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신제품 개발
“잠시만요. 헉헉…….”
진혁이 가쁜 숨을 쉬는 모습에 지민이 얼른 물을 내밀었다.
“일단 이거부터 마시고 천천히 말씀하세요.”
“고맙소.”
벌컥벌컥 마시는 진혁의 목젖을 보며 다들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이고, 이제 살겠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리 호들갑이네?”
“이걸 만들어 주셔야겠습니다.”
“이기 뭐꼬?”
“청귤청이네요.”
함난숙이 바로 알아봤다.
“아시네요?”
“그럼요. 요즘 이거 모르면 간첩이에요.”
“험험…….”
괜히 권기남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건 말건 진혁이 재촉했다.
“암튼 이거 만드실 수 있죠?”
“썰어서 설탕이랑 버물려서 넣기만 하면 되겠구만. 너도 만들 수 있지 않니?”
“네. 저도 집에서 만들어서 먹어요.”
함난숙의 답변에 권기남이 당장 눈꼬리를 올리고 진혁에게 쏘아붙였다.
“이런 간단한 것을 만들어 달라고 그 난리를 피운 거냐?”
“이게 아니라 이 안에 숙성된 청귤 슬라이스를 젤리 같은 정과 형태로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진작에 그렇게 말했어야지.”
권기남은 병을 가져다가 뚜껑을 열어 안의 내용물을 꺼내 만지더니 맛까지 보고 말했다.
“적당한 건조 강도만 찾아내면 되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 당장 시작해 주세요.”
“그건 안 돼.”
“이게 급하다니까요. 저기 건조기도 있잖아요.”
대용량 고추 건조기를 가리키며 재촉하는 진혁의 모습에 권기남이 혀를 찼다.
“에라이, 무식한 놈아. 말린다고 다 같은 게 아니다.”
“아, 좀 자세히 이야기해 봐요.”
마음이 급한 진혁이라 볼멘소리부터 나왔다.
“저건 고온 열풍 건조기야. 저걸 쓰면 열에 약한 영양소들이 파괴돼. 그래서 이것은 진공 상태에서 동결 건조해야 하는 기야. 영하 40도 이하로 급속 냉각시킨 후 진공 상태에서 빠르게 수분을 날려야 열에 약한 영양분까지 모두 보존할 수 있어.”
“우와…….”
듣고 있던 직원들이 모두 엄지를 척 세우고 감탄을 터트렸다. 맨날 야단만 치는 노인인 줄 알았는데 진혁이 초빙한 이유가 있었다.
우쭐해진 권기남이 입을 열었다.
“자식들. 이 정도 가지고, 뭘. 진공 동결 건조기만 도착하면 바로 시작할 테니 걱정 마라. 그런데 언제까지 만들어 주면 되냐?”
“10일. 아니, 오늘도 다 갔으니 이제 9일 남았네요.”
“도대체 네놈은……!”
“이보다 더 촉박할 때도 많았잖아요. 뭘 이 정도로 앓는 소리를 하세요.”
“이놈아! 그때는 한창 때였잖아.”
“저번에도 저보다 더 힘이 세다고 큰소리쳤잖아요. 그거 다 뻥이셨어요?”
“끙……. 기계나 빨리 수배해 봐라.”
자신이 한 말이 있기에 권기남이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권기남이 떠나자 다들 있던 자리로 돌아갔는데 지민만이 남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이 촉박한데 어떻게 구하시려고요?”
“그거야 당연히 주문……. 아.”
그제야 지민이 걱정하는 이유를 알았다.
제주도에서 제일 불편한 것은, 섬이다 보니 물건이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서울에서는 급하면 직접 달려가서 받아오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특히나 진공 동결 건조기는 산업용 기계라 주문 제작이 기본이고 부피가 있어 항공으로 받을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머리에 번뜩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어쩐 일이십니까?
오존메이드의 홍준기 사장이었다.
“진공 동결 건조기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시급히.”
-즉시 알아보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는 진혁의 추진력을 직접 경험한 터라 군말을 하지 않아도 돼 편했다.
홍준기는 30분도 되지 않아서 전화를 했다.
-마침 여기에 가공 식품을 연구하는 회사가 있어 가지고 있답니다. 필요하실 때 언제든지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권기남의 손을 끌고 제주대학교 창업 보육 센터로 갔다.
홍준기의 안내로 찾아간 연구실에는 진공 동결 건조기가 세 대나 있었다.
기계를 꼼꼼히 살펴본 권기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이 사장에게 물었다.
“진공 동결 건조기를 일주일 정도 가져다가 사용할 수는 없겠습니까?”
