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아! 로힝야
“AK 헬스 케어의 노선기 이사가 슬림형 무채혈 혈당 측정기를 개발 완료해서 식약청에 승인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반가운 소식이네요. 다음 포상 대상은 그쪽이 되겠습니다.”
“여러 그룹 계열사들에서 회장님을 뵙기를 청해 와서, 당분간 한국에 들어오실 계획이 없다고 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룹 회장급이 아니라면 앞으로는 고 사장님이 맡아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진혁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이도 어린 데다 대부분의 사업체가 외국에 있어 실감하지 못한 영향이 컸다.
그 후에는 오랜만에 한지철과 오희준을 만났다.
한지철은 정식 이사가 되어 있었다.
진혁이 한국을 떠나 있는 사이에 언론에서는 한동안 태후 화장품과 정인영에 대해 떠들었다.
월크린과의 계약으로 미국과 유럽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남의 유명 성형외과와 연계해 미용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하는 정인영의 거침없는 횡보에 찬사가 이어졌다.
그 실무적인 일을 맡아 진행한 사람이 한지철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네가 다 만들어 놓고.”
“그건 아니죠. 현장에서 고생하는 사람이 가장 힘들다는 것은 제가 더 잘 압니다.”
“그렇긴 하지.”
“이놈같이 책상에 앉아서 전화질만 하는 놈은 절대 모르죠.”
“왜 가만있는 나는 걸고 넘어져?”
희준이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강도가 약했다. 평소라면 핏대를 세우고 따졌을 텐데, 이상했다.
“너 어디 아프냐?”
“아니. 왜?”
“그냥 평소답지 않은 것 같아서.”
“인생이 허무해서 그런다. 선배는 별을 달고, 친구는 토끼 같은 마누라도 얻고 성공한 사업가라고 유명해졌는데, 난 맨날 이 모양 이 꼴이라서.”
“자식이. 네가 어때서, 인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마셔.”
진혁이 일부러 호탕하게 말하며 술잔을 부딪쳤는데도 희준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결국 그날 늦게까지 술을 먹고 들어가는 바람에 안방에서 쫓겨나 거실 소파에서 자야 했다.
* * *
며칠 후 세상은 NS통신이 내보낸 한 장의 사진으로 큰 충격에 빠져들었다.
미얀마 정부의 탄압을 피해 도망치다 해변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려 죽은 16개월 로힝야족 난민 유아 사진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곳은 요르단 왕실이었다.
라이나 왕비가 직접 TV 카메라 앞에 서서 미얀마 정부의 인종 탄압을 성토하고 UN의 즉각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이어 방글라데시의 나즈마 총리가 로힝야 난민 증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국제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알라딘 그룹도 알쇼핑을 통해 로힝야 난민 돕기 캠페인을 실시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한 달간 판매되는 상품에 대한 수익금 전액을 후원금으로 내놓겠다고 약속하고 ‘쿠폰 모으기 운동’도 실시했다.
그사이 조나단은 현지를 돌며 직접 촬영한 참혹한 현실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계속 내보냈다.
세계 곳곳에서 미얀마 정부에 대한 규탄 집회가 열렸다. 특히 같은 종교의 무슬림 국가들에서는 그 강도가 훨씬 심했다.
고용준과 한상국이 벌게진 얼굴로 들어왔다.
“회원 수와 매출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각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흥분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대처하셔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후원금을 내겠다고 계좌 번호를 공지해 달라는 문의가 빗발친다고 합니다.”
“그건 안 됩니다. 절대 따로 후원금을 받으면 안 됩니다.”
진혁의 생각은 확고했다.
이 일은 수익이나 명성을 얻자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로힝야 난민의 어려운 사정을 돈벌이에 이용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대책이 필요합니다. 콜센터에서 문의 전화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합니다.”
“방글라데시 정부에서 직접 후원금 계좌를 열게 하겠습니다. 그걸 공지해 주시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후원금 받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전 세계의 모든 직원에게 그 점을 반드시 공지해 주세요.”
다시 한번 자신의 생각을 확인시켜 주고 나즈마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방글라데시 정부에 공식 후원금 계좌를 개설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여론에 밀린 UN이 인권 조사관을 미얀마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날.
방글라데시 다카 수출 가공 공단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진행됐다.
천 평의 부지에 7층으로 화장품 생산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그 옆으로 조그맣게 3층으로 지어진 건물은 복리후생동이었다.
