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합류하는 식구들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 최 센터장님이 건의하면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조합원 선정은 최 센터장님의 고유 권한이라 저도 이래라 저래라 못 합니다. 최 센터장님이 알아서 잘하겠지요. 안 그래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회장님. 자, 다를 일하러들 가시지요!”
“어, 그러자구.”
언제 처져 있었냐는 듯 활기찬 목소리의 말에 농민들이 일제히 답하고 작업대로 갔다. 최창봉도 당연히 따라갔다.
그 모습에 우상우가 말했다.
“공장장님이 회장님은 사람 부려 먹는데 도가 트신 분이라고 하시던데,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하겠다고 찾아왔으니 확실히 부려 먹어야지요. 다만 그에 따른 권한을 주고 고생한 만큼의 보상도 확실히 해 주면 됩니다. 그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힘들 텐데도 불평하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귀농하고 처음으로 보람을 느끼면서 일하고 있다고 고맙다는 말만 합니다.”
“여기 최 센터장님이나 제주 센터의 수호나 다들 기대보다 잘해 주고 있어서 제가 오히려 고맙지요. 맘 편히 떠날 수 있을 것 같네요.”
말하는 진혁이나 듣는 우상우나 마음이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진혁이 언제까지 제주에만 머물 수는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 준비 작업으로 각지에서 온 열 명의 귀농자들이 지금도 작업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 * *
각지에서 온 열 명의 귀농자들이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 펜션의 야외 바비큐장에 다들 모였다.
그들 외에도 우상우와 이수호, 최창봉이 참석했다.
진혁이 서두를 꺼냈다.
“벌써 한 달이 지났네요. 다들 한 말씀씩 해 보십시오.”
“떠나는 게 아쉽습니다. 회장님께 더 많이 배우고 싶었는데.”
“바쁜데 이렇게 떠나야 해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우상우를 통해 일을 더 도와주겠다는 말을 전해들은 진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 일은 여기 사람들끼리 해결하게 둬야 한다. 일시적인 외부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나중에 또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돌아가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귀농자들의 소회가 이어졌다.
“정말 정신없이 보낸 한 달이었습니다. 한겨울에 이렇게 바빠 본 건 처음입니다. 보통 농촌은 이때가 농한기로 제일 한가한 철이거든요.”
“그러게.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는데 다들 무료해서 군불을 뗀 방에 모여서 신세 한탄만 늘어놓고 있다더군. 여기 오지 않았으면 나도 거기에 끼어 있을 거야.”
“이것저것 배운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농촌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본 게 제일 큰 소득인 것 같습니다.”
“감귤이 정신없이 쏟아져 들어올 때는 막막하더라고요. 그런데 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달려와 같이 처리하다 보니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어지는 광경이 신기했습니다.”
“전 우리 농산물 제품도 해외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좋은 제품인데 먼지만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좋지 않았거든요.”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나자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좋은 경험을 했다니 저도 기쁩니다. 하지만 여기서 경험했던 일은 떠나면서 머릿속에서 지우십시오.”
“예?”
“제 말이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여기 일은 제주이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여러분의 지역에서 이 일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제주도는 인구가 60만이 넘는 대도시였다. 찾아오는 관광객만도 한 해 100만 명이 넘고, 관광 수입은 6조가 넘었다. 감귤만 해도 3만 5천여 호의 농가에서 매년 수천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자신들이 속해 있는 군은 인구가 5만이 무너진 지 오래였고, 관광객이라고는 휴가철에나 구경하는 게 전부였다.
이제 와 왜 여기를 잊으라고 한 것인지 이해가 됐다.
그때 진혁의 반전의 말을 했다.
“동행이 왜 동행입니까? 농한기에 모여 신세 한탄만 하지 말고 제주로 내려오세요. 일거리는 미친 듯이 있습니다. 안 그런가요? 최 센터장님.”
“맞습니다. 보셨듯이 지금 일손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몇 분이 오시건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다 하겠습니다.”
