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공장 건설
“이곳에서는 기회가 없습니다. 제가 희생해서 가족이 행복하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나도 한국에 갔었다면서. 그곳 사정이 어떤 줄 알 텐데, 과연 네가 보낸 돈을 받고 행복할 것 같으냐?”
“어린 동생들이 있습니다. 누나도 이해할 겁니다.”
샤물이 잠시 흔들렸던 눈을 고정시키고 똑바로 말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래서 이제 자신이 가장이었다. 누나와 동생들을 돌보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혁이 굳은 얼굴을 풀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꼭 한국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도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 줄 기회가 있다면 잡아 보겠느냐?”
“……!”
샤물이 입을 꾹 다문 채 진혁을 쳐다보았다.
그도 진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았다.
“난 이곳에 공장을 세울 생각이다. 이곳 말고도 여러 나라에 사업체가 있어서 이곳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 그래서 여기서 대신 일을 해 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네가 한번 해 볼 테냐?”
“해 보겠습니다. 아니, 꼭 하겠습니다, 사장님.”
샤물의 눈은 이미 벌게져 있었다.
* * *
다음 날, 진혁은 나즈마 총리를 찾아갔다.
이미 연락을 해서 하비불 수출 가공 공단 관리청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결정하셨습니까?”
“몇 가지 문제만 해결되면 이곳에 공장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먼저 다카 수출 가공 공단에 입주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건 어렵습니다. 빈 땅이 없습니다.”
하비불이 바로 반대했다.
“제가 둘러보며 몇몇 곳에 빈터를 확인했습니다.”
“이미 분양이 끝난 곳들입니다. 조만간 공장이 들어설 겁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초기에 분양됐다가 아직도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일부 공장은 모기업 부도로 가동이 중단된 곳도 있고요. 이런 경우 규정에 따라 계약 해지 사유에 해당한다고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하비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혁이 그것까지 파악하고 온 줄은 몰랐다. 뒷돈을 받고 미적거리고 있던 중이었다.
나즈마 총리가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사실인가요?”
“규정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만…… 대부분 이미 다른 지역에 입주해 있는 큰 기업들입니다. 공장 증설용으로 잡아 둔 땅이라 현실적으로 회수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지난해에 공단 부지가 없다고 해서 투자받지 못한 금액이 얼마인 줄이나 아세요? 당장 계약 해지하고, 대기하고 있는 기업들에게 연락해서 유치하세요.”
“알겠습니다.”
나즈마 총리가 진혁에게 시선을 주고 다시 물었다.
“다른 것은요?”
“제품 생산을 위해 재료를 들여와야 하는 데 수입 관세가 너무 높습니다. 그것을 없애 주십시오.”
“그건 어려운 문제예요. 서 회장 한 사람에게 특혜를 주면 다른 기업들이 형평성 문제를 들고 나올 게 분명해요.”
“다른 기업들이 반발하지 못할 방안이 있습니다.”
“그래요?”
“현재 총리님께서는 의류 산업에 치우친 국가 경제의 불균등을 해소하고자, 일부 국가 전략 사업으로 지정된 품목에 대해서는 특별 혜택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요?”
“제가 세우려는 것은 화장품 공장입니다.”
“화장품요?”
나즈마 총리는 물론 하비불 청장도 놀란 눈을 했다.
진혁이 화장품으로 결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통조림공장을 옮겨 오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최빈국 특혜 관세에 통조림은 제외되어 있었다. 자국 농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화장품은 거기서 제외됨은 물론 오히려 혜택이 상당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치품으로 지정되어 수입 관세가 15~20%로 높은 편이었다. 이집트 같은 경우는 30%에서 최근에 40%로 올렸다.
물류비용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렇습니다. 이집트의 공장을 이곳으로 옮겨 올 생각입니다. 아마 화장품으로는 외국 기업 최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원료부터 각종 부자재를 모두 수입해 와야 하는 형편입니다. 특혜가 아니라 당연히 배려해 주셔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아주 관세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게 선례가 되면 새로운 제품이 들어올 때마다 곤란한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청장의 말에 일리가 있어요. 낮춰 주는 선에서 정리하도록 하죠.”