사무실과 직원 식당은 물론 휴게실과 기도실도 있는 데다, 한쪽에는 수유실까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직원의 90%가 여성인 점을 감안해 취한 조치였다.
나즈마 총리도 직접 참석했다.
개소식 행사가 끝나고 공장과 복리후생동을 둘러본 나즈마 총리가 감탄했다.
“많은 공장을 다녀봤지만 여기처럼 잘된 곳은 처음 봅니다.”
“최대한 쾌적하고 안전하게 지어서 소방 안전 시설 1등급 판정도 받았습니다.”
“수유실까지 마련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여성의 한 사람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 역시 한국에 아내와 어머니가 있습니다. 여성 근로자들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보장해 준 것뿐이지, 칭찬받을 일은 아닙니다.”
“서 회장님의 그런 생각을 다른 공장에서도 가져 줬으면 좋겠어요. 이곳이 그 모델이 될 수 있도록 잘 운영해 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다른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알쇼핑에서 모은 후원금을 전달하는 행사였다.
천만 달러로 예상치를 훨씬 초과했다.
진혁이 후원금을 받지 않자 납품 업체들이 스스로 수수료의 일부를 후원금으로 써 달라고 내놓은 덕분이었다.
물론 알쇼핑의 공지를 통해 방글라데시 정부의 공식 후원금 계좌로 들어온 돈은 이보다 훨씬 컸다.
전달식과 사진을 찍고 다들 나가자 편하게 차를 마셨다.
“라이나 왕비가 왜 제일 먼저 서 회장을 찾았는지 이제 똑똑히 알겠어요. 일을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해 줄지는 몰랐어요. 여러 가지로 고마워요.”
“아닙니다. 도와주신 덕분에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공장을 세우게 되었으니, 제가 오히려 감사하지요.”
“난 우리나라 경제 개발 모델을 한국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전후 국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지금은 원조를 해 주는 나라가 된 그 ‘한강의 기적’을 이곳에서도 펼쳐 보고 싶습니다.”
“총리님께서 열심히 해 주시고 계시니 언젠가는 한국처럼, 아니, 한국을 뛰어넘는 나라가 될 겁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서 회장은 직접 그런 한국의 발전상을 경험했고 또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업들을 펼치고 있으니, 바쁘시더라도 가끔 들러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세요.”
“…….”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사업이야기나 이해관계에 얽힌 말씀은 안 드릴게요. 그냥 편하게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해서 하는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가끔 들러서 좋은 말씀 듣겠습니다.”
나즈마 총리가 돌아가자 AA 화장품 권영호 사장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샤물이 한 중년 사내를 데리고 들어왔다.
“공장장님 모시고 왔습니다.”
리즈비 공장장이었다.
권영호의 보고를 받고 채용하라고 했지만 이렇게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서진혁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빅보스.”
서진혁이 회장인 것을 알고 직원들이 그렇게 부른다는 말을 샤물에게 전해 들었지만 역시나 어색했다.
자리에 앉아 리즈비와 대화를 나눴다.
“생산은 잘되고 있습니까?”
“아직 미숙해 작업량이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고 있어 금방 해결될 겁니다.”
공장은 벌써 일주일 전부터 2천 명의 직원이 출근해서 가동되고 있었다.
극심한 취업률을 반영하듯 경쟁률이 30:1을 넘어, 서류를 검토하는 데만도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고 했다.
“직원들의 만족도는 어떻습니까?”
“대단히 좋아하고 있습니다. 모두 빅보스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진혁은 공원들의 임금을 정부가 고시한 섬유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보다 10% 이상 높게 책정했다.
거기에 최고의 복지 혜택까지 주고 있으니 좋아하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도 자리만 비면 불러 달라는 대기자들이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하지만 진혁은 이런 인사나 받으려고 그를 부른 게 아니었다.
“오늘 뵙자고 한 것은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뭐든 말씀하시면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주십시오.”
“노동조합을요?”
“그렇습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저희는 노조가 필요 없습니다. 다들 빅보스께 만족하고 충성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리즈비 공장장이 크게 정색을 하며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방글라데시는 공장의 잇단 대형 참사로 인해 수출 가공 지역 내에도 노조 활동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는 법률이 재정되었다.
하지만 외국계 입주 기업주들의 비협조와 눈치 보기에만 급급한 정부의 무관심한 태도로 인해 실제로 노조가 결성된 곳은 없었다.
