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또 다른 인연
“형……님.”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형님, 도와주십시오.”
“알았어, 동생.”
“고맙…….”
“앞으로 동생이 하는 거 봐서.”
“너, 이씨!”
“마누라, 잡시다.”
달려들려는 희준을 피하며 얼른 지민을 불렀다.
하지만 진혁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두 자매가 무슨 할 말이 많은지 결국 쫓겨나 희준이랑 자야 했다.
성산일출봉에서 새해맞이 해돋이를 보고 희준과 지현이 돌아가자 진혁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 * *
새해가 밝았지만 제주도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풍년기근’이 발생하여 결국 대표 작물인 양배추, 당근, 월동 무에 대한 산지 폐기가 결정됐다.
농협에서 농가의 신청을 받았는데 목표 대비 두 배나 몰려, 실사를 통해 선정해야 하는 슬픈 상황까지 이르렀다.
성난 농민들이 월동채소의 근본적인 대책과 보상금 인상을 요구하며 도청 앞에서 연일 집회를 벌이고 있었다.
반대편 도로에서는 중국 관광객들이 그 모습을 핸드폰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그날 밤, 거나하게 취한 이수호가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시위에 참석했다가 친한 농민들과 가볍게 한잔하고 헤어지려고 했는데 서로 가슴에 쌓인 게 많은 터라 울분을 토하며 먹다 보니 과음을 하고 말았다.
진혁이 잔디밭 파라솔에 앉아 있는 모습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형님. 늦었습니다.”
“많이 마신 것 같다.”
“마시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게 뭐 있겠냐. 그런데 그렇게 시위하고 술 마시고 행패부리면 대책도 세워 주고 보상금도 올려준다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하는 짓이 딱 똑같잖아. 작년이나 올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아? 너희들이나 도청 공무원들이 합심해서 방법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가 잘못이라며 남 탓만 하니. 쯔쯧.”
평소의 이수호라면 적당히 물러났겠지만 오늘은 술에 취해 감정이 격해 있었다.
바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라고 방법을 찾고 싶지 않은 줄 아십니까? 하지만 가진 게 없어 땅도 없고, 중간 도매상들은 온갖 농간을 부리는데 공무원이란 놈들은 오히려 그들을 비호하고, 중국인들만 모시는데 혈안이 되어 있으니 분통이 안 터지겠습니까?”
“지금 가진 게 없다고 자랑하는 것이냐?”
“형님 같은 자본가들은 우리 같은 소농들의 아픔을 모릅니다. 아니, 상관도 없으시겠지요.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문제없으신 분이시니.”
“여보!”
한껏 비아냥거리는 이수호를 향해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난숙이 남편의 늦은 귀가를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나와서 들은 모양이었다.
“이이가 미쳤나 봐. 어서 들어가요.”
“놔!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는 것도 모자라 날일까지 다녀야 겨우 식구들 굶기지 않는 우리한테 방법까지 강구하라고요? 우리한테 걷어 간 세금이라도 최소한 우리한테 써 달라고 요구하는 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만하라니까요.”
“형님 같으신 분들은 매년 피 말리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농민의 마음을 모르십니다. 빌어먹을 세상!”
“그만 가요. 죄송합니다.”
함난숙이 남편을 억지로 끌고 가며 사과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진혁의 뒤로 지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도 소란에 나온 모양이었다.
“수호 씨가 많이 힘든가 봐요. 술기운에 한 이야기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자식, 성깔 있네. 들어갑시다.”
안 좋은 소리를 들었음에도 지민의 어깨를 안고 들어가는 진혁의 얼굴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잠들지 못하는 진혁의 모습에 안겨있던 지민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좀 전에 들은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요?”
“아니.”
“그럼 수호 씨 걱정해요?”
“당신이랑 혜주 생각하고 있었어. 이렇게 걱정 없이 함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과는 달리 진혁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지민이 아니었다.
