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피어나는 음모
진혁이 노려보는 시에드를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넋 놓고 있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무슨 죄입니까? 어른들이야 살 만큼 살았으니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남겨진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겁니까. 당신처럼 여기저기 쫓겨 다니다가 또 비참하게 죽기를 바라십니까?”
“말이 지나치시오!”
“지나치긴 뭐가 지나칩니까? 거울에 지금 당신 얼굴이 어떤지 비춰 보십시오! 먹지 못하면 육체가 죽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잃으면 정신이 죽습니다. 당신과 이곳 어른들의 정신은 죽어 있습니다.”
시에드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신은…… 당신은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없다면 만들어야지요. 그게 당신이 자식을 낳은 죄입니다. 자식에게 희망을 물려주지 못한 죗값입니다. 당신이 죄인인데 누굴 원망하고 탓하십니까? 돌아갑시다.”
벌떡 일어나려는 진혁에게 시에드가 급히 물었다.
“제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오? 아이들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합니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빼앗지 마십시오.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당신들이 그들에게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
“직업 학교를 세워서 기술을 가르칠 겁니다.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어른이 되면 일을 할 수 있게 준비시킬 겁니다. 이웃들에게 이야기해서 아이들의 꿈을 막지 말아 달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온 겁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진혁이 일어나 나갈 때까지 시에드는 허공만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진혁이 파브에게 말했다.
“학교를 세워서 운영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위에 건의는 해 보겠지만 언제 예산이 내려올지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돈은 제가 댑니다. 행정적인 부분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그럼 상관없습니다. 저도 자식 키우는 입장이라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거든요.”
김연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설립 비용뿐만 아니라 매달 운영비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중간에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 여기 샤물에게 말씀하시면 최우선적으로 처리해 드릴 겁니다.”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마워하지 마십시오. 최 소장님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최선은 다해 주십시오. 그게 어른인 우리가 이곳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 뒤 다카로 돌아온 진혁은 ‘로힝야 직업 학교’를 세우는 문제로 한동안 바쁘게 움직였다.
* * *
식당의 VIP 룸으로 들어선 하윤 회장이 멈칫했다.
무역부 부장 허융이 식사나 하자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 자리였다.
룸에는 허융 말고도 두 명이 먼저 와 앉아 있었는데 국가안전부 리정팅 부부장, 장이 남한 대사였다.
이런저런 공산당 행사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 안면들이 있었다.
서로 간단한 인사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하윤은 음식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중국 최대 전자 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마의 회장으로 아시아 갑부 순위 1~2위를 다투는 하윤이지만, 그 역시 기업가로 정부의 입김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특히나 중국은 여전히 공산주의 국가였다.
공산당이 폐쇄적인 조건을 내걸어 해외 업체들이 직접적으로 중국에서 쇼핑몰 서비스를 못하게 막는 정책 덕에 알리바마의 안정적이고 급속한 성장이 가능했다.
식사가 끝나자 허융이 리정팅에게 물었다.
“뤄화칭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거야 주석님의 의중에 달려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뤄화칭뿐만 아니라 태자당 전체가 숨죽이며 주석궁만 쳐다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윤은 마른 침을 삼켰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주석에 오른 왕칭린은 지금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 중앙정치국 상무 위원이였던 뤄화칭은 왕칭린이 주석에 오르기 전 최대 정적이자 뇌물 수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주방궈 전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와 정치적 동맹 관계였다.
지금 벌어지는 숙청 작업이 대중의 지지를 독차지하려는 왕칭린의 목적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전부 납작 엎드려있는 형국이었다.
테이블이 치워지고 차가 나오자 허융이 하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며칠 전 우핑 부총리께서 저우추취 전자 상거래 분야의 실적이 미미한 것에 대해 주석으로부터 질타를 들으셨습니다.”
“……!”
“부총리실로부터 조속히 대책을 수립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이커머스 기업인 베나토른을 20억 달러에 인수하는 협상을 진행 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성과가 나올 겁니다.”
“제가 보고받은 것과는 차이가 있군요. 원래는 10억 달러였던 매각 금액이 두 배가 됐고, 그마저도 경영권은 자신들이 갖겠다고 해서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리정팅의 질문에 하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룹 내에서도 핵심 인물 몇몇만이 아는 비밀 정보인데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윤이 이를 악물며 답을 했다.
“베나토른이 욕심을 부리고 있지만 조만간 그 문제는 해결될 겁니다.”
“하 회장님의 능력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에게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게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만나고 있는 이유이고요.”
허융의 이어진 말에 하윤은 어떻게 돌아가는 사정인지 깨달았다.
현재 당 간부들은 왕칭린 주석의 부정부패의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 모두가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우핑 부총리는 공청단 계열로 왕칭린의 상하이방과 반대파라 더 그러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서든 결과를 내놓아야 했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하윤의 허융에게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 주길 원하십니까?”
“우린 하 회장님께 무얼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기 위해 모인 겁니다. 리 부장께서 계획을 알려 주세요.”
기다렸다는 듯이 리정팅이 서류를 빼서 펼쳐 놓고 입을 열었다.
“베나토른이 과한 요구를 하며 버티는 것이 알쇼핑 때문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우리가 걸림돌을 치워 드리지요.”
“알쇼핑을 쉽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 화교 그룹과 연관되어 있고, 게다가 그들의 지지 기반은 중동에 있습니다. 거기는 또 요르단…….”
“라이나 왕비와의 친분 관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정팅이 끼어들어 말을 이어 갔다.
