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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42화 (142/307)

142화. 세상은 넓다

중년의 부부와 모자를 쓴 여자아이였다.

자리에 앉자 남자가 소개했다.

“홍재학입니다.”

“서진혁입니다.”

“여기는 제 딸 채린이입니다.”

“예. 그런데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여자아이는 쳐다보지 않고 묻는 진혁의 모습에 이수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형님. 채린 씨잖아요.”

“……?”

“하이디의 채린……. 설마 형님 모르세요?”

“험, 험.”

“아니, 형님. 어떻게 요즘 가장 핫한 걸 그룹을 모르실 수가 있습니까?”

“사업하느라 바쁘시면 그러실 수도 있지요.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홍재학이 오히려 흥분한 이수호를 말렸다.

진혁이 그제야 채린이를 자세히 보았다. 예쁘긴 예뻤다. 모자를 쓴 게 팬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홍재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서귀포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마쳤습니다. 서울로 유학 가면서 제주도를 떠났는데, 부모님은 지금도 감귤 농사를 짓고 있고요. 채린이 활동 때문에 오랜만에 왔다가 회장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주도 출신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이곳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말씀은 거두십시오.”

진혁의 진솔한 모습에 홍재학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노지 감귤 값 폭락 때문에 농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더군요. 부모님이 연세가 드셔서 못 나가셨다고 마음 아파하시면서, 대신 저 보고 서 회장님을 도와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번에 청귤 관련 제품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기사를 봤어요. 혹시 모델 필요하지 않으세요?”

“설마……?”

“부모님 말씀을 듣고 채린이도 흔쾌히 승낙한 일입니다. 소속사의 동의도 받았습니다.”

“저희야 고맙지만…….”

구미는 당겼지만 진혁은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유명한 걸 그룹이라면 모델료만도 엄청날 게 분명했다.

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청귤 제품 모델료치고는 과해도 너무 과한 느낌이었다.

진혁이 주저하자 채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청귤이 좋다는 것을 알기에 자주 애용하고 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마음 아파 하는 것도 돕고 싶고요. 제가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모델료 걱정은 마세요.”

“……?”

“어렸을 때 할머니가 절 제일 예뻐해 주셨어요. 제가 떠날 때면 제일 잘 익은 감귤을 손수 따다 몰래 쥐여 주시곤 하셨어요. 그런데 요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세요. 할머니가 다시 웃는 모습을 보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뜻이 그러시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동행 가족들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쁜 얼굴인데 활짝 웃자 천사가 따로 없었다.

광고 계획을 세워 다시 보기로 하고 채린이네 가족이 떠났다.

물론 진혁과 이수호가 밖에까지 나가 배웅을 했다.

“얼굴이 예쁘면 얼굴값을 한다는데 완전 틀린 말이네요. 마음씨도 얼굴만큼 예쁘네요.”

“라이나 왕비님도 한 미모 하시는데 마음은 그보다 예쁘신 분이다. 마음을 좋게 쓰니 늙지 않는 것 같다.”

“누가 남편이 될지 모르지만 엄청 부럽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은 더 예쁜 분이랑 살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당연하지. 얼굴만 보고 있어도 배부를 거야.”

“에효…….”

“일이나 하자…….”

한숨을 푹 내쉬며 돌아선 두 사람은 기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끼눈을 뜨고 있는 지민과 난숙이 바로 뒤에 있었다.

그들 뒤로 다른 직원들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굴이 미운 나는 마음도 밉겠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예쁜 얼굴 많이 봐서 배부를 테니 오늘 저녁은 굶으세요. 못생긴 우리는 이만 가요.”

“여보!”

지민과 난숙이 돌아서 가자 진혁과 수호가 얼른 뒤따라가며 잘못했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 모습에 직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입 한번 잘못 놀린 대가로 진혁과 수호는 며칠을 시달려야 했다.

* * *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권기남은 며칠 만에 숙성과로 만들어진 제품을 내놓았다.

모여 있던 직원들은 설탕이 유독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권기남의 실력을 알기에 서둘러 입에 넣었다.

“윽, 뭐야.”

“우웩. 퉤퉤.”

일제히 인상을 찌푸리며 물을 찾았다.

설탕 덩어리였다.

그 모습에 진혁과 권기남이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도 처음 먹었을 때 저런 반응을 보였으니 제대로 만들어진 게 확인되었다.

입을 헹군 우상우가 화부터 냈다.

“이걸 누가 먹겠습니까? 차라리 사탕으로 만드는 게 낫겠습니다.”

