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코이카, 김연희
저녁은 코트라의 이영석 소장과 먹었다.
“요즘 어딜 가나 AA 화장품 공장에 대해 이야기들을 합니다.”
“겨우 공장 하나 들어선 건데 그렇게 관심들을 가져 줄지는 몰랐습니다.”
“단순한 공장이 아니지요. 총리께서 직접 나서서 유치한 공장인 데다 임금은 물론 복리후생도 최고 수준이니까요.”
“당연히 받았어야 할 권리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BGMEA가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BGMEA는 방글라데시 의류제조수출업체협회로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이익 단체였다.
공장주들이 회원인데, 현지인 공장 대부분은 정계 인사들의 가족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공장의 잇단 사고로 미국이 최빈국 특혜 관세 혜택을 축소하려고 하자 주춤하기는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 직접 투자를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방글라데시에서 외국인 투자까지 막는다면 무슨 돈으로 개발하겠다는 겁니까?”
“외국인 직접 투자를 반대하는 이면에는 외국 기업 진출 확대에 따른 임금 상승 우려, 나아가서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가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참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자국민을 위하는 일이고 결국 그게 자신들의 사업에 도움이 될 텐데…….”
참으로 답답했다, 왜 그렇게 자기들 생각밖에 없는지.
“모두가 회장님같이 넓게 보지는 못하지요. 아무튼 현재 분위기도 그렇고, 의류 업종이 아니라 대놓고 반대는 못 하지만 주의는 하셔야 합니다.”
“끙. 알겠습니다.”
외국에서 사업하면서 현지 업체들과 일부러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막 일어나려는 순간 다가오는 여인이 있었다.
바로 진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십시오, 회장님.”
이영석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말렸다.
“아니, 김 소장님.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요. 그냥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이거 참…….”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에 이영석도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진혁의 눈치를 봤다.
“누구십니까?”
“코이카의 김연희 소장님이십니다.”
“아, 일단 앉읍시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공적 개발 원조(ODA) 예산으로 정부 무상 원조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진혁도 알고 있었다.
방글라데시는 재정의 20% 수준인 20억 달러를 ODA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한국도 일본, 미국 등에 이어 일곱 번째로 많이 지원하고 있어 현지 사무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진혁은 이영석이 따라 준 물을 마신 김연희가 감정을 추스르기를 기다렸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미르푸라는 곳에 코이카에서 운영하는 ‘한국・방글라데시 협력 직업 훈련원’이 있습니다. 의류를 포함한 여섯 개 학과를 운영하고 있는데, 의류 관련 기계들이 고장 나서 실습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어요.”
“기계가 한 대뿐인가요?”
“그건 아닌데 한두 대씩 고장 나다가 최근에는 남아 있는 기계마저 멈춰 버렸어요.”
“그때그때 고쳤어야지요!”
“회장님, 거기에는 사정이 있습니다.”
호통 치는 진혁에게 이영석이 ODA 지원의 실상을 들려주었다.
“각국에서 발표하는 ODA 지원금에는 허상이 많습니다. 꼭 필요한 것들도 있지만 자국에서 쓰다 남은 기계들을 보내면서 금액을 부풀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설치하면서 가르쳐 주는 게 전부다 보니 고장이 나도 어디가 문제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부품을 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코이카 창고에는 각국에서 보내온 장비가 가득하지만 관리 노하우 전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먼지만 쌓여 있습니다. 제가 부임하고 이런 식의 하드웨어 원조보다 교육, 훈련 같은 소프트웨어 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교육을 시키고 있는데…… 실습할 수가 없게 돼서 무조건 찾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소리부터 질러서 제가 더 죄송합니다.”
진혁도 같이 머리를 숙였다.
“관련 예산이 전혀 없습니까?”
“무상 원조 기간이 끝나서 유상 원조로 지원해야 하는데, 방글라데시 정부에서는 예산이 없다고 문을 닫으라고만 해요.”
“코트라 쪽은 어떻습니까?”