“서진혁 회장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났습니다. 지금 방글라데시에 가 있는 게 그분의 부탁으로 시작된 일임도 알고 있고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우선 화교 그룹과의 관계는 황쉐인 대인이 맡아 주시기로 했습니다.”
“객가인이 직접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자를 돕는 화교 그룹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양 화교’는 동남아 국가로 진출한 화교를 지칭하는 말로, 전 세계 진출한 6천만 명 이상의 화교 중 85% 이상이 이들이다.
남양 화교의 대부분은 중국의 남부 푸젠성과 광둥성 일대에 뿌리를 둔 객가(客家)인 출신이다.
황쉐인은 현 객가인의 가주로 하윤도 잘 알고 있었다.
초기 화교들에 비해 객가인의 장악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황쉐인이 직접 나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알쇼핑과 서진혁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전 화교를 상대로 싸울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동남아시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중동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하윤의 물음에 리정팅이 바로 답을 내놨다.
“아시다시피 알쇼핑의 주 고객은 무슬림들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테러를 벌이며 빈축을 사고 있는 IS와 그 뿌리가 같지요. 미국마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있어 무슬림에 대한 혐오도가 극에 달해 있습니다.”
“IS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외부의 시각 때문에 오히려 무슬림인들의 단결력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서진혁 회장이 있습니다. 아마존의 쑤피넷 인수 작업을 막은 이도 그입니다.”
하윤도 이미 서진혁에 대해 철저히 조사한 터라 강한 우려를 드러냈다. 하지만 리정팅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알쇼핑에 대해 조사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서진혁은 상사원으로 출발해서 통조림과 화장품 제조를 하면서 회사를 키웠더군요.”
“그게 서진혁 회장의 무서운 점입니다. 알쇼핑을 빼앗아 온다고 해도 제품 공급권을 가지고 있어서 속 빈 강정이 되기 쉽습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윤은 개인적으로 서진혁에 깊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존의 제크, 이베이 도널드 회장, 그리고 자신은 세계 전자 상거래 시장을 삼분하고 있지만 모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태생적인 한계였다.
하지만 서진혁은 달랐다.
그는 제조업을 기반으로 오프라인 시장을 선점하고 영역을 전자 상거래로 넓혀 왔다.
인터넷 환경이 열악한 중동과 동남아시아에서 선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런 하윤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리정팅이라 준비한 마지막 패를 내놓았다.
“서진혁이 제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조사하면서 몇 가지 의문스러운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어떤 점이 말입니까?”
“이 자리에서 전부를 말씀드릴 수는 없고, 서진혁이 최근에 전쟁 중인 인도와 파키스탄 군에 통조림과 의약품을 납품하게 됐습니다. 그것도 동시에 말입니다.”
“설마?”
“짐작이 맞으실 겁니다. CIA의 묵인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비공식적이지만 리비아의 시민군, 시리아 반군에도 그가 물건을 납품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
“앞에서는 세계 평화를 외치는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뒤에서는 CIA를 이용해 중동의 전쟁을 부추긴다는 세간의 의심을 확증시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서진혁이란 자입니다.”
하윤의 얼굴이 다시 잔뜩 굳어졌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리정팅은 비열한 정치 놀음으로 서진혁이란 뛰어난 사업가를 무너트리려 하고 있었다.
하윤의 침묵이 자신들의 계획에 동조하는 것으로 여긴 허융이 처음으로 장이 남한 대사에게 물었다.
“남한에서의 공작은 어떻게 준비되고 있습니까?”
“태후 그룹의 후계자인 정호영을 적임자로 선정해 작업 중에 있습니다. 의외로 서진혁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더군요. 우리의 신호에 맞춰 적대적 M&A를 시작하겠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이번 남한의 작업은 단순히 서진혁이란 자 하나를 죽이자고 벌이는 공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권성일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남북이 가까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원하는 모양이 아닙니다.”
“한국은 이미 우리나라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태후 그룹은 이곳에 공장과 매장을 가지고 있으니 딴 마음을 품지 못할 겁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정호영에 대한 공작 과정은 모두 증거 자료를 남기세요. 나중에 쓸 곳이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하윤의 허융의 치밀함에 가슴에 서늘함을 느꼈다.
이들은 한국에서 서진혁을 무너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호영의 치부를 이용해 향후 태후 그룹마저 조종하려고 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식당을 나서는 하윤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계속해서 신경을 건드렸던 알쇼핑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기쁨은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서진혁이라는 뛰어난 경쟁자가 어이없는 정치 놀음의 희생양으로 사라지는 게 너무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자신은 그걸 막을 힘이 없었다.
그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 * *
로힝야 직업 학교 개소식에 참석하고 인도네시아로 돌아온 진혁은 선병식에게 AA 사업 전반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다들 열심히 해 주고 있어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오후에는 공장 견학을 가기로 하고 우선 점심을 먹기 위해 함께 호텔 식당으로 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선병식에게 말했다.
“AA 화장품 권 사장님께는 말씀드렸습니다만 로힝야 직업 학교에 대한 지원은 최우선적으로 처리해 주십시오.”
“이야기 들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부족함 없이 지원하겠습니다. 그런데 다음 일정을 어떻게 준비할까요?”
“라이꾸두 회장님만 뵙고 바로 한국으로 건너갈 생각입니다. 몇 번 연락이 왔었거든요.”
“라이꾸두 회장님은 외국에 나가셔서 안 계십니다.”
“무슨 일 있으시답니까?”
“긴급 화교 회의가 태국에서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임텍 회장님도 함께 가신 것으로 압니다.”
긴급 화교 회의? 왠지 느낌이 싸했다.
“의제가 뭐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