“먹을 사람 많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에이, 회장님도 농담을.”

말을 하던 우상우의 눈에 공장으로 들어오는 낯선 외국인들이 보였다.

“어, 누구지?”

“누구…….”

고개를 돌렸던 진혁이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갔다.

“السلام عليكم. (신의 가호가 있기를.)”

“وعليكم السلام. (당신에게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들과 서로 아랍식 인사를 나누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무크린입니다. 알라를 모시는 사람으로서 서 회장님의 일을 돕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저를 돕고 싶으면 철저히 검사해 주십시오.”

“나흐얀 이맘께서 회장님이시면 능히 그리 말씀하실 거라 하셨습니다.”

“잘 계시지요?”

“이맘께서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실 테니 신의 뜻에 따르라 하셨습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인샬라.”

할랄 인증을 위해 서울 모스크에서 나온 이들이었다.

그들을 안내해 안으로 들어가던 진혁이 방금 전 시음을 위해 내놓은 제품을 보고 말했다.

“이번에 인증받을 제품인데 먼저 맛을 좀 봐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나흐얀과 함께 온 이가 맛을 보고 평했다.

“더 딱딱했으면 좋겠습니다.”

“음…… 설탕이 덜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 소리에 방금 전 헛구역질을 했던 이들이 졸도할 뻔했다.

그들에게 진혁은 나흐얀이 온 이유와 할랄 인증에 대해 들려주었다.

“청귤은 물론 숙성과로 만든 제품도 전량 수출할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할랄 인증은 반드시 필요하니, 다들 검사에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답을 하면서도 다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진혁이 설마 수출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다.

숙성과로 만든 제품은 ‘금귤’로 이름을 정해 상표권도 등록했다.

무크린은 약속대로 철저하게 조사를 했다.

농약 잔류 검사는 기본이고, 농가를 직접 방문해 사용하는 농약의 성분까지 꼼꼼히 살폈다. 용기의 재질은 물론 포장지와 안에 들어가는 방습제의 성분서까지 요구했다.

할랄 인증을 최창봉에게 맡기고 그사이 진혁은 우상우와 함께 한영식품을 찾아갔다.

6차 산업화 우수 제품 품평회에서 공동 1위를 차지한 청귤 음료 ‘제주미로’를 만드는 회사였다.

사장인 정민국이 반갑게 맞았다.

“1위 입상을 축하드립니다.”

“‘제주로 동행’의 좋은 결과도 축하드립니다.”

만난 것은 처음이었지만 같은 청귤제품을 취급하고 있어 이름은 여러 번 들었다.

“서 회장님의 전화를 받고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고 경쟁이 되는 제품을 생산하시는 분이라서요.”

“경쟁이라니요. 감히 3위가 어떻게 1위를 넘보겠습니까?”

“1위나 3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힘없는 소기업 제품을 만들고 있으니.”

“맞습니다. 우리끼리의 경쟁은 의미가 없지요.”

대한민국 소기업인들의 한계였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판로를 확보하지 못해 좌절하고, 좀 팔린다 싶으면 비슷한 제품이 바로 시장에 나와 오래가지 못했다.

조금만 성공해도 자금력을 앞세운 대기업에 울며 겨자 먹기로 빼앗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정민국이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판매 계획은 세우셨습니까?”

“1위를 한 덕분인지 여기저기서 연락이 와 상담을 했는데 단가를 너무 낮게 요구해 고민 중입니다. 회장님 쪽은 어떠십니까?”

“전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 위주로 판매할 작정입니다. 그리고 수출을 할 생각입니다.”

“수출을요?”

정민국이 놀라 물었다. 자신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아시겠지만 제가 그쪽에서 사업했던 인연이 있어서요.”

“아, 중동과 동남아에서 크게 기업을 운영하셨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역시 스케일이 저랑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국내 판매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압니다만 저 같은 소규모 기업인들은 수출 루트를 뚫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정부가 도와준다지만 결국 모든 준비는 우리가 해야 하거든요.”

이번만 해도 수출을 지원해 준다고 했지만 해외 박람회에 형식적으로 전시하는 것이 다였다.

수출 관련 서류는 물론 현지 바이어의 발굴도 해당 회사가 직접 해야 했다.

그들이 해 주는 것이라고는 도장을 찍어주는 것뿐이었다.

진혁이 이런저런 어려움을 토로하는 정민국에게 말했다.

