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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31화 (131/307)

131화. 절망 속에 핀 꽃

“거기까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조사해 볼까요?”

“아닙니다. 나중에 뵈면 여쭤보지요.”

음식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진혁이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먼저 식사를 마친 진혁은 커피가 나오는 시간을 이용해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화장실 앞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어? 요한슨 지점장님?”

“회장님.”

JK모건의 요한슨 싱가포르 지점장이었다.

진혁이 예의상 물었다.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회장님 때문이지요.”

“저 때문이라니요?”

“에이, 모른 척하시기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 태국의 화교 회의도 알리바마의 본격적인 동남아시아 진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면서요?”

“……!”

“젯다의 스미스에게도 전화가 왔었습니다. 아마존의 준비팀이 도착해서 이미 작업 중이라던데요. 알쇼핑 매각을 매킨리에 맡긴 게 의외시라면서 서운해하더군요.”

요한슨은 몇 마디 더 하고 자리를 떴지만, 진혁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적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화장실에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자리로 돌아온 진혁의 잔뜩 굳은 얼굴에 선병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조금 피곤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동안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시느라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가시면 신혼 생활도 즐기시고 좀 쉬다가 오십시오. 회장님만을 바라보는 직원들을 생각해서라도 건강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 일정은 사장님이 알아서 진행하시고, 전 호텔에 가서 좀 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선병식을 돌려보내고 호텔방으로 들어선 진혁은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진혁은 지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처음에는 선병식에게 말하고 함께 대책을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화교 그룹 회의가 소집되고 요한슨이 알 정도라면 알리바마에서 확신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거기에 중동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사태가 심각했다.

선병식에게 알렸다가는, 그는 물론 그룹 전체가 요동을 칠 상황이었다. 그러기 전에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방글라데시에 집중하느라 큰 것을 놓치고 말았다.

* * *

리야드 공항에 도착하자 카심과 세나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미스터 서.”

“가시지요.”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던 카심은 진혁의 딱딱한 표정에 입을 닫았다.

비록 최근에 떨어져 있었다지만 진혁을 가장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본 카심이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고 세나위만 데리고 오라고 할 때부터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심각한 일이 발생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 *

까칠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잭슨은 넥타이부터 풀어헤쳤다.

“빌어먹을.”

입에서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방금 풀어헤친 넥타이처럼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며칠째 대책 회의가 이어졌지만 결론은 언제나 한가지로 귀결됐다.

살인멸구(殺人滅口).

죽여서 입을 막아야 한다는 게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제임스 지부장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회의를 할 필요도 없었다.

‘빌어먹을 놈.’

다시 한번 욕설을 하며 안으로 들어서던 잭슨의 손이 본능적으로 품 안으로 들어갔다.

낯선 사내가 몸을 돌렸다.

“오랜만이오.”

방금까지 자신이 욕했던 진혁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남의 방에 먼저 들어왔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요.”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여길 기어들어와?”

“우리가 언제 상황 따져서 만났습니까? 일단 앉읍시다.”

진혁이 마치 주인이라도 된 양 먼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이미 술이 세팅되어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잭슨이 맞은편에 앉았다.

진혁이 글라스에 잔을 채워 내밀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건배부터 하시지요.”

“지금 건배하자는 말이 나와?”

챙!

“치얼스.”

잭슨의 으르렁거림을 무시한 진혁이 혼자 잔을 부딪치고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얼마 동안이나 막아 줄 수 있습니까?”

“……이미 한계야.”

노려보며 묻는 진혁의 눈동자를 피하며 잭슨이 어렵게 답했다.

이미 다 알고 온 모습이라 솔직하게 밝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생사의 고비를 같이 넘으며 목숨의 빚까지 진 진혁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일주일만 시간을 벌어 주십시오.”

“중국 정부 차원에서 벌인 공작이야. 네 능력을 모르진 않지만, 개인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압니다, 제가 막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그래도 최소한 정리할 시간은 주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

“잭슨 씨.”

“일주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진혁은 잔을 채워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잭슨은 그런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쨍그랑!

애꿎은 잔이 벽에 부딪혀 깨졌다.

잭슨은 그날 처음으로 CIA에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 * *

인천 공항에 도착한 진혁은 보안 요원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잔뜩 굳은 얼굴로 국정원 김상균 차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시간이 촉박해서 전체적인 내용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장이 대사와 태후 에너지 정호영 부사장이 은밀히 만남을 가진 것은 확인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CIA에서 회장님을 출국 금지 시켜 달라는 요청도 들어왔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죄송합니다만 아직은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곧 아시게 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일어서서 나가는 진혁을 김상균도 잡지 못했다.

그만큼 진혁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항상 웃는 얼굴로 거칠 것 없던 활기찬 표정이 아니었다.

진혁이 왕십리 집으로 들어선 것은 10시가 넘어서였다.

강남의 AK 본사에서 고용준 총괄 사장을 비롯한 계열사 사장들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고 같이 저녁까지 먹느라 늦었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의외로 장모 박연심이었다.

지현은 공무원 시험이 임박해서 고시원으로 갔다고 들었다.

“언제 오셨어요?”

“한참 됐네. 이렇게 떨어져 살 거면 왜 결혼했는지. 쯔쯔쯧.”

“엄마.”

지민이 뒤에서 한 소리 했지만 진혁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두 달 만에 돌아오는 길이라 그런 소리를 들어도 쌌다.