“한인회에서 그간 이런저런 지원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자금에 한계가 있다 보니 이걸 도우면 다른 곳의 지원을 줄여야 하는데, 그쪽도 어렵긴 마찬가지라 쉽지 않습니다.”
“오래된 기계라 어렵게 일본 기술자를 수소문해서 겨우 찾아냈습니다. 사정사정해서 오신다는 허락은 받았는데 경비를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한 번만 도와주세요.”
김연희 간절한 표정을 보고도 진혁은 쉽게 답을 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런 식의 일회성 도움은 미봉책일 뿐이었다.
이영석에게 물었다.
“이곳에 도산하는 의류 업체들은 없습니까?”
“없긴요. 세계 경기 불황의 여파는 오히려 이곳이 더 심합니다. 자국 공장 근로자가 우선이라 해외 사업장부터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럼 중고 기계들이 많이 나오겠군요.”
“그렇지요. 그런데 그건 왜……. 혹시?”
“맞습니다. 고치느니 차라리 바꾸는 게 낫습니다. 고쳐도 다시 고장 날 확률이 높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만 중고라도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돈 걱정은 말고, 좀 더 주고라도 설치된 지 5년 이내의 기계로, 가장 널리 쓰이는 모델로 구해 주세요. 그래야 고장 나도 바로 고칠 수 있잖습니까.”
“알겠습니다. 아주 튼튼한 놈으로 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김연희가 다시 벌게진 눈으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소장님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저 역시 교육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6・25 전쟁 후 힘든 시기에 자신들은 굶으면서도 어떻게든 자식들 교육을 시키신 우리 부모님들이 있어 대한민국이 이처럼 부강해진 것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ODA 역사상 가장 단시간에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바뀌었다며 가는 곳마다 칭찬을 들어요. 그럴 때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운인지 느껴져요.”
“교육은 부강한 나라보다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일수록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있습니다. 그런 희망이 힘든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
갑자기 말을 멈추고 생각하는 진혁의 모습에 이영석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잠시 생각나는 곳이 있어서요. 기계를 알아보는 데 얼마나 걸리시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지만 그래도 며칠은 주셔야 합니다.”
“잘됐습니다. 그동안 김 소장님은 저랑 다녀오실 곳이 있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두 사람과는 상관없이 진혁의 머릿속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 * *
다음 날, 진혁은 김연희와 함께 팔락이 운전하는 택시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조수석에는 샤물이 앉았다.
차는 걸어가는 게 빠를 정도로 기어갔다.
도로 곳곳이 비포장인 데다 자전거를 연결한 인력거 릭샤, 구걸하는 아이와 노인은 물론 승용차, 오토바이와 뒤엉켜 앞길을 방해했다.
“어째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두 번의 의류 공장에서 일어난 큰 사고의 여파가 아직도 가시지 않아서예요. 열악한 근무 조건에 항의하는 노동자의 시위가 아직도 진행 중이거든요. 불안을 느낀 기업들이 이곳 공장부터 정리하는 바람에 최근에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많아요.”
“그것참, 시위를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진혁은 입맛만 다셨다.
그나마 수도인 다카를 벗어나자 속도가 났다. 그래도 비포장도로라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쿠투팔롱 난민 캠프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난민들로 인해 콕스바자라 인근까지 난민 캠프가 넓혀져 있었다.
샤물과 교대로 밤새 운전해서 그나마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구.”
밖으로 나온 진혁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따라 내린 김연희의 표정도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힘든 여정이었다.
하지만 그걸 표현할 수는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 때문이었다.
세계 곳곳의 어려운 곳들을 전전한 김연희라 이곳이 난민 캠프라는 걸 금방 눈치챘다.
입구부터 높은 언덕까지 대나무로 얼기설기 세운 오두막들이 빼곡히 들어 서 있었다.
낯선 차량이 도착하자 나오던 파브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미스터 서.”
파브는 방글라데시 정부 서기로 지난번 방문했을 때 안내를 맡았었다.
악수를 하고 물었다.
“지난번보다 더 늘어난 느낌입니다.”