“가능합니다만 차라리 여기서 제품을 만드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웬만한 것들은 다 준비되어 있으니 편하게 사용해도 됩니다.”
시선을 마주친 권기남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 홍 사장님께 어떤 분인지 들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시는데 이렇게라도 도움이 된다니 저도 기쁩니다. 편하게 사용하시고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또 이렇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인연으로 어려운 일이 해결됐다.
권기남이 창업 보육 센터 연구실에서 제품을 개발하는 동안 진혁과 직원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제품만 만든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제품 이름도 정해야 하고, 적당한 포장 용기를 구하고, 디자인 작업도 해야 했다. 상표권 등록에 따른 행정적인 처리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러는 한편 중간 중간 실험체가 되어 시음도 해야 했다.
그렇게 모두가 매달려 마감 시간 직전에 ‘제주로 동행’이란 상표로 청귤청, 청귤정, 청귤말랭이 세 제품을 품평회에 내보낼 수 있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모두가 정신없이 매달려 달려온 열흘이었다.
그날은 목요일이라 진혁은 퇴근 후 직원 회식을 열어 주고 다음 날을 휴무로 정해 3일간 쉬게 해 줬다.
진혁도 지민과 함께 혜주와 내내 붙어있으며 휴식을 취했다.
그런 정성이 통했는지 청귤정, 청귤말랭이가 본선에 올라 각각 3위와 38위를 차지했다.
청귤청은 보편화된 제품이라 선정에서 제외되었다.
공동 1위에는 ‘뚜리모’와 ‘제주미로’라는 청귤청으로 만든 음료 제품이 선정되었다.
청귤 관련 제품이 1~3위를 휩쓸어 청귤 열풍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서귀포 동행은 당연히 축제 분위기였다.
진혁은 감귤의 주산지가 서귀포인 것을 감안해 상표권 등록을 이곳 센터 이름으로 했다.
노지 귤의 출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바쁠 텐데도 다들 모여 축하를 해 줬다.
고생한 제주 동행 식구들도 모두 건너와 축하를 받았다.
술을 한잔했는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최창봉이 다가와 머리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같이 한 일입니다. 앞으로는 그런 과한 인사는 자제해 주십시오.”
“그래도…….”
“좋은 아이디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센터장님.”
갑자기 진혁이 최창봉과 마찬가지로 90도 인사를 하자 최창봉은 물론 지켜보던 다른 이들이 놀라 얼른 말렸다.
“아이고, 회장님. 이러시면 안 되지요.”
“제가 회장이니 인사를 받아도 되고 센터장님은 아랫사람이니 제 인사를 받으면 안 됩니까? 동행의 식구들은 모두가 평등합니다. 각자 맡은 역할만 다를 뿐이지, 수직 관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번 성과는 동행 식구 모두에게 그 혜택이 돌아갈 겁니다. 이 제품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건 직접 참여한 분 외에도 다른 직원 분들과 조합원들이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준 덕분입니다. 감사를 받아야 한다면 여기 계신 모든 분이 받는 게 맞습니다.”
“하하하하. 맞습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며 인사를 나누었다.
진혁의 위트 있는 말과 우상의 눈치 있는 마무리로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피했다.
다들 다시 웃는 얼굴로 자리를 뜨자 진혁이 우상우에게 말했다.
“급하게 준비한 거라 시간이 촉박합니다. 최 센터장님은 감귤 출하로 여유가 없으실 테니 우 선생님이 공장 건축을 맡아 주십시오. 설비는 권기남 공장장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최고의 공장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하여튼 저놈의 아새끼는 내가 쉬는 꼴을 못 봐. 사람 부려 먹는 대회가 있으면 1등은 따 놓은 당상일 거야.”
권기남의 투덜거림에 다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진혁이 모두를 둘러보고 말했다.
“좋은 제품을 개발하는 것과 그것을 소비자가 선택하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정부 주도 품평회의 입상이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제품보다 더 좋은 많은 제품들이 결국은 소비자에게 외면당해 소리 소문 없이 사장되었음은 익히 아실 겁니다.”
“…….”
“우리 농민들이 피땀 흘려 가꾼 농산물로 다들 달라붙어 어렵게 만든 자식 같은 제품입니다. 이 아이가 소비자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도록 다들 고민해 주십시오. 좋은 아이디어는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듣고 있던 이들이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며 의지를 다졌다.
* * *
서귀포 센터의 비어 있는 땅에 공장 건설이 시작되었다.
우상우와 권기남은 아예 이쪽으로 출근했고 진혁도 시간이 날 때마다 들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서귀포 센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는 있지만 힘이 없었다.
