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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36화 (136/307)

136화. 희망을 보여 주다

“오늘이 교육 마지막 날이라 교육생들끼리 뒤풀이가 있어서요.”

“할 건 다 하고 다니네.”

“혜주 보기 힘들었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

“맨날 한 나는 어땠겠어요?”

진혁의 입이 턱 막혔다. 지민이 이런 식으로 공격해 올 줄은 몰랐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진혁을 지민이 살포시 안아 줬다.

“고생했어요, 내 신랑.”

진혁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지민은 진혁을 다룰 줄 알았다.

* * *

창고 설치가 완전히 끝난 것이 구정 바로 코앞이라 진혁은 서둘러 귀향길에 올라야 했다.

제주도에 살다 보니 명절 때는 오히려 남들과 반대로 움직이게 됐다.

“내래 걱정 말구 다녀오라우. 수호네 아들이 있잖니.”

권기남이 미적거리는 진혁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이수호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어 갈 곳이 없었고, 함난숙도 어머님만 계시는데 이번에는 제주도로 오셔서 차례를 지내기로 해 남아 있기로 했다.

원주 비행장에 내리자 사촌 여동생 연희가 차를 가지고 나와 있어서 편하게 강릉까지 갈 수가 있었다.

부모님과 같이 속초로 넘어가 차례를 지냈다.

다음 날에도 진혁은 쉬지 못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과천의 처갓집에 도착하자마자 희준이 바로 들어왔다.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지현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아버님, 절 받으십시오.”

희준은 김세동을 보자마자 덥석 절부터 했다.

지현은 이미 김세동 옆에 바짝 붙어서 아양을 떨고 있었다. 부창부수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진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김세동이 쉽게 허락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상황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잘 왔네.”

“지현 씨랑 결혼하고 싶습니다, 아버님.”

“부모님께 허락은 받았고?”

“두 분 모두 지현 씨를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아버님만 허락해 주시면 바로 상견례 날짜를 잡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적당한 날을 잡아 봐.”

“고맙습니다, 아버님.”

진혁은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건 분명 꿈이었다.

하지만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희준의 얼굴이 사실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희준이까지 낀 저녁 식사가 끝나자 김세동이 일어났다.

“혜주 아범은 날 좀 보지.”

함께 서재로 들어가서 앉았다.

“쉽게 허락했다고 서운해하지 말게.”

“아닙니다, 아버님.”

“다 같은 사람이지만 각자 위치가 달라. 자넨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야.”

김세동의 마음을 알고 진혁은 서운했던 감정이 사라졌다. 아들과 사위의 차이였다.

김세동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식사 자리에서 대통령께서 자네의 안부를 물었어. 이제 서울로 올라올 때가 되지 않았나?”

“제주도에서 새롭게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래?”

“아직 시작하지 않아서 잘 모르실 겁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앞으로도 모른 척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울에 올라오더라도 과거가 아닌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뵙고 싶습니다.”

“알겠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이는 김세동의 눈가에 그늘이 맺혔다.

중국의 공작에 뛰어난 사업가 하나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정부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대통령도 그것이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어 가끔 안부를 묻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 * *

긴 연휴가 끝나자 제주도에서는 본격적인 산지 폐기 작업이 시작됐다.

언론들이 일제히 그 사실을 보도하며 우리나라 농업 대책의 문제점에 대해 떠들었지만, 그때뿐이었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매년 봐 왔던 광경들이라 다들 무심히 지나갔다.

모두가 관심 없는 사이 다른 한쪽에서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양배추를 담은 컨테이너 박스를 지게차가 끊임없이 들어 창고에 쌓고 있었다.

빈자리는 월동 무가 채웠다.

뒤로는 당근을 실은 화물 트럭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종류별로 저온 저장고, 저온 창고, 일반 창고에 나누어서 1, 2층 모두 꽉 채워서 쌓았다.

검은색과 밤색이 조화를 이룬 여덟 동의 커다란 창고의 위는 태양광 집진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협동조합 제주 동행.

진혁의 기행은 농민들 사이에 조롱거리가 되고 있었다.

쓰레기를 비싼 인건비까지 들여 사들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실패한 사업가가 돈 지랄을 하고 있다며 술자리의 안주로 삼았다.

