있는데, 마침 친구가 일이 있다고 해서 오늘 하루 일하기로 했습니다.”
“거기도 어려운가 보구나. 수고해라.”
능숙한 솜씨로 잔에 물을 채우고 돌아가는 웨이터의 모습에 진혁이 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제 소개로 한국에 산업 연수생으로 3년간 갔다가 돌아온 아이입니다. 정식 취업이 돼서 더 있을 수 있었는데 안타까운 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
“지난해 의류 공장 사고로 부모님 모두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런…….”
“대학까지 나온 데다 성실하고 산업 연수생으로 있으면서 한국어를 배워 왔습니다. 한국 의류 공장에 취직시켜 줬는데 그곳 사정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저 아이 누나도 한국에 2년간 있다가 온 것으로 압니다.”
메뉴판을 펼치자 한국 음식이 나열되어 있었다. 가장 비싼 샤브샤브가 2,500디카로 30달러 정도였다.
“생각보다 저렴하군요.”
“여기서는 이것이 비숙련공의 한 달 월급보다 많은 금액입니다.”
“아, 그렇군요.”
진혁은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영석이 700디카인 소고기 샤브샤브를 시키자 같은 것으로 했다.
“소주도 한잔하셔야지요?”
“소주도 있습니까?”
“그럼요. 한국에서 수입해 와서 400디카로 비싸긴 합니다만, 그래도 외국에서 그게 어디입니까.”
“그렇긴 하지요.”
이후 두 사람은 식사와 함께 소주를 나누며 다시 공장 건설에 따른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영석도 술이 세서 둘이 세 병이나 마셨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진혁이 마침 지나가던 낯익은 웨이터를 보고 불렀다.
“샤물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사장님.”
“내일 일할 곳은 구했나?”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일 하루 가이드를 해 줄 수 있겠나? 몇 군데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가능합니다, 사장님.”
“그럼 웨스튼 호텔로 9시까지 와 주게.”
“웨스튼 호텔, 9시. 알겠습니다.”
똑같이 따라 하며 기억하려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차도 필요한데 가능하겠나?”
“아는 택시 아저씨가 있습니다. 좋아하실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 돈으로 우선 처리해.”
진혁이 지갑에서 100달러 지폐를 꺼내 줬다.
샤물이 놀란 얼굴을 했다.
두 달치 월급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그럼 내일 보자고.”
진혁이 아직도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샤물을 두고 자리로 돌아왔다.
소주 한 병을 더 먹고 일어나 각자 택시를 타고 떠났다.
방글라데시의 치안은 취약해 외국인이 밤에 돌아다니는 것은 무척 위험했다.
* * *
다음 날 아침, 로비로 나가자 단정한 양복 차림의 샤물이 중년 사내와 함께 있었다.
“오늘 운전해 주실 팔락 아저씨입니다.”
“팔락입니다, 보스.”
“다카 공단을 둘러보고 싶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팔락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다카 수출 가공 공단을 찾아갔다. 입구에서는 경찰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팔락이 이야기하자 차단 봉이 올라갔다.
“한국 본사에서 공장 시찰을 나온 분이라고 했습니다.”
“원래부터 이런 검문이 있었습니까?”
“작년 총 파업 이후 생겼습니다. 입주한 외국 기업들이 안전을 문제 삼아 정부에서 내린 조치입니다.”
다카 공단은 그 규모가 엄청났다.
346에이커의 넓은 땅에 입주 기업만 백 곳이 넘었고 종사자는 10만 명이나 된다고 했다.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고 빈 땅도 거의 없는 게 활황임을 알 수 있었다.
“치타공은 이보다 더 큽니다.”
“그럼 내일은 그곳을 둘러보기로 하자.”
“알겠습니다.”
샤물과 팔락이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그렇게 이틀 간 다카와 치타공을 둘러보고 저녁은 호텔 식당에서 샤물과 먹었다. 팔락은 호텔에 내려주고 먼저 돌아갔다.
샤물은 이런 고급 식당은 처음인지 어색해했다.
“남은 돈입니다. 이틀에 팔락 아저씨는 7달러, 저는 3달러로 계산했습니다.”
샤물이 건넨 90달러를 옆에 놓고 진혁이 물었다.
“네 꿈은 뭐냐?”
“한국에 다시 건너가 돈을 벌어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겁니다.”
“한국에서 멸시받는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게 겨우 네 꿈이라는 말이냐?”
진혁의 차가운 일갈에 샤물이 놀란 얼굴을 했다.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충분히 경험했다. 하지만 그걸 한국인의 입으로 들을 줄은 몰랐다.
진혁이 한 번 더 다그치듯 말했다.
“왜 대답을 못 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