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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45화 (145/307)

145화. 각자의 사정

“내 기사가 났어?”

“정확히는 부혜성 지사 기사인데 댓글은 당신 칭찬 일색이에요.”

제주도청 출입 기자들은 부혜성의 말을 받아 적었지만 시민들은 서진혁을 주목했다.

┖ 부혜성이 쇼하네. 이렇게 쉽게 해결할 능력이 있었으면 이 지경까지 갔겠어? 서진혁 회장이 다 한 거야.

┖ 제주도 사람치고 서진혁 회장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제주도로 와 준 게 엄청 고마워요.

┖ 작년에 월동채소 산지 폐기도 서 회장님이 해결한 거잖아. 부혜성이 사기 치지 말고 보고 좀 배워라.

┖ 나도 제주도로 귀농했어야 하는데.

지민이 신이 나서 댓글들을 계속 읽어 주고 있었다. 서진혁을 칭찬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가끔 뜬금없이 비난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네티즌들이 바로 달려들어 나무라며 내쫓았다.

“그만 잡시다.”

“조금만 더 읽고요. 계속 올라와요.”

“근데 어느 신문사에서 기사를 내보낸 거지?”

“거의 모든 신문사에서 다 기사를 올렸어요. 제주신문뿐만 아니라 중앙일간지에서도요.”

진혁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간 주목받는 것을 피해 왔는데 이제 그마저도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시기의 차이일 뿐 결국 언제까지 제주도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을 기다려 준 이들이 너무 많았다.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자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던 일이 떠올랐다.

지민에게 몸을 붙이며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그만 불 끄고 잡시다.”

“이 기사까지만 읽고요.”

처음 읽어 주는 댓글은 앞에 달린 것들과 대동소이했다.

그런데 새로운 내용이 있었다.

“……채린이 SNS에 제주로 동행 제품 광고를 올린 이유가 있었네. 서 회장님의 활동에 감명받아서 직접 찾아가서 모델 제의 했다던데.”

“야, 요즘 네티즌들 무섭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우리 조합원인가? 남 떠드는 거 그만 보고 이제 우리 일을 합시다.”

“잠깐만요. 더 있어요. 채린도 대단한 사람이야. 둘 다 대단한 사람인 건 맞아.”

댓글이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진혁이 핸드폰을 뺏으려는 순간 지민이 먼저 다음 댓글을 읽었다.

“둘이 결혼했으면 딱인데. 세기의 커플 탄생인데. 아깝다.”

“생각 없는 자식들. 남의 이야기라고 막 하네. 그런 쓸데없는 댓글 그만 보고 자자니까요.”

“더워 죽겠는데 왜 붙어서 난리예요.”

지민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지금 겨울인데?”

“아, 몰라요. 난 혜주랑 잘 테니까 당신은 채린 씨랑 결혼하는 꿈을 꾸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지민이 베개를 안고 휑하니 나가 버렸다. 결국 진혁은 넓은 침대에서 혼자 자야 했다.

* * *

진혁이 간접적으로 나온 기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들이 있었다.

태후 그룹 회장실.

정진호와 정인영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정호영이 알라딘 코리아의 인수 작업 실패의 책임을 지고 중국으로 쫓겨나자 정인영은 기획실장의 자리에 앉았다.

이제는 그녀가 태후그룹의 차기 주인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서진혁이 결국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그 사람은 절대 멈춰 있을 성격이 아니에요. 전 오히려 오래 참았다고 생각해요. 다만 농민 관련 사업을 벌인 게 이해가 안 돼요. 그쪽은 수익성과는 거리가 멀잖아요?”

“원래부터 예측이 불가능한 놈이다. 연락은 해 봤냐?”

“알아봤는데 아무도 만나지 않는대요. 이제 알려졌으니 더 이상 피하지만은 못 할 거예요. 언젠가는 만나겠죠.”

인영의 태평스런 답변에 정진호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 한순간의 안일함이 그룹을 위기로 빠트릴 수 있다.”

“……?”