진혁이 사정을 짐작하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공장장님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노조는 절대 나쁜 게 아닙니다. 공장 직원들의 의견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회사의 방침을 전달하고 함께 공유하는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그냥 빅보스께서 결정하시면 저희는 따르겠습니다. 뭐든 지시만 내려 주십시오.”
거듭된 리즈비의 고사에 진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공장장님이 크게 착각을 하고 있는데 이 공장의 주인은 제가 아닙니다.”
“……?”
“직원들이 여기 공장의 주인입니다. 이곳에서 생산한 상품을 사 주는 무슬림, 더 나아가 세계인들이 주인이란 말입니다. 전 관리인일 뿐입니다. 스스로 왜 주인이기를 포기하시는 겁니까? 무슬림들이 만들어 줬고, 직원들이 운영하는 공장입니다. 그걸 왜 남에게 맡기고 모른 척하시려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반대를 위한 노조가 되라는 게 아닙니다. 저나 여기 권 사장님이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인을 놔두고 현지인인 리즈비 공장장님을 모신 겁니다. 직원들과 함께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더 많이 팔리는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십시오. 도와주셔야 합니다.”
리즈비의 얼굴이 탄복으로 물들었다. 비단 그만이 아니라 샤물도 마찬가지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빅보스의 깊은 뜻을 곡해했습니다.”
“우리 그룹의 모토는 ‘상생과 공존’입니다. 이 공장은 누구 하나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저와 직원분들 모두가 함께 꾸리고 살아가는 곳입니다. 아픔이 있으면 함께 이겨내고 기쁨은 서로 나누는 곳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 역할을 노조가 해 주셨으면 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빅보스의 뜻을 직원들에게 전하고 노조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권 사장님은 노조가 결성되면 노사협력체를 결성해서 직원들이 즐겁게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십시오. 필요하다면 선 시행 후 보고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이 공장이 세워지기까지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그 도움에 보답하는 길은 세계 어느 공장보다 더 잘 운영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수익을 내서 어려운 분들을 도와줍시다. 우리라고 언제까지 도움만 받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회장님이 그렇게 믿고 맡겨 주신다면 죽을힘을 다해 최고의 공장이 되게 하겠습니다.”
“저와 직원들도 혼신의 힘을 다해 돕겠습니다.”
권영호와 리즈비가 결의를 다졌다.
공장을 나선 진혁은 샤물이 운전하는 차를 차고 시내로 이동했다.
“샤물, 일은 할 만하냐?”
“재미있습니다. 사, 아니, 회장님.”
사장님이란 말이 입에 붙어 샤물은 아직도 어색해했다.
“사람은 익숙해지면 금방 나태해진다.”
“예, 회장님.”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내가 세계 곳곳의 시장을 넓혀 가는 것은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서다. 고인 물은 썩는다. 너 역시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널 공장에 묶어 두지 않고 양쪽을 오가게 한 건 그 이유 때문이다.”
“어렵습니다, 회장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다만, 그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는 것만은 잊지 마라.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내가 하는 일은 그중 천만 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샤물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꼭 알아야 할 말이기도 했다.
코트라 근처 빌딩에 AA 화장품 사무소가 있었다.
진혁은 공장과는 별도로 시내에 사무실을 따로 두어 여러 가지 행정 업무를 맡게 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고생 많습니다, 김 부장님.”
인사하는 이는 태후물산 카이로 지사 시절 같이 근무했던 김동식이었다.
손민한의 부탁으로 한국에서 반백수로 있던 그를 이곳의 무역 담당 부장으로 임명했다.
업무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어차피 공장의 서브 역할로 정해진 수출입 업무만 처리하면 되는 자리라 받아들였다.
차를 내놓고 돌아가려는 아노아르를 불러 세웠다.
“아노아르, 일은 배울 만해?”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회장님.”
“빨리 배워야 한다. 너희들이 해 줘야 할 일이 많다.”
“네.”
다소곳한 목소리로 돌아가는 아노아르를 보는 김동석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진혁이 물었다.
“아노아르의 일 처리가 어떻습니까?”
“솔직히 거의 백지나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에서 배웠다고 하지만 실무 경험이 없어 가르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차라리 경력자를 채용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당장은 그게 편할지 모르지만, 길게 보면 또 다릅니다. 힘드시겠지만 잘 가르쳐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여전히 김동석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