“이 센터장은 그동안 비축해 둔 마늘과 양파가 다 떨어져 가는 것으로 아는데, 주문이 계속 들어오는 것은 어떻게 할 거야? 언제까지 물건이 떨어졌다며 죄송하다는 변명만 할 거야?”
“아, 형님들, 가시면 마늘하고 양파 비축해 놓은 농가 있으시면 소개 좀 시켜 주십시오. 다른 품목도 상관없습니다. 오픈 마켓에 판매 종료를 올려놔도 조합원들의 블로그를 보고 전화로 주문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아주 난감합니다.”
다들 눈이 반짝였다.
“소비자들은 농촌의 출하 시기와 상관없이 사시사철 농산물을 소비합니다. 제주의 수확이 끝나면 다음은 호남, 그리고 충정, 강원, 그리고 다시 제주. 그래서 네트워크가 중요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개인의 욕심은 내려놔야 합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것 같지만 금방 지칩니다. 하지만 함께 가면 비록 처음은 느린 것 같아도 멀리 갈 수 있습니다. 그런 동행 정신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진혁의 눈짓에 우상우가 각자에게 봉투 하나씩을 건네줬는데 꽤 두툼했다.
“한 달간 일한 품삯이다.”
“아닙니다. 가르쳐 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꽝!
“도대체 한 달간 뭘 보고 배운 겁니까!”
갑자기 테이블을 내리치며 화를 내는 진혁의 행동에 봉투를 놓고 실랑이를 하던 이들이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봤다.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씀이 노동은 신성하고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 정당한 대가를 부정하는 겁니까? 서로 어려운 사정을 아는데, 하는 같잖은 변명이 농민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겁니다.”
“…….”
“여러분은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닙니다. 그 지역의 동행 센터를 맡아 조합원들을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들에게 어렵다며 무상 노동을 강요하실 겁니까? 대가 없는 참여가 얼마나 갈 거라고 보십니까? 당당히 부려먹고 떳떳하게 보상을 해 주세요.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십시오. 아무리 이상이 좋아도 수익이 받쳐 주지 않으면 다 허상입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당당히 받겠습니다.”
다들 봉투를 받아 챙겼다.
우상우가 무거운 얼굴로 서류철을 펼치는 모습에 다들 침을 삼켰다.
동행 센터 설립 예정지를 발표하려는 것이다.
“제출한 사업 계획서를 면밀히 검토해서 우선 다섯 곳을 선정했다. 해남, 고창, 산청, 봉화, 횡성. 다들 고생했다.”
귀농인들의 얼굴색이 극명하게 비교됐다. 선정된 다섯 곳은 희색이 만면한 반면 나머지는 짙게 어둠이 드리웠다.
그 모습에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업 계획서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제가 본 것은 얼마나 절박한가였습니다. 그만큼 현지 사정이 다급하다는 방증이라 먼저 선정된 것뿐입니다. 전 동행을 전국 네트워크로 만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기의 차이일 뿐 나머지 지역도 순차적으로 센터를 건립할 테니 그때를 대비해서 준비를 해 주십시오.”
“회장님은 하신다면 하시는 분입니다. 형님들은 걱정 말고 준비부터 하세요. 그리고 일찍 시작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첫 빠따로 걸려 고생을 엄청 했습니다. 최 센터장님은 거저 가져가셔서 편하게 시작했잖습니까.”
“나도 엄청 고생하고 있거든? 그래도 제주 센터의 노하우가 큰 도움이 되긴 했지. 저 역시 전부 다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각오는 하셔야 합니다. 회장님은 만족을 모르시는 분입니다. 준비를 철저히 하셔야 그나마 고생이 덜할 겁니다. 늦게 시작하는 게 오히려 낫습니다.”
이수호와 최창봉까지 거들고 나서야 그나마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다.
이후 이어진 술자리는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었다.
* * *
공항에서 서로 악수하고 돌아섰다.