가져온 선물을 건네주고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진혁이 거실로 나가려다가 멈췄다.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바라봤다. 혹여라도 얼굴이 굳어 있을까 걱정이 됐다.

다행히 회사에서 일부러 웃는 얼굴을 유지한 덕분인지 표정이 괜찮았다.

밖으로 나오자 지민이 과일을 준비한 채 장모님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모녀의 대화를 들으며 진혁은 간간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아직도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알쇼핑은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아니, 자신만이 아니라 알라딘 그룹 모든 종사자들의 생계가 달려 있었다.

알쇼핑만이라면 포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철저했다. 거기에 한국의 사업마저 노리고 있었다.

자신을 철저히 무너트리겠다는 계획을 짠 놈들이 나머지 사업을 순순히 남겨 둘 리 만무했다.

하지만 상대는 중국 정부였다.

거기에 CIA마저 자신에게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며칠째 고민해 봤지만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늦었네. 난 그만 들어가서 쉬겠네.”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진혁의 모습에 장모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이 정리를 하고 침대에 온 것은 12시가 다 되어서였다.

품에 파고드는 지민을 안았다.

“나 없는 동안 고생 많았어.”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가 제일 멋있는 것 알아요. 제 걱정은 말고 원하는 일을 하세요.”

지민을 안은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언제나 자신을 먼저 생각해 주고 편하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이번 주말에는 강릉에 갔다가 제주도까지 들렀다가 옵시다.”

“다들 좋아하시겠지만…… 시간이 되겠어요?”

지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진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느껴져서였다.

지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빠보고 올라오시라고 할게요. 엄마도 여기 계시니 그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내가 내려가야 하는데…….”

“아빠도 당신이 큰일을 한다며 집에서만이라도 편하게 해 주라고 말씀하셨어요. 이해하실 거예요.”

“그건 좀 더 고민해 봅시다. 그런데 장모님은 무슨 일로 와 계신 겁니까?”

“잠시만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침대에서 일어난 지민은 화장대 서랍에서 무언가 꺼내와 건네줬다.

“이게 뭐……. 어?”

초음파 사진이었다.

“10주 됐대요.”

지민의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자신의 삶의 목적이었던 바로 그 아이, 희수.

미안해서 과거로까지 돌아와 행복을 찾아 주겠다며 다짐하게 했던 딸이 마침내 그 모습을 이렇게 보여 주고 있었다.

“끼야아호!”

“목소리가 너무 커요. 어머, 이이가 미쳤나 봐.”

“하하하하하.”

지민이 발버둥을 쳤지만, 그녀를 번쩍 안은 진혁은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웃으며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박연심이 놀라 방문을 열었다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고는 돌아갔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 아파트 놀이터.

진혁이 놀이 기구에 걸터앉아 있었다.

자신에게 안긴 지민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잠든 모습을 보고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 나타난 아이.

그 아이를 보면서 진혁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물론 지금의 아이가 희수일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태어날 아이를 희수라고 생각하며 과거의 잘못을 씻고자 마음먹었다.

전생에서도 회사 일에 미쳐 소중한 희수를 잃어 놓고도 다시 사업에 정신이 팔려 무엇이 소중한지를 잊고 살았다.

AM의 카심, 소마야, 핫산, 갈리, 하마드 그리고 아자데와 마르와. 자신과 함께 알쇼핑과 알라딘 그룹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이었다.

AK의 김상조, 권기남, 박이동, 신용찬, 노선기, 고용준,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한상국까지. 어느 누구 하나 사연이 없는 이가 없었다.

아픈 과거를 가진 만큼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AA에는 선병식과 밤방, 방글라데시의 권영호 사장과 샤물이 있었다.

하나하나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진혁은 그들 모두 자신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들이고, 그들도 자신만큼이나 알라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으로는 그들을 믿는다고 해 놓고는 실제로는 모든 일을 자신이 주도하려고 했었다.

지금까지 고민해 왔던 것들 역시 자신의 그런 잘못된 욕심에 기인함을 깨달았다.

욕심을 버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수많은 고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태어날 아이에 대한 행복한 기대로 채웠다.

어느새 진혁의 얼굴에는 그늘 대신 웃음이 피어나 있었다.

무심코 담배를 빼어 물던 진혁이 피식 웃으며 담배를 다시 넣었다.

“내 아이를 위한 첫걸음은 이것부터 끊는 것으로 해야겠군.”

일어난 진혁은 가까운 휴지통에 담뱃갑은 물론 라이터까지 버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 * *

재계 5위 TG 그룹 본사 회의실이 내외신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홍보실을 통해 중대 발표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왔다.

모인 기자들끼리 오늘 발표 내용에 대해 추측성 의견에 나눠 봤지만, 다들 무슨 내용인지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웅성거리던 회의장으로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앞선 이는 주명근 명예 회장이었다.

3년 전 아들인 주경운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었다.

놀란 표정의 기자들 앞에선 주명근 명예 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렇게 많이 찾아오셔서 감사합니다. 발표에 앞서 귀한 분을 먼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알라딘 그룹의 서진혁 회장님이십니다.”

기자들이 일제히 술렁거렸다. 최근 급격히 부상한 서진혁에 대해 모르는 기자는 없었다.

지목받은 진혁이 난감한 표정으로 주명근 회장 옆에 서며 투덜거렸다.

“회장님이 이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늙은이에게 짐을 떠맡기시고 뒤에 빠져 계시면 안 되지요.”

“이번만입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주명근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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