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40화 (140/307)

140화. 풋귤, 청귤

서귀포 동행의 초기 조합원도 천 명으로 했다.

그 열 배가 넘는 농가가 신청을 했는데, 소규모로 형편이 어려운 농민부터 우선 선발했다.

서귀포는 제주도의 대표 작물인 감귤의 주산지라 감귤 농장주들이 절반도 넘었다.

이제 동행 사업은 제주 농민들 사이에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겨서 이번 출범식 행사에는 기자들이 많이 참석했다.

입구에는 정치인을 시작으로 지역에서 한자리한다는 사람들의 화환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직접 참석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혁이 철저히 막아서였다.

화환도 받지 않고 싶었지만 너무 과한 처사라는 우상우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진혁의 축사는 짧았다. 동행의 의미와 지킴이들의 역할을 설명하고 당부한 뒤 내려왔다.

공식 행사가 끝나고 이어진 연회에서 최창봉이 그 부분을 언급하며 앓는 소리를 했다.

“회장님이 축사를 너무 짧게 끝내는 바람에 갑자기 준비하지 않은 말을 하느라 혼났습니다.”

“여기를 이끌어 가실 분은 센터장입니다. 서귀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주절거리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저는 조력자고, 주인은 센터장님과 조합원들입니다.”

“알겠습니다. 농민의 손을 꼭 붙잡고 회장님 뒤만 졸졸 따라 가겠습니다.”

최창봉의 위트 있는 답변에 다들 웃었다.

한편 제주 동행에서는 우상우의 합류로 그동안 미뤘던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조합원은 물론 희망자는 모두 참석하게 했다.

양쪽 조합원들에게 희망하는 교육 과정을 조사했는데,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 오픈 마켓 활용법이었다.

제주 동행의 성공으로 온라인 판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서였다.

강사는 당연히 지민이었다.

덕분에 혜주를 돌보는 일은 진혁이 해야 했다.

혜주와 인형놀이를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집에 들어와서는 가능하면 받지 않는데 긴 번호를 확인하고 받았다.

스미스였다.

연결되자마자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마침내 3,000선이 무너졌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미스터 서가 예측하신 대로 고가주들의 낙폭이 가장 컸습니다. 평균 네 배 정도의 수익이 발생해 잔고가 5억 달러가 됐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진혁은 미리 알고 있었던 상황이라 큰 감흥이 없었는데 스미스는 아니었다.

불과 세 달 전까지 잊힌 존재로 지내야 했었다. 투자 의견서를 발표할 때만 해도 마지막 발악을 한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만나지 못해 안달을 하는 최고의 펀드 매니저로 대접받고 있었다.

진혁이 말이 없자 스미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메만 회장님이 감사 인사를 드리겠다는 것을 제가 말렸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지금은 조용히 지내는 게 좋습니다.”

-그럼 언제쯤이나 뵐 수 있는 겁니까?

“이곳에서 벌이는 사업이 있어서 딱히 언제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가까운 미래는 아닐 겁니다.”

-그러시군요.

스미스가 실망하면서도 전화를 끊지 않는 이유를 알기에 이번에는 진혁이 먼저 말했다.

“잠시 잠깐 반등은 있겠지만 다시 크게 하락할 겁니다. 그러니 몇 개월간 투자는 쉬겠습니다. 그때 또 연락드리지요.”

-알겠습니다. 연락 주시기를 학수고대하겠습니다.

스미스와 통화를 끝낸 진혁이 바로 알라딘 홀딩스의 야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기다렸습니다, 회장님.

“현재 계좌 상황이 어떻습니까?”

-오늘 종가로 청산한다면 안시 교육은 일곱 배, 치안둥 정보는 다섯 배 수익이 발생합니다. 신용 대출을 이용해 2천 5백만 달러를 투자해서 총 1억 5천 달러의 수익을 얻게 되십니다.

“장이 시작되면 전량 매도해 주시고 바로 일반 거래로 우량 종목에 분산 투자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연말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전화를 끊었다.

스미스에게 맡긴 것은 개인 계좌라 쉬겠다고 했지만, 기부 펀드는 여러 사람이 모아 준 소중한 돈이었다.

자신의 개인 사정으로 2년 가까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음의 빚을 갚으려면 최대한 운용해 수익을 내야 했다.

* * *

다음 날,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우상우가 난감한 표정으로 깔끔하게 양복 입은 중년 사내를 데리고 들어왔다.

“도지사님을 모시고 있는 남태현 비서실장입니다.”

“서진혁입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진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불필요한 외부 인사는 만나지 않겠다고 공언했는데, 도지사 비서실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우상우가 거절을 못 하고 데려온 모양이었다.

“서 회장님이 하시는 훌륭한 일을 보고 받으신 도지사님께서 감사의 의미로 식사 대접을 하고 싶어 하셔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제가 하는 일을 좋게 평가해 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그게 도지사님을 위해 한 일이 아니니 감사를 받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서로 바쁘니 말씀만 감사히 받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돌려 말했지만 결국 거절이라 남태현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제주도에서 이런 식의 대접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차는커녕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당장 호통을 쳤겠지만 서진혁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현재 제주도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하나였다.

겨우 화를 참고 몇 번 더 청했지만 진혁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남태현이 포기하고 가져온 서류를 건네줬다.

“농림식품부에서 주최하는 6차 산업화 우수 제품 품평회에 대한 제주도 예심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서 회장님도 참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해서 자체 생산 제품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다음번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한가해지면 연락 한번 주십시오.”

결국 남태현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기분을 잡친 진혁은 일어난 김에 창고 상황을 둘러보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때 남태현이 두고 간 서류가 보였다.

