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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37화 (137/307)

137화. 제주 동행

오랜 시간 그와 같이한 지민과 권기남도 이미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침묵했다.

당장 호통이 터질 것이라 예상했다.

진혁도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함난숙이 있어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두 사람 모두 우리가 왜 이 일을 하게 됐는지 잊지 말아요. 돈 벌어서 우리끼리 호의호식하자고 벌인 일이 아닙니다. 산지 폐기로 고통 받는 동료 농민들을 돕고자 시작한 일이잖아요.”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형님.”

“죄송해요.”

이수호 부부의 사과를 들은 진혁이 말을 이었다.

“내가 돈은 죄가 없고 그것에 휘둘려 잘못 쓰는 사람이 문제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예.”

“초심을 잃으면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다시는 방금 같은 나쁜 마음을 먹지 않겠습니다.”

진솔한 이수호의 사과에 얼굴을 푼 진혁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내가 처음과 달리 협동조합의 이름의 ‘동행’ 앞에 ‘제주’라는 지역명을 넣은 이유가 있다. 난 이 사업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갈 생각이다. 문경 동행, 괴산 동행, 장흥 동행 등등, 각 지역마다 동행 조직을 결성할 참이다. 앞으로 제주 동행은 너희 부부가 이끌어 가야 한다.”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일입니다, 형님.”

“넌 지금도 입으로만 동행을 떠들고 있다. 동행이 왜 동행이냐? 왜 네가 홀로 감당한다고 생각하냐? 네 동료들을 믿고, 유통 전문가를 초빙하고, 그렇게 함께 가는 것이다. 넌 농민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길로 갈 수 있도록 앞에서 방향을 잡아 주기만 하면 된다.”

“…….”

“당장 너에게 떠넘기고 간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서 보고 배우고 깨달아라. 너희 부부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스스로를 믿어라.”

“알겠습니다. 해 보겠습니다. 저와 제 가족과 농민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함난숙의 손을 붙잡고 굳은 의지를 다짐하는 이수호의 모습에 진혁이 마침내 미소를 지었다. 권기남도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했다.

그런 그들에게 진혁이 통장을 하나씩 내밀었다.

지민의 것도 있었다.

“어머, 이게 얼마야?”

“이번 월동채소 판매로 얻은 수익금 중 조합원 배당금 1억이야. 다들 고생했잖아요.”

“고맙습니다, 형님.”

“고마운 건 나지. 덕분에 나도 챙겼는걸. 자, 이제 이야기는 그만하고 죽어라고 마셔 보자구요.”

“브라보!”

다들 술잔을 높이 치켜들어 힘차게 부딪혔다.

* * *

월동채소 판매 종료로 조용했던 ‘제주 동행’이 아침부터 북적였다.

작업복 차림의 농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썰렁했던 창고에는 급히 빌려 온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기자들도 몇이 보였다.

입구에서는 오랜만에 양복을 입은 이수호가 농민들을 맞았다.

이들은 산지 폐기 직전의 월동채소를 보상금 가격에 팔았던 농민들이었다.

천여 명의 농가에 연락을 했는데 참석한 이는 5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애써 키워 헐값에 던진 것만 생각해도 잠이 안 오는데, 그걸로 폭리를 취한 놈들이 보고회랍시고 부르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온 사람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장내에서 진혁이 마이크를 잡았다.

“지금부터 협동조합 제주 동행의 상반기 결산 보고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장내가 어두워지고 스크린에 진혁이 작성한 파워포인트 자료가 올라왔다.

“월동채소의 총 구입 금액은 30억이었고, 투입 인원은 수확에 1,600명, 세척과 포장에 5,300명, 집하와 배달에 2,500명, 기타 600명으로 만 명의 고용 창출 효과가 있었습니다.”

숫자와 글자를 최소화하고 도형과 그래프로 정리되어 있어 눈에 쉽게 들어왔다.

“총 판매 금액은 73억으로 영업 이익은 43억이었습니다. 인건비가 6억, 수수료가 4억, 물류비가 2억, 기타 잡비가 1억 소요됐습니다. 따라서 순익은 구입 금액과 같은 30억으로 100%의 수익을 달성했습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때려치워!”

장내에 고성이 터졌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마음으로 왔는데 돈 벌었다고 자랑질 하는 게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진혁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순익 30억중 10억은 창고 건축비를 갚는 데 사용하고, 5억은 조합원들에게 균등하게 배분했습니다.”

“저놈 끌어내려!”

“더 들을 것도 없어. 갑시다.”

성난 농민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삿대질하는 것도 모자라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어진 진혁의 말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나머지 15억은 월동채소를 팔아 주신 농민들께 되돌려 드릴 겁니다.”

“……!”

“가시는 분은 막지 않겠습니다. 다만, 가시더라도 밖에 마련된 ‘수익금 분배 신청서’에 은행 계좌 번호는 적어 주십시오. 저희에게 파신 금액의 반을 정확히 추가로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앉았다.

진혁이 물러나자 이수호가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

“어르신, 아저씨, 형님들. 농부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못난 수호입니다. 진혁 형님이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저 때문입니다.”

이수호의 진솔한 고백이 이어졌다.

좌절, 실패, 울분, 포기…….

그때 나타난 진혁.

“처음 형님의 말씀을 듣고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지금도 다 믿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농민들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진혁 형님 같으신 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수호가 말을 마치자 진혁이 다시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전 농부가 아닙니다. 농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농촌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은 여러분도, 저 같은 유통업자도, 정부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서로 상대의 책임이라며 비난만 하고 있습니다. 그사이 불쌍한 농민들만 죽어나고 있습니다.”