나즈마 총리의 결정으로 논의 끝에 화장품 생산을 위한 재료와 부자재 수입에 대해서는 관세를 절반으로 줄이기로 합의를 봤다.
이어 진혁은 이중 과세와 더불어 여러 현안 문제점을 언급했는데, 협의가 쉽지 않았다. 각종 법령들과 얽혀 있어서 총리라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그것을 모를 진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낸 것은 이유가 있었다.
하비불과 얼굴까지 붉히며 따지다가 진혁이 물러섰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청장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또요?”
“그럼 이쯤에서 없던 일로 할까요?”
“아니요. 이야기해 보시오.”
“제가 청장님의 의견을 다 들어줬으니 이번 일이 조속히 추진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모든 행정 절차를 투자청에서 직접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청장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 그런 느긋한 대답을 하시는 겁니까? 입주 기업들이 떠날지 말지 눈치만 보고 있어요. 그럴 때 새로운 공장이 들어온다면 그들도 딴 맘을 먹지 못할 겁니다.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세요.”
“알겠습니다.”
나즈마 총리는 늙은 여우답게 상황판단이 빨랐다. 진혁을 내세워 입주 기업들의 불안을 잠재우려는 의도였다.
어떻든 진혁으로서는 절대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단계를 밟을 때마다 뇌물을 건네다 보면 언제 공장이 세워질지 몰랐다.
총리실을 나온 진혁이 코트라로 가자 이영석과 샤물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히잡을 쓴 조그마한 체구의 여인이 함께 있었다.
“아노아르라고 합니다, 사장님.”
어눌했지만 한국어였다. 샤물의 누나였다.
이영석이 급히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됐습니다.”
진혁이 총리실에 맺은 계약서를 내보이자 읽어 본 이영석이 다시 건네주며 말했다.
“손 부장님 말씀대로 대단하십니다. 들어가기 어렵다는 다카 공단에 부지를 마련한 것도 모자라 감세 혜택까지 받아내시다니, 놀랐습니다.”
“계약서에 직접 언급은 안 했지만 모든 과정을 공단에서 맡아서 해 주기로 했습니다.”
“아이고, 그렇게 되면 아마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빠른 공장 건설 기록이 될 겁니다.”
“과장님 덕분에 급한 사정을 알고 덕을 본 겁니다.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제가 다 뿌듯합니다. 그런데 아노아르는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이영석의 물음에 진혁이 아노아르를 바라봤다.
“무역을 전공했다고요?”
“예, 사장님. 다카 대학교에서 무역학을 배웠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며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했습니다.”
“샤물.”
샤물이 거들었다가 누나의 호통에 찔끔하고 입을 닫았다.
아노아르에 대해서는 이영석에게 들었다. 한국에 대해 알고 영어까지 가능하다니 안성맞춤이었다.
“샤물이 나와 함께 일하기로 했다는 것은 들었지요?”
“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세우려는 공장은 화장품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원료와 부자재를 수입해 와 이곳에서 생산해서 전량 수출을 할 겁니다. 누군가가 무역 업무를 맡아 줘야 합니다. 난 아노아르 씨가 그 일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눈물이 절로 났다.
두 남매가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떠나는 모습에 이영석도 눈이 벌게졌다.
* * *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하자 선병식을 차를 가지고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습니까?”
“한국의 춘천 공장에서는 지원팀을 구성하는 작업에 들어갔고, 이집트 공장에서는 화장품 기계 철거와 통조림 기계 증설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 친구는 샤물입니다. 현지 공장 관리를 맡아야 하니 밤방에게 보내 일을 배우게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샤말의 말에 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호칭은 어디에서 익혔냐고 물었더니, 한국에서 일을 배울 때 낯선 손님들은 모두 그렇게 부르라고 배웠다고 했다.
팔락이 ‘보스’라고 해서 그 연유를 물었더니 그 또한 재미있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공장 사장과 부인을 ‘보스’와 ‘마담’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영국의 오랜 식민지로 지낸 탓이었다.
