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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33화 (133/307)

133화. 제주도의 일상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의 바닷가가 보이는 언덕 위.

한 사람이 그곳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혁이었다.

“벌써 겨울이군.”

12월이 며칠 남지 않아 내륙은 본격적으로 겨울로 접어들었다.

추수가 끝난 들판이 황량하지만 이곳 제주는 봄 날씨 같아 월동채소들이 한창 자라고 있었다.

3,000평이 넘는 토지에는 양배추가 빼곡히 심어져 알차게 크고 있었다. 태풍이 비켜 간 데다 일조량과 강수량도 적당해 대풍이 기대됐다.

“참 빠르네. 여기 온 지 벌써 2년이나 지나다니.”

알라딘 그룹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발표를 하자마자 제주도로 내려왔다.

수많은 곳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진혁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알라딘 그룹 직원들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았다.

세월이 약이란 말이 맞는지 시간이 지나자 서진혁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갔다.

“잊혀졌으니 이제 조금씩 움직일 때가 됐군.”

그의 뇌리 저편의 기억에 의하면 이때쯤 서서히 폭풍이 불어왔다.

개중에는 좋은 일도 있고, 안 좋은 일도 있었다.

물론 안 좋은 일이라고 해서 그에게도 나쁜 일인 것은 아니었다.

‘빚은 갚아 줘야겠지.’

펜션에 도착하자 떠들썩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셨어요.”

“아이구, 우리 예쁜이.”

지민이 다가와 인사를 했지만 무시한 진혁이 언니들 틈에 끼어 놀고 있는 혜주에게 다가가 번쩍 안아 들려고 했다.

짝!

등짝에 전해지는 아픔에 진혁은 동작을 멈췄다.

“나갔다 오면 손부터 씻으라고 했잖아요!”

지민이 쌍심지를 켜며 노려보고 있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욕실로 향하는 진혁의 뒤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는 바보 같아. 맨날 아줌마한테 혼나면서도 또 그래.”

“그래서 난 장가 안 갈려고. 제게 뭐야.”

“조그만 게. 여자애들도 너 싫다고 하거든.”

막내 예솔이의 말에 한 소리 더 했던 보람이를 첫째 빛나가 나무랐다.

이들은 패션에 딸린 독채에 세 들어 살고 있는 귀농인 이수호 씨네 아이들이었다.

진혁이 제주도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세동은 대통령 국가 안보 특별 보좌관이 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덕분에 진혁 부부가 펜션을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다.

부리나케 샤워를 하고 나와 혜주를 번쩍 안아 들어 입을 맞췄다.

“우리 예쁜이, 오늘도 재미있게 놀았어?”

“언니, 오빠, 좋아.”

“아빠는?”

“빠빠도 좋아.”

“아빠는 혜주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안는 것만으로 부족해 어깨에 무등을 태우고 함박웃음을 짓는 진혁과 깔깔거리며 좋아하는 혜주의 모습에 지민의 얼굴에도 미소가 맺혔다.

그러나 그들 가족을 바라보는 함난숙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웠다. 그녀는 아이들의 엄마로 이수호의 처였다.

이수호도 진혁만큼이나 아이들을 좋아했다.

아이들에게 행복한 환경을 만들어 주겠다고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제주도로 내려왔는데,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틈틈이 날일을 다니는 이수호는 집에 들어오면 녹초가 되어있었다.

피곤함에 씻고 바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내일 또 새벽같이 일어나 농장을 둘러보고 날일을 나가야 해서였다.

함난숙이 펜션의 일을 도와주고 받은 돈으로 겨우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었다.

함난숙은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우리는 이만 갈게요.”

“밥 먹고 가. 수호 씨도 늦는다며?”

“정리할 게 있어서요. 얘들아, 집에 가자.”

그녀는 더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채근해서 돌아갔다.

“나도 가. 가.”

혜주가 짧은 말로 언니, 오빠를 따라가겠다며 떼를 썼다. 진혁이 억지로 달래며 지민에게 말했다.

“식사라도 하고 가시라고 하지.”

“그렇게 말했는데 마음이 편치 않은가 봐요.”

“무슨 일 있대?”

“애월리 농장 주인이 결국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땅을 팔았나 봐요.”