노지 감귤 값이 폭락하고 있었다.
수확기에 비가 자주 내려 작황이 좋지 않으니 가격이 좋을 거라고 예상한 터라 충격이 더 컸다.
중국 증시 폭락에 따른 경기 위축으로 소비가 준 데다, 수입산 열대 과일에 시장을 빼앗긴 영향 때문이었다.
기록적인 속도로 공장 건설을 완료했지만 개소식은 취소했다.
노지 감귤 한 상자의 상품 가격이 손익 분기점 9,000원 미만으로 떨어지자 도청은 또다시 전가의 보도인 ‘산지 폐기’를 결정했다.
예비비 32억 원을 들여 우선 2만 톤을 농가별로 신청받고, 가공용 감귤 가격인 1킬로에 160원이라는 헐값을 지급한다는 결정에 다들 일손을 놓고 도청 앞으로 달려가 시위하고 있었다.
최창봉 센터장도 조합원들과 참석하느라 자리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개소식을 여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참 빌어먹을 놈의 세상이다. 내가 농사를 안 지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도 예전에 가르친 제자들이 가끔 전화 와서 귀농하겠다고 하면 말리고 있습니다.”
권기남에 이어 우상우마저 힘없는 목소리를 내자 진혁이 일어나 벌떡 일어나 손바닥을 마주쳤다.
“자, 자, 이렇게 넋 놓고 앉아 입으로 떠든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니 우리는 우리 일을 합시다.”
“간만에 옳은 소리 한다. 6・25 전쟁이 터지자 세상이 다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좋은 날이 오더라고.”
“맞습니다. 추운 날씨에 시위하느라 고생한 동행 식구들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제품을 생산합시다.”
제품 생산을 위한 모든 준비는 완료되어 있었다.
청귤청은 조합원들이 미리 담아 놓아 충분히 숙성시켜 놓았고, 비감귤 농가 조합원 중 일부가 제품 생산을 돕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우상우와 권기남의 감독하게 본격적으로 ‘제주로 동행’ 청귤정과 청귤말랭이 제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작업이 안정화되는 모습에 진혁이 다시 두 사람을 불렀다.
“공장장님은 한 가지 더 해 주실 게 있습니다.”
“또? 좀 천천히 하자우.”
“이번 건은 별로 어려운 게 아닙니다.”
“네놈이 언제 쉽다고 말하고 시작했냐? 그 말에 속아 뼈 빠지게 고생한 게 한두 번인 줄 아뉘?”
“끙…….”
권기남의 투덜거림에 진혁이 앓은 소리만 내고 더 이상 조르지 못했다. 지은 죄가 많았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한 권기남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뭐꼬?”
“쉬신다면서요.”
“네놈을 봐서는 절대 해 주고 싶지 않지만, 분명 우리 식구들을 위한 일일 낀데 쉰다고 맘이 편하겠니? 얼른 처리하고 편히 쉬고 싶으니 말해 보라우.”
“익은 노지 감귤로도 정과 말랭이를 만들어 주십시오.”
“당도가 충분히 올라와 있으니 따로 숙성 필요는 없겠네. 오래 걸리지 않을 끼니 걱정 말아라.”
권기남의 밝은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우상우가 우려의 말을 꺼냈다.
“숙성과로 정과 말랭이를 만드는 것은 재고해 주십시오.”
“왜요?”
“감귤 사용처 다양화 사업의 일환으로 다른 곳에서 비슷한 제품을 여러 개 선보여 판매했는데 반응이 시원치 않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냥 포기하면 끝입니까? 우리를 믿고 함께 걸어가고 있는 동행의 가족들에게 각자 알아서 살 궁리를 하라고 하실 겁니까?”
진혁의 목소리가 어느새 날카로워져 있었다.
우상우가 고개를 숙이고 답을 못하자 잠시 노려보던 진혁이 말을 이었다.
“함께 걸어가다가 산이 가로막으면 터널을 뚫고, 바다가 나타나면 배를 만들어서라도 건너야 합니다. 우리가 포기하는 순간 내 가족들의 목숨은 사라집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생각해 놓은 판로가 있으니 걱정 마시고 제대로 된 제품만 만들어 주십시오. 파는 것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고럼, 고럼. 저놈이 일 벌이는 데 재주가 있듯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일가견이 있다. 그러니 너랑 나랑은 판매는 저놈에게 맡기고 제품 생산에만 집중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다시 작업에 투입되자 진혁은 일어나 제주 센터로 돌아왔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이수호가 쭈삣거리는 모습으로 들어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외부 손님은 안 만나다고 했잖아.”
“저도 압니다만, 이번 분은 만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