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일손 부려먹기
“여기 이러고 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가요.”
최창봉을 다시 잡아끌고 밖으로 나왔다.
우상우도 뒤를 따랐다.
정문에 도착하자 전투 경찰이 길을 막았다.
“도지사가 요청해서 만나러 오는 길이오.”
안으로 연락을 해 확인하고 길을 열어 줬다.
도지사실은 3층에 있었다.
비서실장 남태현이 웃는 얼굴로 다가오다가 최창봉의 모습을 보고 굳어졌다.
“이분은 안 됩니다.”
“머리띠는 푸십시오.”
최창봉이 머리띠를 풀어 주머니에 넣자 진혁이 남태현에게 말했다.
“싸우러 온 게 아니니 이 정도로 합시다. 그래도 안 된다면 나도 돌아가겠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결국 남태현이 물러났다.
부혜성 도지사는 40대 후반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부혜성입니다.”
“서진혁입니다. 여기는 저와 같이 일하는 이들입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직원이 차를 내왔다.
“그렇게 연락드려도 거절하시더니 어쩐 일이십니까?”
“지금의 사태를 언제까지 두고 보실 겁니까?”
“우리도 풀고 싶습니다만 들어줄 수 없는 요구들을 하시니…….”
“먹고살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그럼 죽으라는 겁니까?”
“조용히 하세요.”
최창봉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진혁이 막았다. 부혜성 옆에 앉은 남태현이 호통치려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최창봉에게 물었다.
“요구 조건이 뭡니까?”
“가장 먼저 가공용 감귤의 수매 물량 확대입니다. 최소 10톤은 해 줘야 겨우 숨통이 트입니다.”
이번에는 부혜성에게 물었다.
“얼마나 사 주실 수 있으십니까?”
“발표한 대로 2톤이 한계입니다.”
“예비비라는 게 있을 거 아닙니까?”
“그게 남아 있는 예비비 전부입니다. 더 이상 여력이 안 됩니다.”
“뭔 구멍가게도 아니고…….”
도지사실을 빙 둘러보고 혼자 말처럼 투덜거리는 진혁의 모습에 부혜성의 얼굴이 벌게졌다.
“8톤.”
다시 나서려던 남태현이 갑작스런 진혁의 말에 멈칫했다.
“도에서 약속한 2톤에 우리가 6톤.”
“회장님!”
“2톤은 감귤 농가에서 불량품을 자체 폐기하는 것으로 해요.”
“그러면 우리야 감…….”
“다음 요구 조건은 뭡니까?”
진혁이 부혜성의 말을 자르고 최창봉에게 물었다.
“최저가 보상입니다. 9,000원이 마지노선입니다. 그 이하로는 파는 대로 손해입니다.”
“그건 절대 들어줄 수 없습니다. 미숙과, 착색과를 유통시켜 물량 조절에 실패한 것은 농가들입니다.”
“그걸 눈감아 준 단속반들의 문제가 더 큽니다.”
“어떻든 불량품을 유통시킨 것은 농가입니다.”
“이번 건은 지사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진혁이 순순히 부혜성의 말에 수긍하자 최창봉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전 가격은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인위적인 가격 조절은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서귀포 동행 조합원 중 감귤 농민이 500명이 넘습니다. 우리 조합원들은 올해 수확한 것은 일절 시장에 유통시키지 않겠습니다.”
“회장님.”
“거기에 농가들 자체적으로 줄이는 물량까지 합치면 공급량이 줄어 가격이 회복될 겁니다. 그 정도에서 끝내야 합니다.”
최창봉이 반대하지 못했다. 진혁의 말대로 될 가능성이 컸다. 다만 조합원들의 반발이 걱정되었다.
그에 반해 부혜성과 남태현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했다. 손 안 대고 코를 푼 상황이었다.
진혁이 그런 부혜성을 보고 물었다.
“유통량 실패에 대해 농가에서는 이렇게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는데 도에서는 어떤 책임을 지실 겁니까?”
“그걸 왜 지사님이…….”