애월리 감귤 농장은 이수호가 3년 전부터 임차해 관리해 오던 곳이었다.

그동안 관리를 하지 않아 망가져 있던 농장을 이수호 부부와 아이들까지 나서서 전정부터 시작해 관수 시설까지 모두 새롭게 꾸며 놓아 어느 농장보다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내년부터 본격적인 출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뻐했는데…….

임차 농의 한계였다.

“그래서 다른 곳을 알아보고는 있는데 쉽지 않나 봐요.”

뒷말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사정이 짐작되었다.

지금 제주도는 농사 지을 땅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다.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중국 관광객으로 인해 그들이 이용할 숙박 시설과 식당을 계속 짓고 있지만 부족했다.

중국인들의 땅 구입도 급격히 늘어, 여의도 면적의 두 배가 넘는 땅이 그들의 소유로 넘어갔다.

땅 값도 뛰어 두 배로 올랐는데, 그것은 제주도 평균이고 관광지 주변은 열 배가 넘게 오른 곳도 많았다.

이전에 진혁은 카이로 지점의 경영권을 넘겨주는 대가로 받은 수익금 25억을 박이동에게 맡겨 제주도 땅을 사게 했는데 그게 지금 시가로 300억이 넘었다.

힘들게 농사짓기보다는 중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가게나 모텔을 지어 운영하는 게 수익이 훨씬 나았다.

제주도 귀농인들은 줄어든 농토와 비싼 땅값에 이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나왔던 진혁은 가로등 불빛 속을 터덜거리며 걸어오는 이수호와 마주쳤다.

“이제 오는 길이냐?”

“아, 형님.”

“늦었다.”

“서귀포 쪽 공사 일을 나갔는데 야간작업까지 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농부가 농사일을 해야 하는데…….”

“고생했다. 피곤할 테니 얼른 들어가 쉬어라.”

“예. 형님도 쉬십시오.”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집으로 걸어가는 이수호의 어깨가 오늘은 왠지 더 처져 보였다.

이수호는 자신의 블로그에 하루도 쉬지 않고 제주 일기를 적고 있는데 그 횟수가 1,500회를 넘어가고 있었다.

제주로의 귀농을 결심하고 쓴 첫 일기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도 기대와 희망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은 좌절과 절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의 글을 애독하는 이웃만도 3천 명이 넘었는데 진혁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일기를 보면서 진혁은 제주도와 제주도 귀농인들의 애환에 대해 훨씬 많이 알게 되었다.

이수호는 오늘도 피곤한 눈을 부비며 고단한 삶에 대한 소회를 일기로 남길 것이다.

그리고 또 새벽같이 일어나 자신의 농장을 둘러보고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공사 현장에 날일을 갈 것이다.

진혁의 생각에는 이수호같이 성실하게 열심히 사는 이가 행복한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질 못했다.

그게 답답했다.

* * *

연말연시 연휴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희준이었다.

진혁이 친인척이 아니면서 유일하게 방문을 허락한 이였다. 희준은 그사이 과장으로 진급해 있었다.

“회사 일이 한가한가 보다?”

“한가하기는. 아주 죽을 맛이다. 겨우 시간 빼서 온 거야.”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너 본 지도 오래고……. 암튼 그냥 바람 쐬러 왔어.”

평소와 달리 말을 버벅거리는 희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린 진혁이 작업모를 챙겨 들고 일어났다.

지민은 보채는 혜주를 데리고 마트에 가고 없었다.

“밭에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그래.”

양배추 밭에 도착한 희준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야, 여기는 대풍이네, 대풍. 속이 아주 꽉 찬 게 제대로 자랐어. 너도 이제 농부가 다 된 것 같다.”

“농부 좋아하네. 그냥 하늘이 도와서 고맙게 잘 자라 준 거야.”

“어떻든. 이 정도면 보나마나 특등급이다. 올해는 돈 좀 만지겠는걸.”

희준의 속 모르는 말에 진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직접 농사를 짓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풍년기근’이란 말이 있는데, 풍년이 들어 출하량이 많아지니 가격이 떨어져 농부의 수익은 줄어드는 현상을 의미한다.

작년에도 풍년기근으로 값이 폭락하여 출하를 포기하고 밭을 갈아엎은 농부들이 많았다.