그런 분위기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수호라 보고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양배추와 월동 무가 만 톤, 당근이 4천 톤이 들어왔습니다.”

매입에만 총 30억이 들었다.

창고 설치 비용은 100억 가량이 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못하는 거금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집행하는 진혁의 모습이 대단하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졌다.

진혁이 물었다.

“너도 내가 돈 지랄 하는 것으로 보이냐?”

“아닙니다.”

“돈은 나쁜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고마운 존재지. 다만, 그걸 쓰는 인간이 문제다.”

“…….”

“지금은 내 말이 와 닿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켜봐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멀어져 가는 진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수호의 시선에는 아직도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권기남이 다가와 말했다.

권기남과 이수호는 명절을 함께 보내서인지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믿기지 않을 끼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그런데 저놈은 제가 한 말은 꼭 지키더라. 그러니 믿고 기다려봐라. 나도 그렇지만 너도 저놈을 만난 게 큰 행운이다.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진혁은 확언은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월동채소 가격이 거짓말처럼 오르기 시작해서 전달 대비 20%가량 상승했다.

뉴스에서는 제주도의 시장 격리 조치와 농가들의 저급품 출하 자제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수호는 진혁이 물량을 걷어 들인 영향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혁은 통로를 메우고 있는 20%가량의 물량을 경매를 통해 내보냈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오픈 마켓에 판매를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생산자의 판매가 대비 소비자가 구매하는 가격은 두 배 정도다. 유통 마진이 100%로 붙게 된다.

그러나 오픈 마켓 수수료는 15~2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진혁은 그 부담도 세척 작업을 통해 해결했다.

권기남 공장장이 설치한 세척기가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와 당근은 세척을 한 제품과 안 한 제품의 가격 차이가 20%가량 났다.

월동채소 출하가 끝나 쉬고 있던 아주머니, 삼촌들이 창고에 마련된 작업실로 출근해 세척과 포장 작업을 하느라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지민이 시작한 알쇼핑의 판매는 연일 주문량을 갱신하며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자금을 아끼지 않은 프로모션 시행으로 노출 빈도가 잦은 영향도 있었지만 ‘최저가 보상제’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판매 가격보다 더 낮은 대형 마트 진열대 사진을 후기에 올리면 포상을 해 주는 것은 물론 그 즉시 가격을 그 보다 낮게 수정했다.

물론 기존에 주문한 고객들도 인하된 가격을 적용해 차액을 포인트로 적립해 주었다.

* * *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덧 4월도 중순에 접어들고 있었다.

“아이고, 허리야.”

열정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권기남이 앓는 소리를 할 정도였다.

진혁과 이수호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많던 물량이 다 팔려 나가고 창고 한 동을 빼고는 모두 비워져 있었다.

알쇼핑에서 주문이 들어오는 속도를 감안하면 그마저도 다음 달이면 모두 팔려 나갈 것 같았다.

판매 가격도 매달 20%가량 오르고 있어 제반 경비를 제외하고도 배는 남을 것 같았다.

이수호가 이렇게 자세히 아는 이유가 있었다.

진혁은 매일 매일의 주문량과 매출을 게시판에 공고해 모두가 볼 수 있게 했다. 일하는 사람들도 출근하면 그것부터 확인했다.

소문이 퍼져 진혁과 제주 동행에 대한 시각도 180도 바뀌어 있었다. 더 이상 비난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칭찬도 하지 못했는데, 싼 값에 넘겨 배 아파 하는 농민들 때문이었다.

까칠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수호의 모습에 진혁이 물었다.

“힘드냐?”

“아닙니다, 형님.”

“그래. 겨우 이 정도로 힘들다고 하면 안 되지. 이제 천혜향도 끝물이지?”

“그렇다고 봐야지요. 저온 창고에 보관하려면 또 비용이 들어가니 마지막 물량을 털어 내느라 가격도 하락세입니다.”

“그럼 농가를 찾아가 걷어다가 우리 창고를 채워라. 다음 달은 레드향을 걷어 오고.”

“만감류도 인터넷에서 파시게요?”

놀란 표정으로 묻는 수호에게 자신이 조사한 바를 들려주었다.