“…….”

“뭉쳐야 합니다. 함께 가야 합니다. 농민, 유통업자, 정부가 모두 나서야 합니다. 대한민국 농민이 농사만 지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동행이 앞장서겠습니다.”

짝짝짝짝.

이제는 고성과 욕설 대신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힘은 없었다.

좋은 말이었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는 무수히 들어왔다. 특히나 선거철이면 너도 나도 외치는 뻔한 레퍼토리였다.

장내가 진정되자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이에나 같은 중간 도매상 놈들이나 책상만 지키고 있는 철밥통 공무원들이 우리를 위해 일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은 익히 경험해서 잘 아실 겁니다.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요.”

“크크.”

“옳소!”

진혁의 거침없는 입담에 다들 크게 동조하며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저희가 요즘 천혜향과 레드향을 모아 쌓고 있다는 소문은 들으셨을 겁니다. 천혜향의 시장 판매 가격이 50%나 올랐더군요. 게다가 요즘 희한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

“도매업자들이 찾아옵니다. 서로 물건을 사겠다고요. 택배 회사들도 가격을 절반으로 낮추는 것도 모자라 직원들을 파견해 돕겠다며 자리만 내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구청에서도 찾아왔습니다. 저온 창고 지원 사업이 있다면서 꼭 신청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군요.”

“…….”

“농민을 아래로 보던 그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우리가 상품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뻣뻣한 유통업자와 공무원들을 동행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농민부터 동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주 지킴이’ 사업을 함께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장내에 불이 다시 꺼지고 스크린에 ‘제주 지킴이’ 사업 계획서가 펼쳐졌다.

“농민 개개인은 미약한 존재입니다. 재배 품종도 몇 가지 안 되고 수량도 적습니다. 저온 창고라고는 정부 보조금을 받아 지은 10평짜리가 전부입니다. 요즘 인터넷 판매가 대세라고 해서 자식들에게 부탁해 어렵게 만든 블로그도 주문자가 몇 안 됩니다.”

화면에 띄워진 허리가 굽고 축 처진 어깨의 농민 그림만 봐도 자신들과 똑같은 모습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뭉치면 강합니다. 우리 저온 창고를 부러워하시는데, 여기 모인 분들의 창고만 합쳐도 같은 크기입니다. 품종과 수량은 몇 배나 됩니다. 각각의 주문자를 합치면 우리보다 훨씬 많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로 뭉치면 우리가 번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뀐 화면에는 각 개인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화면이 바뀌자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제주 지킴이들은 여러분이 함께 갈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각 농가의 재배 품종과 수량을 파악하고 인터넷 판매도 대행해 드릴 겁니다. 저장 공간이 필요한 분은 다른 농가의 여유 있는 저장 창고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유통업자들은 제주 지킴이가 상대해서 최고의 가격을 받을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를 위해 ‘제주 동행’은 신규 조합원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진혁의 마지막 말에 장내가 크게 들썩였다.

진혁을 비난하고 ‘제주 동행’의 성공을 배 아파 한 것은 자신들과 무관하기에 시기심이 발동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그 성공의 과실을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니 이보다 기쁜 소식은 없었다.

이건 무조건 가입하고 봐야 했다.

조합 가입비가 천만 원으로 적지 않았지만, 상반기 조합원 배당금이 1억인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참석자 전원이 조합원 가입 신청서를 작성했고, 참석하지 않은 다른 이들도 소식을 받고 서둘러 달려와 신청서를 제출했다.

사정이 있어 못 오는 이들은 전화로 통사정까지 했다.

다 늦은 저녁에 의자들을 정리하던 권기남이 툴툴거렸다.

“도대체가 네놈은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냐? 뭔 일만 벌렸다 하면…….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적당히는 제 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하긴 그걸 알고 있는 놈이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밖으로 나온 진혁은 와이셔츠 차림으로 화물차에 빌려 온 의자를 올리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수호에게 다가갔다.

여자들은 아이들 때문에 먼저 펜션으로 떠나고 없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다들 웃는 얼굴로 고맙다고 하시는 바람에 힘든 줄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우리가 동행해야 하는 이유다. 욕심을 버리고 기쁨을 나누면 두 배, 아니, 그 몇 배가 되어 돌아온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농민들의 참여를 제한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소식을 들으면 다들 좋아하실 텐데요.”

진혁은 이번 신규 조합원 신청은 월동채소를 판 농민에 한해서만 받으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이분들이 가장 절박한 분들이기 때문이다. 넌 산지 폐기 선정 실사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보느냐?”

“……!”

“힘 있고, 빽 있고, 돈 있는 이들은 이리저리 다 빠져나갔다. 그런 자들까지 같이 갈 마음은 없다. 항상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기도 찾아올 것이다. 그때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을 사람만 받아들일 것이다.”

생각보다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말에 수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었다.

* * *

다음 날, 제주 지역 신문이 어제의 일을 일면에 실었다.

‘제주 동행’의 뛰어난 성과와 진혁의 동행 지론에 입각한 수익 환원, ‘제주 지킴이’ 사업 시작과 조합원 추가 모집에 대해서도 알렸다.

전화통이 쉴 틈이 없었다.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앉아 있을 새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힘든 이는 이수호였다.

그는 맡은 일을 하면서 계속 걸려 오는 전화로 입에 침이 다 말라 있었다.

평소 안면이 있고 도움을 받았던 농민들의 부탁을 거절하는 일이 제일 곤욕이었다.

예전 같으면 마음의 짐으로 남았겠지만, 다행히 어제 진혁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기에 바로 털어 버릴 수 있었다.

헌데 의외의 곳에서 사고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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