“라이나 왕비님의 도움으로 이쪽은 겨우 위기는 넘겼지만, 미얀마 쪽은 여전히 ‘인종 학살’이 진행 중이라 꾸준히 유입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네요.”
“어떻게든 버텨야죠, 이들에게는 여기가 막다른 골목인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파브가 말을 잇지 못했다. 딱한 사정은 아는데 방글라데시 정부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진혁이 부른 NS통신의 조나단 기자의 기사가 나가자 국제 사회가 관심을 보였지만 그때뿐이었다. 결국 다시 방글라데시 정부의 책임으로 돌아왔다.
답이 없는 이야기라 파브가 화제를 돌렸다.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난민 지도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지도자는 왜요?”
“그건 만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진혁의 말에 잠깐 고민하던 파브가 안내했다.
난민 캠프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파브가 주의를 줬다.
“난민들에게 다가갈 때는 매사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람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면 한동안 감정의 공백 상태에 놓입니다. 사소한 자극에도 공격적으로 변할 수 있어요.”
낯선 이방인에 시선을 돌렸지만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나 기쁨, 행복 등의 단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무표정 그 자체였다.
얼마간 안쪽으로 들어간 파브가 한 오두막 앞에서 멈추고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안으로 들어간 파브가 한참 만에 나왔는데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만나지 않겠다는 걸 지난번에 도움을 준 분이라고 설득해서 겨우 허락을 받았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안으로 들어가자 와이셔츠 차림의 중년 남성이 맞았다.
“시에드 울라라고 하오.”
“서진혁입니다.”
변변한 탁자도 없어 바닥에 둘러앉았다. 아내로 보이는 이가 잔을 내왔는데 맹물이었다.
“대접할 거라고는 이것밖에 없소.”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진혁이 단숨에 비웠다.
상대는 첫 질문부터 날카로웠다.
“우리가 안 죽고 살았나 확인하러 온 것이오?”
“이보시오, 시에드.”
“괜찮습니다.”
말리는 파브를 제지하고 진혁이 말을 받았다.
“제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시에드 씨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그럴 시간도 없습니다.”
“그럼 왜 온 것이오?”
“저 아이들 때문입니다.”
진혁이 겨우 천으로 가려진 작은 방의 커튼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아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녀와 그보다 어린 사내아이였다.
물을 내놓았던 여인이 놀란 얼굴로 그들을 서둘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제 공개적으로 아이들을 데려다 팔아먹겠다는 것이오?”
시에드가 당장 화난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진혁은 몰랐지만 이곳 난민 캠프에서도 여성에 대한 성폭력 피해가 심각했다.
삶이 열악해지면 윤리 도덕도 땅바닥에 떨어진다.
영국 BBC 방송에 보도될 정도로 로힝야 난민 소녀들이 인신매매를 당하고 성매매 업소로 넘겨지는 경우도 있었다.
미얀마 군인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된 여성들이 아이를 낳게 되면서 또 다른 문제도 야기되고 있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김연희가 나섰다.
“코이카 김연희 소장입니다. 이곳의 사정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전에는 시리아에 있었습니다. 남수단과 가나에서도 난민 캠프에 봉사를 나갔었고요. 서 회장님은 돕기 위해 왔어요.”
“우릴 적선하듯 돕는 척하다가 떠나버리는 그런 도움은 필요 없소. 우리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돌아가시오.”
“무얼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밖에 나가서 당신 이웃들의 표정을 보십시오. 살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입니까? 숨만 쉬고 있다고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에드가 따지듯이 소리쳤다.
“그게 우리 탓이오? 여기까지 쫓겨 온 게 우리 잘못입니까?”
진혁의 목소리도 차가워졌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게 그곳 국민들의 잘못입니까? 성토한다고 전쟁이 멈춥니까?”
“뭐요?”
“누구의 잘못인지는 아무도 관심 없습니다. 왜? 내 일이 아니니까요.”
“…….”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번에 도운 것은 라이나 왕비님의 청 때문이었을 뿐입니다. 시에드 씨가 죽든지 살든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에 죽어 가는 이들이 한둘입니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