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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35화 (135/307)

135화. 협동조합, 동행

“헉, 회장님께서요?”

“대신 해당 제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주십시오. 제대로 된 제품만 만들어 주시면 제가 아주 미친 듯이 팔아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홍준기의 눈가가 벌게져 있었다.

개발 비용을 대주고 제품까지 책임지고 팔아 준다는 데 이보다 고마울 수는 없었다.

계약서를 쓰고 밖으로 나와 운전하는 이수호는 진혁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 감이 오지 않아 침묵을 지켰다.

대신 진혁이 질문을 던졌다.

“품목과 지역만 다를 뿐 연례행사처럼 산지 폐기가 벌어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공급 과잉으로 인한 가격 폭락 때문입니다. 출하해도 인건비를 건지지 못하고 오히려 가격만 더 낮추는 일이라서요.”

“그럼 공급 과잉은 왜 발생하는 거냐?”

“그건 그 작물을 선택한 농가가 많고, 이번처럼 풍년기근이 발생해 출하량이 늘어서입니다.”

“그걸 그렇게 잘 알면서 왜 같은 실수를 매년 반복만 하는 것이냐?”

평소 불만이 많았던 부분이라 거침없이 답변하던 이수호의 말문이 막혔다.

수긍해서가 아니었다. 또 다시 변명거리만 늘어놓는다고 핀잔을 들을 것 같아서였다.

진혁이 그 마음을 짐작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그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

“…….”

“비싼 돈 들여서 하우스를 지어 재배하는 이들이 왜 그런다고 생각하느냐?”

“자연 재해로부터 작물을 보호할 수 있고, 연중 재배가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연중 재배를 하는 이유는?”

“그건 노지의 출하 시기와 달리해서 내놓으면 비싼 가격에……. 아.”

답을 하던 이수호가 그제야 진혁이 왜 지금까지 질문을 했는지 이해를 했다.

“공급 과잉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나는 그중에 하나가 출하 시기의 집중이라고 본다. 수확 철에 너도나도 내놓으니 당연히 값이 폭락할 수밖에. 난 그걸 조절해 보려고 한다.”

이어진 진혁의 말에 자신의 짐작이 사실임을 확인한 이수호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자신은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이었다.

감탄의 시선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자 진혁이 소리를 질렀다.

“인마, 운전 똑바로 해!”

“어어, 죄송합니다.”

정신을 딴 데 파는 바람에 중앙 분리대를 받을 뻔했다.

“산지 폐기를 신청한 곳 중에 선정되지 않은 농가들을 만나 봐라. 보상가에 팔겠는지 의향도 알아보고.”

“알겠습니다.”

“무와 당근 재배 농가도 알아보고.”

“예.”

이수호의 말투가 고분고분해져 있었다. 새로운 희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혁이 핸드폰을 꺼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니지요?

“제주도에 한번 다녀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서 회장님이 부르신다면 당연히 가야지요. 내일 아침 비행기로 건너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주식회사 두리이엔티의 곽영섭 사장이었다.

저녁을 먹고 네 사람이 다시 모였다.

먼저 이수호가 보고를 했다.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세 작물 농가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꼭 연락 달라고 전화번호까지 찍어 주며 사정하는 바람에 혼났습니다.”

“협동조합 설립은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다만 5인 이상의 조합원 자격을 가진 자가 발기인이 되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어서 한 분을 더 모셔야 해요.”

“생각해 둔 사람이 있으니 그 부분은 걱정 마시오.”

“필수 사항은 아니지만 교육도 있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받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수씨랑 같이 받도록 해요. 그리고 식품 제조와 판매업 허가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요.”

“제조까지 하시려고요?”

질문은 지민이 했지만 이수호 부부도 궁금한 눈치였다.

“6차 산업은 별게 아니에요. 1차 산업인 생산, 2차 산업인 제조, 그리고 마지막 유통이 3차 서비스업이라 그 숫자를 더한 것뿐이에요. 협동조합 동행은 우리가 생산한 제품을 소비자에게까지 전달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책임지고 진행하게 될 겁니다.”

“……!”

“물론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있을 때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알겠어요.”

“그리고 지민 씨는 오픈 마켓에 대해서도 조사를 좀 해 주세요.”

“그렇게 할게요.”

일을 떠안았지만 지민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잊고 있었던 직장 생활 할 때의 열정이 되살아나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 * *B 2 2

다음 날, 곽영섭이 제주 공항에 도착하자 바로 봉개동의 창고 신축 예정지부터 둘러봤다.

대로변에 붙은 영농 기술 지원 센터 옆 부지로 크기가 만 평 가까이 됐다. 이곳 역시 박이동이 사 둔 진혁의 땅이었다.

“입지 조건이 너무 좋아서 창고 부지로 쓰기에는 아까울 정도입니다.”

“부족한 것보다는 낫지요. 가시지요.”

진혁은 곽영섭과 함께 오존메이드로 갔다.

서로 소개를 시켜 주고 자신의 계획을 다시 밝히자 곽영섭이 우려를 나타냈다.

“그런 용도라면 천 평짜리 저온 창고를 다섯 동이나 통으로 짓는 것은 위험이 너무 크고 비효율적인 것 같습니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전자 장비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100%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라도 생기면 전체 상품이 타격을 입게 됩니다.”

최용선도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럼 어떤 식으로 짓는 게 좋겠습니까?”

“500평씩 열 동을 짓고 여섯 동은 200평, 300평으로 다시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한꺼번에 출하할 게 아니니 저희 제품은 반 정도만 설치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건축비는 상승하겠지만 물건이 항상 차 있는 것은 아니니, 그때그때 필요한 창고만 가동시키면 유지 비용이 많이 절감될 것 같습니다.”