“아빠가 결혼을 허락하시면서 저를 따로 불러 하신 말씀이 있어요. 당신은 이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서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집안일로 발목을 잡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
“어렸을 때 아빠 얼굴을 거의 못 보고 자랐어요. 맨날 야근에 휴일도 없으셨거든요. 그런데 난 하나도 원망스럽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웠어요. 아빠가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고, 그 덕에 우리 가족과 친구들이 안전하게 산다는 것을 아니까요.”
지민은 더 깊이 진혁의 품에 안기며 말을 이었다.
“나도 당신이랑 매일 붙어 있어서 좋아요. 하지만 그게 남의 불행을 외면하고 얻은 행복이라면 슬플 것 같아요.”
“……!”
“수호 씨네 가족을 도와주세요. 나도 그렇고 혜주도 좋아하는 이웃이잖아요. 그게 우리가 원하는 당신의 모습이에요.”
“고맙소.”
진혁도 지민을 꽉 끌어안았다.
오래전부터 수호를 도와주고 싶었다. 아니, 그와 같은 성실히 살아가는 귀농인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과거처럼 그 일에 매달려 혜주를 잊고 살게 될까 걱정이 되어 주저하고 있었다.
지민의 말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마음의 결정을 할 수 있었다.
고민이 사라지자 다른 욕심이 생겼다. 은근한 시선으로 지민을 바라봤다.
“앞으로 바빠질지 모르니 오늘 혜주 동생을 만듭시다.”
“어머, 이이가 미쳤나 봐.”
말과는 달리 지민도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막 위로 올라가려는 순간 분위기를 깨는 소리가 들렸다.
“싸와?”
“어, 혜주야.”
“싸우면 아야 해.”
곰 인형을 안은 혜주가 문 앞에 서있었다.
지민이 얼른 옷을 여미고 후다닥 다가가 안았다.
“엄마 아빠는 싸우는 거 아니야. 잠이 안 와?”
“응, 엄마랑 잘래.”
“그래. 오늘은 같이 자자.”
침대로 돌아온 지민이 혜주를 가운데 누이고 재우는 모습에 진혁은 입맛만 다셨다.
* * *
다음 날 아침, 양배추 밭을 둘러보고 돌아가려는 진혁에게 차에서 내린 수호가 다가왔다.
새벽같이 일어나 밭을 둘러보고 오는 모양이었다.
보자마자 고개부터 숙였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형님.”
“남자가 술 먹다 보면 그럴 때도 있지. 이미 잊었다.”
“고맙습니다. 아침부터 예솔이 엄마한테 엄청 혼났습니다. 여기는 언제 실사 온답니까?”
“난 산지 폐기를 신청하지 않았다.”
“형님의 아쉬운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붙들고 있어 봐야 애물단지만 됩니다. 지금이라도 신청이 가능한지 알아보세요.”
걱정을 하는 수호를 바라보다가 진혁이 물었다.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미 결론은 났는데 미련 때문에 결행을 못 하고 있는 게 맞는 표현 같습니다. 농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제 네가 한 말을 듣고 생각을 좀 해 봤다.”
“형님, 어제는 술…….”
“그걸 탓하자는 게 아니다. 네 말에 틀린 것은 없다. 그렇다고 맞는 것도 아니다.”
잠시 다 자란 양배추 밭에 시선을 둔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해 지은 농사를 포기한 네 마음이 그런데, 내 모든 것을 바쳐 이룩한 그룹을 내놓았을 때 내 마음은 어땠을 것 같냐?”
“……!”
“그래서 포기했냐고? 아니다. 난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잠시 물러나 있을 뿐이다.”
수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도 서진혁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술김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욕하는 다른 자본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큰 잘못을 저질렀다.
“형님.”
“나도 무수히 실패했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내가 선택한 길이고 포기한 게 아니기에 후회는 없다. 이제 다시 달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
“그 끝이 어디인지 나랑 같이 가 보겠느냐?”
“고맙습니다. 형님이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았다.