올해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밭을 둘러보고 오자 지민이 돌아와 있었는데 처제인 지현이 함께 있었다.

“어? 처제도 왔네.”

“안녕하셨어요.”

“어쩐 일이야?”

“그냥 바람 쐬러 왔어요.”

“제주도가 바람이 많이 불긴 많이 부나 보네. 여러 사람이 바람 쐬러 오고. 암튼 잘 왔어.”

지현은 운 좋게 공무원이 되어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잘 지내셨죠?”

“예. 제수씨도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고마워요.”

지민이 희준에게 인사를 하고 딴청을 부리고 있는 지현을 툭 쳤다.

“넌 인사 안 해? 희준 씨랑 몇 번 만났잖아.”

“어……. 안녕하세요.”

“아, 네.”

굉장히 어색하게 인사하는 두 사람이었다.

진혁과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아아앙!”

혜주가 걸어오다가 넘어진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바람같이 달려가 혜주를 안아 들고 살펴보며 달랬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두 자매가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진혁은 혜주를 보며 희준과 TV를 봤다.

서로 진혁과 연관된 사업 이야기는 일부러 피하다 보니 대화거리가 많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는데 자꾸 힐끔거리는 희준의 행동에 진혁이 물었다.

“솔직히 말해. 너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지?”

“아니야.”

“알았어. 그럼 나 혜주 데리고 들어가서 잔다.”

“그게 아니라…….”

“두 분이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보네요. 저희가 일어날게요.”

“아닙니다. 제수씨도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지민이 일어나려고 하자 희준이 기겁한 표정으로 얼른 말렸다.

그런데 또 다시 머뭇거리는 모습에 진혁이 막 화를 내려는 순간 먼저 분통을 터트리는 사람이 있었다.

처제 지현이었다.

“아우, 답답해. 무슨 남자가 간덩이가 콩알만 해요?”

“…….”

“우리 둘이 사귀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하려고 같이 온 거예요.”

진혁은 물론 지민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래서 시선을 마주쳤는데 같은 표정이라 제대로 들은 게 맞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전혀 성격이 달랐다.

그래서 희준에게 물었다.

“정말이야?”

“어.”

“아니, 어떻게?”

“왜요. 우리 둘이 사귀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어요?”

따지고 드는 지현의 말에 진혁이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대신 지민이 지원 사격을 해 줬다.

“너 형부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니?”

“형부가 자꾸 우리를 이상하게 보잖아.”

“야, 그럼 아무 소리 없다가 갑자기 찾아와서 사귄다고 하는데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아, 몰라. 암튼 난 통보했으니 그렇게 알아.”

“그렇게 들어가는 게 어디 있어?”

방으로 향하는 지현을 따라 지민도 들어가자 진혁이 바로 희준을 다그쳤다.

“인마,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내가 뭘?”

“네가 여기 내려오면서 지현 씨 챙겨 주라고 했잖아. 그래서 가끔 전화하고 만나서 밥 사 주고 격려해 주고 그랬어.”

“그런데?”

“이야기해 보니 보기와는 달리 여리고 착하더라고.”

진혁은 기가 차지도 않았다.

“처제가 여리고 착해?”

“막내잖아. 그리고 여자가 저 정도 까칠하면 준수하지.”

“아주 콩깍지가 씌었구나.”

“좀 도와주라. 너도 장인어른께 허락받느라고 고생깨나 했잖아. 결혼식 때 뵈니 포스가 장난이 아니셨거든.”

“장난 아니시지. 넌 한 일 년은 고생해야 할걸?”

썩은 표정이 된 희준을 보니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미 마음이 기운 것 같고, 한편으로 생각하면 지현이 정도는 까칠해야 희준이 가정에 충실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희준이 다시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와줄 거지?”

“어허,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네. 처제랑 결혼하면 앞으로 나를 뭐라 부를지는 생각해 봤어?”

“……!”

“형님이라고 불러 봐.”

“안 해. 못 해.”

“오호. 그래? 알았어. 처…… 읍!”

방문을 향해 소리치는 진혁의 입을 얼른 막은 희준이 사정을 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으, 퉤퉤. 더러운 놈. 어디 제대로 불러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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