“두 분의 의견이 그렇다면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진혁이 순순히 두 사람의 의견을 따랐다.

이런 부분이 진혁의 장점이었다.

그는 목표만 정해 주고 세부 계획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일임하는 스타일이었다.

저온 창고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홍준기 사장이 입을 열었다.

“혹시 자금 여력이 되시면 창고를 짓는 김에 지붕에 태양광을 설치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태양광을요?”

“요즘은 기존 건물에도 많이 설치합니다. 전기료를 아낄 수 있고 남은 전기는 한전에서 사 가니 일석이조입니다.”

“창고를 지을 때 한 번에 하면 설치비가 많이 절감될 겁니다.”

이번에도 곽영섭이 같은 의견을 내놓자 진혁은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계획을 세워 주십시오. 그런데 제가 아는 태양광 시공 업체가 없는데.”

“그건 걱정 마십시오. 여기 창업 보육 센터에 태양광 모듈을 개발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니 안심하고 맡기셔도 될 겁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진혁이 모두를 둘러보고 말했다.

“어련히 잘해 주시겠지만 그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제주 농민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아실 겁니다. 이건 그분들은 물론 그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사업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문제없이 하겠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곳 사업이 성공하면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갈 생각입니다. 두 분 사장님의 지속적인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곽영섭과 홍준기가 동시에 머리를 조아렸다.

전국으로 확대가 된다면 엄청난 사업이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헛소리라고 치부하며 무시하겠지만 상대는 서진혁이었다. 그는 이보다 훨씬 큰 국제적 그룹을 일궈낸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하게 된 것이 큰 행운이었다.

* * *

며칠 후 진혁은 다시 제주 국제공항으로 갔다.

출국장 입구에서 서성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공장장님! 여깁니다, 여기.”

진혁이 번쩍 손을 들고 외치자 권기남 공장장이 알아보고 얼른 다가왔다.

“종간나 새끼, 얼굴이래 좋구만.”

“그럼요. 공장장님 잔소리 안 들으니 아주 편합니다.”

“으이그, 말이라도 못 하면. 날래 가자우.”

일단 펜션으로 갔다.

지민도 안면이 있어 반갑게 맞아 줬다.

권기남 공장장은 작년 6월로 만 65세가 되어 정년퇴직을 했다.

김상조 사장이 기술 고문 자리를 제안하며 잡으려고 했지만 권기남은 짐이 되기 싫다며 회사와 완전히 결별하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차를 내온 지민이 혜주를 재우기 위해 들어가자 권기남이 입을 열었다.

“날래 이야기해 보라우. 왜 불렀어?”

“제주도 구경하시라고요. 그동안 일만 하시라 제대로 관광도 못 다니셨잖습니까?”

“신소리 말라우. 다른 놈이면 모르지만 네놈이 얼굴이나 보자고 불렀을 리가 없지. 어여 까 보라우.”

자신에 대해 너무도 잘 아는 권기남이라 진혁도 더 이상 능청을 떨 수만은 없었다.

“여기서 사업을 펼쳐 보려고 합니다. 공장장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다시 돌아오기로 한기가?”

“아닙니다. 그쪽과는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인력으로 안 되는 일도 있지.”

실망한 권기남이었지만 이내 표정을 바꿨다.

살아온 세월만큼 연륜도 깊었다.

“코 쑥 빠트리고 멍하니 있지 않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어. 그래, 뭔 일이야?”

“농민들을 위한 일입니다.”

진혁은 협동조합 동행이 벌이려고 하는 일에 대해 들려주었다.

“공장장님이 기계 설치부터 해서 공장 관리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고럼, 고럼.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이제 연세도 있으신데 괜…….”

“내래 권기남이야. 네깟 놈쯤은 한주먹도 안 돼. 팔씨름 한번 해 볼텨?”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공장장님을 이기겠습니까.”

“넉살만 늘어 가지고. 날래 일어나.”

“어디 가시게요?”

얼떨결에 따라 일어나 일어나며 진혁이 물었다.

“공장부터 봐야지.”

“아직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입니다. 나중에 천천히 가 보셔도 됩니다.”

“미련한 놈. 창고가 지어지고 나면 늦어. 그 전에 미리 부지를 보고 기계에 맞게 창고를 설치하는 게 순서야. 날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어.”

“아, 예. 알겠습니다.”

권기남의 열정은 여전했다.

부지는 물론 설계 사무소까지 들러서 오느라, 다시 펜션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오늘은 함께 식사를 하기로 해서 이수호네 가족들이 모두 건너와 있어 북적거렸다.

“애들이 어려서 좀 시끄럽습니다.”

“괜찮아. 이게 사람 사는 거지.”

권기남은 오히려 어른들과 아이들이 뒤섞여 정신없는 거실의 풍경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부인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자식으로 일남일녀를 두고는 있지만 아들은 유명한 의사로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고 있었다. 딸은 서울로 시집가 명절에도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진혁이 그를 망설임 없이 이곳으로 부른 이유이기도 했다.

권기남의 합류로 협동조합 설립 인원이 채워지고, 차자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됐다.

곽영섭 사장이 직원들을 데리고 직접 내려와 창고를 짓기 시작했고, 최용선은 회사에서 먹고 자며 기술진을 독려해 제품 개발에 매진했다.

권기남은 창고 건설 현장을 관리하는 한편 필요한 기계들을 발주하고 설치 계획을 짜느라 정신없었다.

이수호도 농가들을 찾아다니느라 얼굴 볼 틈이 없었다.

지민과 함난숙도 교육을 받으며 협동조합 설립과 식품 제조 및 판매 허가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결국 혜주는 물론 수호네 아이들의 뒤치다꺼리까지 진혁이 해야 했다.

겨우 혜주를 씻기고 재운 다음에야 지민이 들어오자 진혁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왜 이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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