“어허, 지사님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끼어드는 남태현을 막은 것은 우상우였다.
나이와 지위 고하를 떠나 지금은 서진혁과 부혜성이 단판을 짓고 있었다. 남태현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아니, 이자가!”
“그만하게. 뭘 원하십니까?”
부혜성이 남태현을 막고 진혁에게 물었다.
“단속반을 전원 교체해 주십시오.”
“음.”
“지사님도 이미 그들의 문제점은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들을 계속 비호하면 오히려 의심을 사십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사님.”
남태현이 불렀지만 부혜성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가 집어넣은 사람이 적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혁이 다시 최창봉에게 물었다.
“또 있습니까?”
“장기적인 감귤 가격 안정화 대책을 세워 달라는 겁니다.”
“그건 이미 만들어서 발표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년인 올해에 이미 그런 식의 단계적인 감축안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그건 약속을 지키지 않은 농민들의 문제지요.”
“언제까지 농민들 탓만 하실 겁니까? 우리를 위하겠다며 찍어 달라고 하신 것은 다 거짓말이었습니까?”
“말이 과합니다.”
이번에도 남태현이 막 입을 벌리려는 순간 진혁이 먼저 말을 막았다.
농가의 요구 조건을 알았으니 이제 진혁이 해결할 차례였다.
“최 센터장님이 성격이 좀 급해서 그런 거니 지사님이 이해해 주십시오.”
“저도 감귤 농민들의 답답한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제가 지사지만 농가가 내놓는 유통 물량을 강제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게 죄송스럽지요.”
“방법이 있으시다면 하실 겁니까?”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모두가 저를 뽑아 준 고마운 분들인데요.”
“우 이사님께서 현재 우리의 청귤 제품 판매에 대해서 말씀 드리세요.”
갑자기 자신을 지목하자 놀란 눈을 하던 우상우가 얼른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안정시켰다.
우상우의 보고를 들은 부혜성이 놀라워했다.
“이건 그간 제가 원했던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지금은 생과를 팔아서는 수익은커녕 적자만 안 나도 다행입니다. 서 회장님처럼 다양한 제품을 개발해서 판매해야 합니다. 그게 종국에는 생과 유통량을 줄여 가격을 안정화시키는 길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여기 최 센터장님을 포함한 조합원들이 죽자 살자 매달려서 만든 제품들입니다. 해외 소비자들의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서 회장님 덕분에 그동안 성과가 미미해 힘들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렸습니다. 거기에 자체적으로 수출까지 하신다니 대단하십니다. 제게 보고가 안 올라와서 몰랐습니다.”
“공무원들 하는 게 다 그렇지요, 뭐.”
진혁이 툭 던지는 말에 남태현의 얼굴이 검어졌다.
부혜성이 물었다.
“그런데 유통 물량 조절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신 겁니까?”
“아시다시피 청귤은 원칙적으로 불법입니다. 청귤로 그만큼 솎아냈는데도 지금 노지 감귤은 공급 과잉입니다. 이건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줄은 압니다. 하지만 청귤 유통 허용은 민감한 문제입니다. 아시겠지만 다른 감귤 농가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노지 감귤 값 폭락의 여파가 한라봉과 비가림 감귤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보고를 받으셨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시장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반대하는 다른 농가들은 자신들의 품종의 미숙과 감귤이 유통될까 걱정되어 그런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청귤을 별도 품종 개념으로 분류해서 예외 조항을 주는 식으로 처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부혜성이 눈을 반짝였다.
청귤은 엄밀히 말하면 덜 익은 노지 감귤이기에, 습관적으로 한 품종으로 묶어서 생각했다.
청귤의 유통을 허용하면 성숙과 중에 불량품도 같이 풀리는 문제점이 그래서 튀어나왔다.
진혁의 말대로 따로 떼어 놓고 보니 의외로 쉽게 해결 방법이 보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올해 안에 수정 조례를 만들어 통과시키겠습니다.”