펜션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각자 집으로 들어가 식사를 하고 다시 모였다. 이번에는 지민과 함난숙도 자리를 함께했다.
진혁이 함난숙에게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전세금으로 받은 1억입니다.”
“아니, 형님.”
기대와 달리 전세금을 돌려주고 내쫓는 것이라 생각한 수호의 얼굴이 당장 굳어졌다.
하지만 진혁은 그를 무시하고, 역시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는 함난숙에게 말을 이었다.
“앞으로 상당 기간 돈을 가져다주지 못할 겁니다. 그때까지 생활비는 이걸로 해결하십시오. 이게 어떤 돈인지는 두 분이 더 잘 아실 테니 다른 말씀은 안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알아볼게요. 그러니 이 돈은…….”
“제수씨도 함께하셔야 합니다. 물론 여기 혜주 엄마도 같이할 거고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해야 여러분 같은 농민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진혁은 지민과 함난숙에게 협동조합 설립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고 수호와 함께 길을 나섰다.
진혁이 찾아간 곳은 삼도동에 위치한 제주대학교 창업 보육 센터였다.
오존메이드는 205호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예약을 한 터라 홍준기 대표가 한 사내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오존메이드는 오존수로 과일을 살균해 장기간 보존할 수 있도록 기술 솔루션을 제공하는 업체였다.
“서 회장님 같은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홍준기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는 한 식품 회사의 신규 사업 기획 담당 임원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나와 오존메이드를 차렸다.
사업가라 서진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농부 서진혁으로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이수호 씨입니다.”
“이분은 저희 회사 기술 담당 이사 최용선 씨입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진혁이 테이블에 놓인 공유기같이 생긴 제품을 들고 살펴보며 물었다.
“이게 그 제품입니까?”
“그렇습니다. 오존 살균기 오존팩입니다. 3평짜리 컨테이너는 그거 하나면 충분합니다.”
“성능은 어느 정도까지 나옵니까?”
“감귤 종류는 2개월, 키위는 3~4개월 정도 저장 기간이 늘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야채류는 어떻습니까? 양배추와 무, 당근 같은 종류로요.”
“실험을 하지 않아서 정확히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양배추는 키위 정도로 될 것 같고, 무와 당근은 육질이 단단하니 6개월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게 지난 3년간 과일에 대해 실험한 데이터들입니다.”
최용선의 설명에 이어 홍준기가 내놓은 실험 보고서를 진혁이 꼼꼼히 확인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진혁에게 홍준기가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고 물었다. 그에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전 대용량의 제품이 필요합니다. 천 평 정도의 저장고를 커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혁의 말에 홍준기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제품은 확실했고 분명히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수익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회사를 나오면서 받은 퇴직금과 가진 전 재산을 합쳐 20억을 쏟아부었는데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부 R&D 사업 과제를 받아 진행한 게 독이 되었다.
오존팩을 개발해 놓고도 3년간 테스트만 한 것은 보조금을 지급해 주면서 내건 조건 때문이었다.
답이 없자 진혁이 물었다.
“어렵습니까?”
“제품 개발은 어렵지 않지만 새 제품을 개발할 여력이 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개발비가 없는 겁니까?”
직설적인 질문에 홍준기의 얼굴이 굳어지자 진혁이 얼른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성격이 급해서요.”
“아닙니다. 사실인데요. 정부가 원하는 기준을 맞추느라 그간 매출이 없었습니다.”
“기술적인 문제는 없는 겁니까?”
시선을 받은 최용선이 답했다.
“오존팩의 후속 모델로 개발해 놓아서 아무 문제 없습니다.”
“기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부품 공급만 원활하다면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설치 후에 테스트를 거쳐야 하니…….”
“테스트는 설치하고 바로 현장에서 하면 됩니다.”
최용선의 말을 자르고 이번에는 홍준기에게 눈길을 줬다.
“제품의 개발에 투입되는 모든 비용은 제가 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