“놈의 등장에 재계가 촉각을 세우며 지켜보고 있다. 우리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최대한 빨리 알아내야 한다. 호영이에 대한 생각이 변함이 없다면 네 오빠는 국내로 들어오기 힘들어진다.”

“안 만나 주면 어쩌죠?”

“그럼 집 앞에 가서라도 기다려야지, 그놈이 나올 때까지. 그룹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 이상의 것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 내가 받은 굴욕으로 그룹이 살 수 있다면 난 기꺼이 받을 것이다.”

정인영은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 태산같이 보였던 정진호도 한 명의 평범한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

그룹 회장이기에 그렇게 보이려고 일부러 강한 척했던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슬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정진호가 말을 이었다.

“우리도 급하지만 TG 주 회장은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진혁 씨가 돌아왔으니 당연히 알라딘 코리아를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주 회장은 보기보다 명예욕이 강한 사람이다. 재계 순위가 올라가면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더라. 처음부터 안 올라왔으면 모르지만 다시 내려가는 게 쉽지 않을 거야.”

“진혁 씨가 가만있겠어요?”

“놈이 아무리 뛰어나도 개인이다. TG 그룹은 대한민국 재계 3위의 거대 기업이다. 맘만 먹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승자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 다만 잠시 혼란스러운 상황은 오겠지. 그때 우리에게도 좋은 기회가 올지 모른다. 그러니 놈의 움직임에 한시도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정보팀의 역량을 그쪽으로 집중시킬게요.”

인영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정진호의 예상은 맞았다.

TG 그룹 회장 주경운은 벌게진 눈으로 박인식 비서실장에게 호통을 쳤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놈에게 뺏기는 것을 막을 방법을 찾아내세요. 절대 내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옷 벗으실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명예 회장님에게는 철저히 함구하시고요.”

“네.”

답을 하며 돌아서는 박인식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나왔다.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알라딘 코리아를 합병시키자마자 주경운은 그들을 TG 그룹화 시키려고 했다.

애초부터 돌려줄 마음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알라딘 코리아의 단결력은 그들의 상상 이상이었다. 일부에서는 TG가 알라딘화 되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결국 전략을 수정해 알라딘의 고유 영역을 인정하는 척하면서 TG의 네트워크 속에 그들을 가두는 장기 작업으로 전환했다.

이제 겨우 일부에서 성과가 나타나고 있는데 서진혁이 재등장했다.

피 터지는 싸움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물론 승자는 당연히 TG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그룹의 명예는 추락할 게 뻔했다.

주명근 명예 회장은 대인으로 명예를 중시했지만 주경운은 실리를 먼저 생각했다.

주경운은 그룹의 명예가 망가져도 실리만 취한다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 *

공장의 제품 생산을 위한 인력 수급이 다시 벽에 부딪혔다.

감귤 조합원들이 합류했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의 농장 일이 있었다.

시위로 그간 농장을 돌보지 못한 데다 제때 수확하지 못하면 과성장으로 불량품이 되니 수시로 살펴보고 수확을 해야 했다.

한숨을 돌린 비감귤 농장 조합원들 역시 월동채소의 출하로 공장 일을 도와줄 수 없었다.

결국 후속 홍보 계획을 준비했던 진혁은 실행을 미뤄야 했다. 지금 들어오는 주문량도 맞추기 버거운 상황이었다.

“참 안 도와주네. 사람 구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원.”

“원래 제주도에서는 지금이 노지 감귤 수확이 끝나고 월동채소가 본격적으로 출하되는 시기라 일손을 구하기 어렵기도 합니다만, 올해는 그 경우가 좀 심합니다. 회장님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제가 뭘요?”

“시위를 풀어 주셨잖습니까. 그간 멈춰 있던 노지 감귤 수확이 뒤늦게 시작되는 바람에 월동채소 출하와 겹쳐 일손 부족이 심화됐습니다.”

“시위를 풀어 주지 말았어야 했나?”