“이번 것의 대부분은 제주도에서 팔릴 것 같다. 5월부터는 이런저런 공휴일이 겹쳐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두 품종 모두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상품인데, 출하 기간이 짧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어 높은 가격에 팔린다고 하더라.”

“그렇군요. 5년간 살았는데도 몰랐습니다.”

“몰라서 그렇지, 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힘들더라도 버텨라. 올해가 지나고 나면 예전과 다른 너를 보게 될 거다.”

“고맙습니다, 형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머리를 팍 숙이는 수호의 모습에 권기남이 한 소리 했다.

“눈은 시뻘게 가지고 여기서 더 어떻게 열심히 해? 이러다 애 잡는다. 적당히 시켜라.”

“그럼 공장장님이 걷어 오시든지요.”

“하여튼 네놈은 사람 부려 먹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 그걸 잊고 부른다고 쪼르륵 달려온 내가 미친놈이지. 말년에 이 뭔 고생이야.”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든지요?”

“아무튼 한 번을 안 져요. 에이, 애들이나 보러 갈란다.”

권기남이 벌떡 일어나 나갔다. 오늘은 그가 아이들을 책임지는 날이었다.

다들 늦게까지 일하다 보니 아이들을 챙기는 게 가장 문제였다.

일하는 아주머니를 쓰기는 했지만 저녁에는 돌아가니 누군가 함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일찍 퇴근하기로 했는데, 권기남도 열외가 아니었다.

보기와 달리 권기남도 아이들을 좋아했다. 수호네 애들뿐만 아니라 혜주도 잘 따랐다.

어떤 날은 권기남의 등에 업혀 잠든 혜주를 보기도 했다.

수호가 농가에 다녀오겠다고 떠나자 지민이 다가왔다.

“공장장님 말씀도 맞아요. 다들 너무 무리해서 달려왔어요. 이렇게 해서는 오래 못 버텨요.”

“이번에 들여 온 월동채소까지만이라도 우리끼리 마무리 지어 봅시다. 직접 해 보는 것만큼 남는 게 없어요.”

“알아요. 당신이 수호 씨네 부부에게 좀 더 많은 경험을 쌓게 해 주려고 일부러 직원 채용을 늦춘다는 것을.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런 일이 처음이라 포기해 버릴까 걱정이에요.”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면 지금 접는 게 나아요.”

진혁이 일부러 차갑게 말했지만 그는 수호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여전히 피곤에 쩔어 일기를 올리고 있지만, 사라졌던 희망과 기대가 다시 글의 여기저기에 묻어나 있었다.

* * *

예상대로 한 명의 낙오자 없이 월동채소 완판을 함께 지켜봤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냐는 의견에 호텔을 통째로 빌려 근사하게 파티를 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집에서 기다릴 아이들 때문이었다.

결국 시장에서 고기와 조개를 사 와 펜션의 잔디밭에서 가든파티로 대신했다.

제일 신난 것은 역시 아이들이었다. 혜주도 언니, 오빠들과 함께 숨바꼭질을 하면서 연신 깔깔거렸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진혁이 맥주잔을 들고 외치자 모두 한목소리로 잔을 부딪치며 서로 그간의 노고를 격려했다.

“전 태어나서 그렇게 엄청난 채소는 처음 봤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아찔합니다.”

“내래 채소더미에 걸려 넘어진 게 한두 번인 줄 아네? 하튼 아새끼래 무식하기 그지없어야.”

“고생은 했지만 완판하고 나니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잖습니까.”

“고럼. 내래 고생을 직싸게 할 걸 알면서도 이 맛에 네놈을 따라다니는 기다.”

덕담을 나누는데 이수호가 아쉬운 소리를 했다.

“첫 달에 농협 경매로 싸게 넘긴 게 너무 아깝습니다. 가격은 계속 오르는데 물건이 없으니.”

“맞아요. 지금도 주문을 넣고 싶다는 고객 문의가 많아요. 너무 일찍 완판을 한 것 같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주문량을 조절해서라도 더 가지고 있어야 했던 것 같아요.”

함난숙도 동의하듯 말했다.

그런데 들떠 있던 분위기가 갑자기 차갑게 식었다.

진혁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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