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39화 (139/307)

139화. 서귀포 동행

“아닙니다.”

“그럼 최소한 여기 이수호 씨에게는 사과하고 변명이라도 늘어놓아야 하는 게 인간의 도리 아닙니까?”

진혁의 냉정한 꾸중에 우상우가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수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곧 한숨을 쉬고는 입을 떼었다.

“우리나라 농촌이 1986년 발효된 우루과이라운드로 큰 변화를 맞은 것은 아실 겁니다. 정부는 농업도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미명하에 대규모로 기계화 영농을 하는 대농 우대 정책을 폈습니다. 그러면서 소농이 농사로만 먹고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런 소농을 돕고자 전국 귀농인 지원 센터가 만들어진 겁니다.”

다들 뜻이 같았기에 힘들어도 힘든지 모르고 힘없는 농민들을 위해 일을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귀농 방식에 대한 의견이 갈렸다.

“저 같은 관행농법론자는 기존 농민들과 화합이 먼저라는 생각에, 관행농을 따르면서 점진적으로 유기농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을 폈습니다. 하지만 친환경농법론자들은 별개의 친환경생태농을 기반으로 자급자족하는 영농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답이 없이 끝없이 이어 온 논쟁은 아이러니하게 현실이 결론을 내주었다.

평생을 농사만 지었는데도 먹고살기 힘든 게 농촌의 현실이었다. 그러니 관행농법론자들의 말은 설득력을 잃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수익을 포기하고 친환경생태농으로 자연을 지키며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게 낫다는 주장이 힘을 받았다.

마침 사회 분위기도 웰빙 바람이 불고, 여러 단체의 생협 판매장이 생기면서 최소한의 판로가 보장되었다. 결국 관행농법론자인 우상우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긴 이야기에 따분한 표정으로 변한 진혁이 말했다.

“제가 잘 몰라서 묻는 건데,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관행농인지 친환경농인지.”

“그건 개념이 전혀 다른 방식…….”

“이보세요! 당신 같은 이상론자들이 아니라 여기 있는 이수호 씨 같은 귀농인의 입장에서 묻는 겁니다.”

벼락같은 진혁의 호통에 우상우는 물론 이수호마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들 말만 믿고 희망에 차 귀농했다가 통장의 잔고는 바닥나고 식구들은 굶게 생겼는데, 어떤 농법이면 어떻습니까? 빌어먹을 농법이라도 먹고살 수 있게만 해 준다면 그게 최고의 농법 아닙니까?”

“……!”

“전 농민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 의견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겠습니다. 당신들이나 정치인들이나 입으로는 농민들을 위한다면서 결국은 자기들 주장만 하고 있다는 것을.”

굳은 얼굴로 한참을 노려보던 우상우가 물었다.

“그럼 회장님은 어떤 식으로 농민을 위하시겠다는 겁니까?”

“전 농민을 위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자기 먹고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누가 누굴 위한단 말입니까?”

“말씀이 다르지 않습니까.”

“전 정치인이나 이상론자가 아닙니다. 지극히 현실론자입니다. 서로 먹고살기 힘드니까 힘을 합쳐서 함께 잘살아 보자는 겁니다. 이게 입으로 위한다고 떠들면서 오히려 그들을 이용해 제 배만 채우는 족속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표현 아닙니까?”

너무도 직설적인 표현에 우상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반박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회장님은 어떻게 함께 잘살아 보자는 겁니까?”

“농촌의 문제는 농민만 힘을 합쳐서 될 일이 아닙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해결해야 할 국가적인 과제입니다. 제가 그간 한 일은 들으셨지요?”

“예. 덕분에 어려움에 처한 농가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산지 가격 안정으로는 농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실례로 올해 마늘과 양파 값이 예전보다 좋아졌다던데, 농민들에게 그만큼 수익이 돌아갔습니까?”

“아닙니다. 인건비 상승에 종자와 농약 값은 더 올라 여전히 적자입니다. 큰 손해만 안 본 게 다행이라는 분위기입니다.”

“직거래 확대를 통한 유통 마진을 줄여야 합니다. 그게 제가 오픈 마켓으로 판매하는 이유입니다. 거기에 농산물의 가치를 높이는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편한 박스 판매를 놔두고 불편한 세척과 소포장으로 판매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짐작은 했습니다.”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하면 그로 인해 투입되는 일손으로 인한 고용 효과도 있습니다. 솔직히 저희 입장에서는 인건비를 제외하면 수익은 비슷합니다만, 농민들에게도 농사 이외의 돈벌이가 있다는 인식을 주는 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보고 있는 진혁의 생각에 우상우는 처음의 불쾌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농민, 가공업자, 유통업자, 판매자, 소비자 모두가 함께 가야 합니다. 각자 조금씩 욕심을 내려놓고 양보하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게 제가 동행 사업을 시작한 이유입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그건 모르지요. 다만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하다가 쓰러지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농촌의 현실이 이리저리 잴 만큼 한가한 게 아니라는 것은 우 선생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맞는 이야기였다.

지금 농촌은 망가져도 한참이나 망가진 상태였다. 노인만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데 그들마저 죽게 되면 결국 사라질 게 뻔했다.

그런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었다.

서진혁이 이렇게 나서 준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었다.

우상우가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서귀포를 맡겨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건 안 되겠습니다.”

“형님!”

예상치 못한 진혁의 반대에 이수호마저 놀라 소리쳤다. 당연히 우상우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진혁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여기 이수호 씨같이 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귀농한 이가 서귀포에만 있습니까? 전국에 흩어져 힘들게 농촌을 지키고 있는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들도 책임지셔야 할 것 아닙니까?”