“에이, 그건 아니지요. 회장님 덕분에 감귤 값이 오르고 있습니다.”

진혁이 과잉 공급 물량을 가져와 버리니 시중에 유통되는 물량이 줄어들어든 것은 당연했다.

9,000원을 회복하고 10,000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최대 소비가 이루어지는 민족 최대의 명절, 설날이었다.

목이 뻣뻣했던 중간 도매상들이 앞다퉈 농가를 찾아 물량을 확보하느라 때늦은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진혁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물었다.

“매년 그런 일이 반복되어 왔다면 뭔가 대책을 세웠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외국인 연수생이라도 받게 해 달라고 건의했지만 안 된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정작 청년들은 고되고 힘든 일이라 쳐다도 안 보는데 말입니다.”

“그럼 국회에 달려가서 시위라도 하셨어야지요.”

“그게 또 한시적인 일손 부족이라 농가들도 적극적으로 요구하기가 그렇습니다. 괜히 연수생 받았다가 일 끝나면 내보낼 수도 없고요.”

참 답답한 현실이었다.

“그나마 제주는 나은 편입니다. 농촌은 고령화로 일손 부족 문제가 심각합니다. 외국인 근로자를 관광객으로 위장시켜 데려와 시골을 돌면서 일당 일을 소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건 불법 아닌가요?”

“당연히 불법이지요. 그래서 사고가 나도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항공료에 현지 모집책의 수수료와 한국에서의 소개비, 숙식비를 제하고 나면 외국인들이 받는 돈도 얼마 안 된다고 합니다.”

“이거 무슨 양파 껍질도 아니고. 까면 깔수록 답답한 농촌 현실이네요.”

“그래서 다들 자식들은 빌어먹더라도 절대 농사 안 시키겠다며 서울로만 보내는 거 아니겠습니까.”

서로 답답한 한숨을 내쉴 때 최창봉이 일단의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최창봉은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입을 잘못 놀린 죄로 쏟아져 들어오는 감귤을 제품으로 만드느라 죽을 똥을 싸고 있었다.

다른 조합원들은 돌아가면서 쉬었지만 최창봉은 센터장이라 그러지도 못했다.

진혁이 우상우와 일어나 맞았다.

“어떤 분들이신가요?”

“이번에 가공용 감귤 추가 수매로 선정되신 분들입니다. 고맙다고 찾아오셨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송구스럽습니다. 애써 키우신 걸 제 값을 받게 해 드렸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진혁의 모습에 농민들이 당황했다.

“아이고, 그러지 마십시오. 회장님 덕분에 바닥에 버려질 애들이 이렇게 멋진 제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그깟 돈 몇 푼 받자고 시위를 한 것은 아닙니다. 내 손으로 키운 애들을 내 손으로 버려야 하는 게 얼마나 피눈물 나는지 저들은 모를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서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된 겁니다. 다들 농장 일로 바쁘실 테니 인사는 이쯤에서 접고 돌아가셔서 또 열심히 하시면 됩니다.”

“저기, 회장님. 이분들은 일손을 돕겠다고 오신 겁니다.”

놀란 표정의 진혁에게 농민들이 말했다.

“다 따서 수매로 보내 이제 농장 일은 끝났습니다. 저희들은 소농가라 하우스 재배는 안 하고 있어 다른 일은 없습니다. 보통은 다른 데 일손을 나가는데, 여기 일이 바쁘다고 해서 왔습니다.”

“저희 도와주신다고 떠안으신 일이신데 모른 척하면 사람 새끼가 아니지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농가들도 수매만 끝내면 와서 돕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일손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진혁이 농민들의 손을 잡으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내내 고민했던 일손부족 문제가 또 이렇게 해결되었다.

작업대로 가려던 농민들이 주저하며 물었다.

“지난 해 월동채소 파동 때는 수매 농가를 조합원으로 받아 주셨는데, 이번에도 받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말을 하던 진혁의 눈에 최창봉의 얼굴이 들어왔다. 피곤에 쩔다 못해 눈까지 풀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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