“역시 이렇게 함께 머리를 맞대니 해결책이 나오네요. 지사님의 통 큰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뭐 하십니까? 인사 안 드리시고.”
“고맙습니다.”
“앞으로는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아니, 불러 주십시오. 최 센터장님의 일이라면 제일 우선적으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최창봉이 머리를 숙이자 부혜성이 웃는 얼굴로 약속을 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얻은 진혁은 조합원들을 데리고 서둘러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제주도청에 마련된 기자 회견장이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부혜성은 정치인이었다. 자신의 치적을 알릴 절호의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부혜성은 미리 작성된 원고에 따라 진혁과 합의한 내용을 발표했는데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자신이 먼저 제안해서 만남이 이루어졌고, 청귤 제품도 비서실장을 보내 부탁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포장했다.
다만, 청귤 유통 허용을 위한 조례 개정은 발표하지 않았다. 반대하는 농가의 반발을 우려해서였다.
긴 발표문 낭독과 이어진 질의응답을 도망가지 못한 진혁은 들러리로 뒤에 서서 지켜봤다.
얻은 게 있으니 이 정도의 수고는 감내해야 했다.
그래도 나오는 하품은 어쩔 수 없었다.
기자 회견장을 겨우 빠져나와 도청 앞으로 가자 거리가 썰렁했다. 소식을 들은 농민들이 시위를 멈추고 다들 돌아간 후였다.
다만 한 무리의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는데, 서귀포 동행 식구들이었다.
진혁을 보자 일제히 달려왔다.
“회장님!”
“먼저 집에 들어가시지 않고.”
“동행인데 갈 때 가더라도 함께 가야지요.”
“옳소. 우리는 끝까지 함께 갑니다.”
다들 소리치며 부둥켜안고 뒤늦은 기쁨을 누렸다.
흥분이 가라앉자 최창봉이 대표로 말했다.
“우리뿐만 아니라 제주 감귤 농가를 위해 회장님이 얼마나 많은 양보를 하셨는지 압니다. 우리 모두 죽기 살기로 일해 그 은혜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모두 같은 생각이십니까?”
“예!”
“알겠습니다. 죽기 살기로 일하겠다는 그 약속 잊지 마십시오.”
다시 한번 강조하는 진혁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본 우상우는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각자 가져간 차에 타고 서귀포 센터에 도착한 조합원들은 공장에 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접해야 했다.
몇 날 며칠을 길바닥에서 보낸 자신들보다 더 몰골이 말이 아닌 조합원들이 초점이 풀린 눈으로 컨테이너 벨트에서 떨어지는 제품들을 포장하고 있었다.
TV에서 본 북한의 강제 노역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 뒤에서 진혁이 크게 소리쳤다.
“교대!”
“아이고, 허리야.”
“다리가 풀려서 안 움직여.”
“난 팔이 안 올라가.”
어기적거리며 겨우 작업대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멍하고 보고 있을 때 진혁의 호통이 들려왔다.
“뭐 합니까!”
“예?”
“죽기 살기로 일하겠다고 했잖아요.”
“그거야…….”
“떠안은 수매 물량이 6톤입니다, 6톤. 그걸 끝내야 여러분들 농장 물건을 처리할 거 아닙니까. 빨리 들어가 일해요.”
악덕 고용주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새로 투입된 조합원들은 자신의 입을 쥐어뜯고 싶었다. 왜 그런 약속을 해 가지고.
“공장장님 말씀이 맞았어. 회장님하고는 절대 말을 섞지 말아야 해.”
지켜보던 우상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수매 물량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너무 한꺼번에 몰려오자 진혁은 농협 창고에 우선 보관했다가 연락이 가면 그때 순차적으로 배달해 달라고 했다.
새로 투입된 조합원들은 끊임없이 밀려나오는 제품들에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신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작업 현황을 체크하느라 공장 식구들과 밥을 먹고 늦게 집에 도착한 진혁은 책을 읽어 주면서 혜주를 재우고 침실로 들어갔다.
지민이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 재미난 기사 났어?”
“당신 기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