가공 식품까지 생각하고 있어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알아 두면 좋을 것 같아서 읽어 봤다.

6차 산업화 우수 제품 품평회는 각 지자체의 예심을 거쳐 올라온 150여 개에 대해 전문가의 심사를 거쳐 순위를 정하는 방식이었다.

품평회 결과 40위까지의 우수 제품에 대해서는 중앙 정부 차원의 기획 판매전 참가, 우수 제품 홍보물 웹 카탈로그 제작, 대형 마트 입점 지원 등의 인센티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런 외형적인 지원보다 제품의 신뢰도 및 인지도가 높아져 매출이 증대 효과가 높아질 것이란 점이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제주도는 중앙 정부의 인센티브와는 별개로 도내 대형 마트 3개점에 선정된 제품들을 입점시키겠다고 했다.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선보여 판로를 확대할 방침도 적혀 있었다.

“괜찮네.”

서류를 덮으며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이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신청 기간이 열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후에는 우상우와 함께 서귀포 센터로 갔다. 북적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적막할 정도로 휑한 모습에 인적도 없었다.

사무실로 가자 최창봉만이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반겼다.

“다들 어디 가시고 아무도 안 계시는 겁니까?”

“감귤 수확하느라 바쁩니다.”

“노지 감귤 수확은 9월 말이나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작업하는 것은 풋귤입니다. 보십시오. 아직 덜 익어서 초록색이잖습니까.”

최창봉이 테이블 위에 있던 초록색귤을 건넸다.

“덜 익은 것을 왜 벌써 수확한답니까?”

“이게 요즘 소비자들 사이에 인기입니다.”

제주도에 내려온 한 여자 연예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풋귤로 차를 만들어 먹는 것을 올렸는데, 일반인들이 따라 하면서 최근 풋귤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은 청귤이라고 부릅니다. 요즘 감귤 농가의 짭짤한 소득원이 되고 있습니다.”

서귀포 출신이라 우상우가 다음 말을 이었다.

“청귤은 비타민C가 풍부하여 면역력 강화, 피부 미용, 감기 예방에 좋습니다. 카로티노이드 성분과 펙틴이 함유돼 있어 노화를 예방하고, 혈관을 깨끗하게 만들어 혈액 순환에도 도움이 되고, 고지혈증이나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사람에게도 좋습니다. 식욕이 없을 때나 배가 더부룩하여 소화가 잘 안될 때 먹어도 좋습니다.”

“거의 만병통치약 수준이네요.”

“효능 면에서는 익은 감귤보다 좋습니다. 다만 덜 익은 것이라 쓴맛이 나서 일반적으로 청으로 담근 후 한 달 정도 숙성시켜서 먹습니다. 한번 맛보십시오.”

최창봉이 청귤청이 담긴 유리병을 가지고 가 차로 내왔다.

맛이 시큼하면서 달달한 게 괜찮았다.

진혁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의문점을 털어놨다.

“수확한 감귤은 이곳에서 공동 작업하기로 해서 비싼 선별기까지 구비했는데 왜 각 농가에서 합니까?”

“그게 실은 불법이라 그렇습니다.”

씁쓸한 표정으로 최창봉이 사정을 들려주었다.

제주도는 불량 감귤의 유통을 막기 위해 ‘제주특별자치도 감귤 생산 및 유통에 관한 조례’에 따라 비상품 감귤에 대한 유통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청귤은 미숙과로 비상품 감귤로 분류되어, 개인이 생귤로 판매하면 안 되거든요.”

“전혀 방법이 없는 겁니까?”

“농협을 통해 가공용 감귤로 허가받는 게 유일한 방법이지만 가격 차이가 심합니다.”

현재 청귤은 5킬로당 만 원에서 만 오천 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농협의 가공용 감귤 수매가는 1킬로에 160원으로 12~18배가량 수익에 차이가 났다.

진혁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감귤 농가들은 뭘 했답니까?”

“지속적으로 허용해 달라며 요청했지만 하우스 재배 농가에서 반대가 심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청귤은 노지 감귤에만 해당되는지라, 하우스로 고품종을 재배하는 농가에서는 자신들의 생산 품종 미숙과까지 유통되어 피해를 볼 수 있다며 반대를 하고 있었다.

결국 같은 농민끼리 밥 그릇 싸움을 하는 상황이라 공무원들은 합의를 해 오라며 남의 집 불구경하듯 뒷짐 지고 있었다.

진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동행을 결성한 이유가 바로 이런 일을 방지하고자 하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합의를 이끌어 내세요.”

“노력해 보겠습니다만 솔직히 쉬운 상황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이라도 세우시든지…….”

진혁이 갑자기 말을 끊고 청귤청이 담긴 유리병을 들어 살피는 모습에 우상우가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요. 참, 농가에 나간 직원들은 모두 불러들이십시오. 사정이 어떻든 불법적인 일에 관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한창 작업 중일 텐데.”

“안 됩니다. 한번 사정을 봐주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크게 문제가 됩니다. 만일 이런 조치에 불만이 있는 조합원이 있다면 출자금 돌려주고 내보세요.”

“그건 회장님의 말씀이 맞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법을 지키지 않으면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게 된다. 그건 이곳만이 아니라 앞으로 생길 모든 센터를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다.”

우상우까지 강하게 말하자 최창봉이 수긍을 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철수하게 하겠습니다.”

“우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지켜보시다 오십시오. 전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

진혁은 혼자 차를 몰아 서둘러 제주 센터로 돌아왔다.

“공장장님! 공장장님!”

갑자기 뛰어 들어와 소리치는 진혁의 모습에 권기남은 물론 다른 직원들도 놀라 달려왔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