하도 그 이야기를 들어서 현지의 한국인들끼리도 ‘김 보스’, ‘박 마담’ 등으로 부른다고 했다.
연유를 모르는 선병식은 샤말이 참 예의 바른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 * *
AA의 현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루 쉰 진혁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도착했을 때 서울은 밤이라 바로 집으로 갔다. 앞치마를 입고 문을 열어 주는 지민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덥석 안고 입술부터 내밀었다.
지민이 반항했다.
“아이, 안 돼요.”
“좋으면서.”
팔에 힘을 주어 못 도망가게 하고 더 얼굴을 붙이려고 했다.
“에이 씨, 내가 이 꼴 보기 싫어서 나가 살려고 했던 건데.”
“어? 처제.”
지현이 얼굴을 휙 돌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현이가 들어와 있기로 했다고 말했잖아요.”
“맞다. 그랬지.”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외국 출장이 잦아 지민이 혼자 있는 게 걱정된 장인이 그렇게 결정했다고 전화로 들었는데 잊고 있었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지민이 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현도 좀 전과 달리 활짝 웃으며 반겼다.
“형부, 고마워요.”
“……?”
“사랑하는 처제를 잊지 않고 선물 사 오셔서요. 딱 마음에 들어요.”
지민을 위해 산 선물이었는데…….
장모님의 손맛을 이어받아 지민의 음식 솜씨도 좋았다.
“처제는 공부하기 힘들지 않아?”
“당연히 힘들죠.”
“힘들기는 무슨. 누굴 만나는지 주말이면 화장하고 나가면서.”
“그래도 평일에는 열심히 하거든.”
“열심히 하는 애가 내리 3년째 미역국이냐? 빨리 시집이나 보내 버리든지 해야지.”
“에이 씨, 나 밥 안 먹어. 엄마도 보기만 하면 그러더니.”
지현이 일어나려는 모습에 진혁이 얼른 진화에 나섰다.
“당신은 왜 공부하느라 힘든 사람을 뭐라고 해? 처제도 스트레스가 심할 거야.”
“당신이 자꾸 그렇게 감싸 주니까 애가 버릇만 나빠지잖아요.”
전선이 이상한 쪽으로 변해 버렸다.
그래도 그런 분위기는 금방 없어졌다. 신혼인 데다 오랜만에 왔으니 싸울 시간이 없었다.
불이 일찍 꺼졌다.
* * *
다음 날 출근하자 AK 화장품 황진선 사장이 춘천에서 올라와 있었다.
“권영호 부장과 기술부의 김유석 과장이 현지 근무를 자원해서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공장 운영에는 문제가 없겠지요?”
“능력 있는 직원들이라 문제없습니다. 다른 직원들도 함께 가서 안정될 때까지는 머물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방글라데시 공장은 인도네시아와 달리 원료를 배합하는 공정까지 포함시킬 생각이었다.
공장 설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황진선이 돌아가자 고용준이 AK 사업에 대한 보고를 했다.
“할랄 여행의 추가 가맹점들이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럼 관광객 유치에 문제가 없게 된 건가요?”
“급한 불은 껐지만 만족스럽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계속 가맹점을 늘릴 수만도 없고, 신 사장의 고민이 깊습니다.”
“더 이상 가맹점을 늘리는 것은 안 됩니다. 잘못하다가는 서로 출혈 경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세요.”
“저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마땅한 대안이 없는 모양입니다.”
“일단 당장 급한 것은 아니니 시간을 두고 함께 고민해 봅시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알쇼핑 코리아는 성공적으로 진입한 듯합니다. 아직은 동종 업계 5위이지만 사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빠른 성장세라고들 합니다.”
“다들 고생했지만 한 본부장님과 팀원들이 제일 고생했습니다. 따로 포상 계획을 세워 보세요.”
“알겠습니다. 좋아들 할 겁니다. 그리고 방송국과 언론사 등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 있습니다.”
“거절해 주세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다며 언질을 줬습니다.”
고용준은 이제 완전히 진혁의 복심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말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