“……!”

“전 동행을 전국으로 확대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우 선생님은 그 일을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그게 가르친 자의 죄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혼이 났는데도 우상우가 눈가가 벌게진 채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그라고 왜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이 눈에 밟히지 않았겠는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현실을 탓하며 제주도로 내려와 서귀포에서 죄인처럼 은둔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진혁에게서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봤다.

그가 자신을 선택해 주고 그 일을 맡겨 준다는 게 오히려 고마웠다.

* * *

우상우는 다음 날 다시 찾아왔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최창봉입니다.”

“예전에 내게 배운 이인데, 귤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주변 농가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어 서귀포 센터를 맡기시면 잘 해낼 겁니다.”

“잘 오셨습니다.”

함께 자리에 앉아 동행의 설립 목적과 취지에 대해 설명했는데 적극 찬동했다.

“오면서 선생님에게 말씀 들었습니다. 저 역시 회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맡겨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수호 씨와 대화를 많이 나누세요. 제주 센터를 만들고 안정화시키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지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창고 건립 비용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서귀포시에서는 과수 농가나 단체에 대한 다양한 지원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태양광 사업도 마찬가지고요. 그 자금을 받으면 투자비를 많이 절감할 수 있습니다.”

“동행은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을 겁니다.”

진혁의 확고한 태도에 최창봉은 물론 우상우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들은 지원받지 못해서 난리인 눈먼 공짜 돈이었다.

조건이 안 되는데도 억지로 짜 맞춰서 받아내는 판에, 자격이 충분한데도 안 받겠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보조금을 받지 않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크게 몇 가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 첫째가 동행은 지원금을 받을 단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합원들이 농민인데 농민 단체가 아니라니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동행은 농민들을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물건을 공급해 주는 농민들이 도와줘서 운영되는 곳입니다. 그분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우리가 먼저 챙길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의 최창봉에 비해 우상우는 감탄을 넘어 존경심마저 들었다. 진혁은 스스로 한 말을 직접 실천하고 있었다.

진혁의 말이 이어졌다.

“다음으로 간섭을 배제한 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분 모두 지원금을 받아 봐서 아실 겁니다. 몇 푼 주지도 않으면서 각종 조건을 거는 것도 모자라 경우에 따라서는 운영까지 간섭합니다. 형식적인 서류들을 요구하는 것도 물론이고요. 동행은 농민의 눈치만 보면 됩니다.”

“…….”

“마지막으로 경쟁력과 자율성 확보 때문입니다. 농민은 거지가 아닙니다. 우리 농업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지급된 보조금이 오히려 농촌을 망쳤습니다. 스스로 경쟁력을 키울 생각은 못하고 정부 수매가에만 목을 매달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정부의 눈치를 보고 할 말을 못 하고 있습니다. 동행은 ‘농자천하지대본’을 앞서 실천하고 당당히 목소리를 낼 겁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업은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다.

가끔 술자리에서 농민들이 신세 한탄조로 비참한 농업의 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며 안주거리로 삼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진혁의 입에서 나오자 느껴지는 의미가 달랐다.

“땅과 초기 투자비는 제가 마련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무상 지원은 아닙니다. 제주 동행과 마찬가지로 10년에 걸쳐 분납하시면 됩니다.”

“회장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제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살아왔는지 깨달았습니다. 동행의 큰 뜻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말은 최창봉이 했지만 우상우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진혁의 생각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훨씬 더 크고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른 지역의 제자들에게 그의 뜻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게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며칠 후 진혁은 제주대학교 창업 보육 센터를 다시 찾았다.

홍준기 대표가 반갑게 맞았다.

“좋은 일을 많이 하신다고 여기저기 소문이 자자합니다.”

“칭찬받고자 한 일도 아니고 칭찬받을 일도 아닙니다. 이번에 추가로 서귀포에 창고를 짓기로 했습니다.”

“그러십니까?”

“규모가 반으로 줄어서 물량은 얼마 안 됩니다.”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서 회장님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너무 과한 인사에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제 덕을요?”

“천혜향과 레드향을 늦게까지 판매하셨잖습니까.”

“그랬지요.”

“그렇게 좋다고 홍보할 때는 쳐다보지도 않더니, 서 회장님이 직접 시범을 보여 주시니 여기저기서 오존팩을 공급해 달라고 해서 요즘 정신없이 바쁩니다.”

“좋은 일이네요.”

“거기에 규모가 큰 저장고용도 요구해 와 거기에 맞는 제품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게 다 서 회장님이 자금까지 지원해 주시면서 대용량 제품을 개발할 수 있게 해 주신 덕분입니다.”

얼굴이 활짝 피어 있는 이유가 있었다.

진혁도 기분이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추구하는 동행의 긍정적인 면이기도 했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사무실로 돌아온 진혁은 두리이엔티 곽영섭 사장과도 통화를 했다.

서귀포 동행 센터는 규모를 반으로 줄여 500평짜리 네 동만 짓기로 했다.

제주 동행 센터와 달리 처음부터 조합원을 모집하기로 했는데, 대부분이 감귤 농민들이라 자체 저온 창고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센터에서 보관해야 할 양이 많지 않다는 최창봉의 의견을 받아들여서였다.

서귀포 지킴이 사업도 같이 시작하기로 해서 직원을 먼저 선발하고 제주 센터의 일을 도우면서 배우게 했다.

바쁜 진혁을 위해 양가 부모님은 물론 희준까지 휴가를 제주도로 오는 바람에 며칠은 정신없이 보내야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혜주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피로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서귀포 동행이 정식 출범하는 날이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