“제가 ‘제주미로’를 중동과 동남아에 수출하겠습니다. 해당 지역의 해외 판매권을 주십사 하고 찾아온 겁니다.”

“그러면 저야 좋지만, 굳이 ‘제주미로’가 아니어도 회장님은 직접 청귤 음료를 만드실 역량이 되시지 않습니까?”

“물론 만들 수 있습니다. 솔직히 그럴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동행. 우리 협동조합 이름이면서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농민들만이 아니라 우리 같은 농산물 관련 소기업들도 함께 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장님이 ‘제주미로’라는 좋은 제품을 이미 만들어 놓으셨는데 제가 따로 만드는 것은 동행 정신에 위배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그런 이유라면 저는 대찬성입니다. 당연히 드리겠습니다.”

정민국이 혼괘히 승낙했다.

어차피 그는 수출은 엄두도 못 내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알아서 팔아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진혁은 해당 지역에 수출을 위해서는 할랄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무크린이 온 김에 함께 받도록 했다.

물론 모든 비용은 진혁이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계약서를 쓰고 나오면서 우상우가 물었다.

“채린 씨가 모델을 해 주기로 했다는 말씀만 하시면 먼저 찾아와서 부탁할 텐데 왜 함구하신 겁니까?”

“조건에 혹해 맺어진 관계는 그게 없어지는 순간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순수하게 서로 필요에 의한 관계가 오래갑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정 사장님은 본인은 모르겠지만 좋은 기회를 잡은 겁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기회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뚜리모’의 사장은 처음부터 떨떠름한 표정으로 맞더니 해외 판매권 이야기가 나오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진혁도 두말없이 일어나 나왔다.

같이 갈 마음이 없는 사람까지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날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무크린에게 진혁은 샘플 제품을 건네주며 신도들을 상대로 선호도 조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할랄 인증 통과를 확신하며 이후부터 본격적인 판매 준비를 했다.

그 첫걸음은 채린을 모델로 한 광고 제작이었다.

그렇다고 유명한 광고 제작사에 의뢰해서 찍은 것은 아니었다.

TV를 통한 대대적인 미디어 홍보를 할 것이 아니기에 제주도의 빈 별장을 이용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제작했다.

소속사와 이야기가 잘되었는지 심지어 하이디의 다른 멤버들까지 고맙게도 함께 참여해 줬다.

그리고 금귤과 청귤 제품은 물론 ‘제주미로’의 할랄 인증서가 도착하자 본격적인 수출 물량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국내 판매용도 함께 만들어야 하니 공장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펜션에 일단의 사내들이 도착했다.

우상우가 가르쳤던 각 지역의 귀농인 제자들이었다. 총 열 명으로 우상우에게 동행 이야기를 듣고 뜻을 함께하겠다며 찾아왔다.

진혁은 그들에게 한 달간 펜션에 머물면서 두 곳 센터의 일을 돕고, 자기 지역에 맞는 사업 모델을 작성하게 했다.

* * *

크리스마스 연휴 때 진혁은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 다녀와야 했다.

희준과 지현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식만 참석하고 진혁은 바로 내려와야 했다. 서귀포 센터 일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대신 지민이 혜주와 함께 연말연시를 친정에서 보내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퇴근해서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온 진혁이 오랜만에 알라딘 홀딩스의 야맘 사장과 통화를 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장님. 그동안 20%의 수익이 나서 2억 천만 달러가 됐습니다.

“내일 전량 매도해 주시고 내년 장이 시작하자마자 1월 말 지수 선물로 레버리지를 풀로 해서 매도해 주십시오.”

-1월 말 지수 선물 매도. 알겠습니다.

“만기일까지 가져갈 것이니 따로 연락드리지 않겠습니다. 새해에 뵙겠습니다.”

-회장님도 즐거운 연말연시 되십시오.

통화를 끝내고 바로 스미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 사이에 형식적인 인사는 무의미했다.

바로 본론을 말했다.

“올해 폐장 직전에 내년 2월 말 지수 선물로 매도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신용을 사용해 풀로 갑니다.”

-헉, 풀로요?

“아침이 오기 전 새벽이 제일 어둡지요. 이번을 끝으로 중국 주식 시장의 투자는 접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새해 인사를 서로 나누고 통화를 마쳤다.

스미스에게는 약간 다르게 말한 것은 너무 정확히 맞추면 의심받을 수 있어서였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1월을 대폭락으로 2월부터는 큰 변화 없이 횡보 장세가 이어지기 때문에 수익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새해 첫 거래일.

세계 금융 시장이 요동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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