떠나보내는 이들이나 떠나야 하는 이들 모두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다시 만날 것을 알기에 웃으면서 헤어졌다.
차를 운전하고 돌아가는 우상우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났다.
“못난 자식이 더 생각난다는 옛날 어르신의 말씀이 하나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웃는 얼굴로 가는 놈들보다 축 처진 놈들이 더 눈에 밟히네요.”
“지금 우리 역량으로는 다섯 곳도 벅찹니다. 그러니 빨리 능력 있는 인사들이 합류해야 합니다.”
“서귀포 센터의 급한 일만 끝나면 옛 동료들을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다들 저처럼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서 연락처 알아내는 게 쉽지 않네요.”
진혁의 자금력이라면 열 개가 아니라 백 개도 당장 가능했다.
하지만 센터만 세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걸 조직하고 지원할 인재의 확보가 우선이었다.
그래서 일단 세 개만 시작하기로 했다가 다섯 개로 늘렸는데도 탈락한 이들이 실망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서귀포 센터의 모습이 변해 가고 있었다. 빈터에 창고들이 추가로 세워지고 있었다.
만들어진 수출 제품들을 쌓아 놓을 공간이 부족했다.
생과보다는 제품으로 만들어 보관하는 게 비용이 절감되고 보관이 용이해서 내린 조치였다.
인력도 충원되어 사무실도 넓혀야 했다.
수출까지 하다 보니 무역 관련 일을 할 직원이 필요했고, 중동과 동남아시아의 통역 일을 맡아 줄 이도 필요했다.
제주도의 외국 관광객이 요우커로 편중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 언어를 하는 가이드들이 설 자리를 잃고 쉬고 있어 지원자는 많았다.
최창봉은 아르바이트로 쓰자는 것을 진혁이 정규직으로 뽑으라고 했다.
동행을 시작한 이유 중에는 농촌의 일자리 창출도 있었다.
남는 시간에는 작업을 도와주는 대신 개인 가이드 일이 들어오면 언제든지 쉴 수 있게 했다. 당연히 그에 따른 인건비는 철저하게 계산하기로 했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최창봉이 두꺼운 서류를 들고 왔다.
“이번에 선발된 신입 조합원들입니다. 한번 봐 주십시오.”
“이걸 왜 제가 왜 봅니까? 서귀포 동행의 대표는 최 센터장입니다. 그냥 간략하게 말씀하세요.”
“3천여 농가가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그중 천 명을 선발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수매에 참여한 감귤 농민이 700명, 나머지 작물의 농민이 300명입니다. 더 뽑아 주면 안 되냐는 전화가 지금도 옵니다.”
“천 명도 솔직히 많습니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동행의 뜻을 이해하고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이 중요하지요. 조합원을 늘려서 덩치만 키운 단체들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잊지 마십시오.”
각 지역마다 무슨 무슨 작목반, 농가 협회, 농민회 등 엄청 많았다.
처음에는 몇몇 뜻이 모인 사람들끼리 만들었다가 조직이 커지자 곳곳에서 문제들이 튀어나왔다.
이권 단체로 변질되어 툭하면 정부에 항의해서 지원금을 받아냈다. 그 지원금도 단체 임원들끼리 나눠 먹고 조합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돈이 걸려 있으니 임원 선거는 온갖 불법과 편법이 판치는 구시대 정치판이 된 지 오래였다.
* * *
민족 고유의 명절 설날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바쁘게 일을 마친 진혁이 집에 들어서는데 지민이 짐을 싸고 있었다. 혜주가 아직 어리다 보니 챙겨야 할 짐들이 많았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신나게 손을 놀리는 지민에 반해 진혁의 손길에는 힘이 없었다.
결국 진혁이 참지 못하고 한 소리 했다.
“엄마도 너무하지. 어떻게 멀리서 아들이 찾아가는데 해외여행을 가시냐?”
진혁의 부모님은 이번 명절 연휴를 이용해 모임에서 진행하는 가족 동반 크루즈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결국 진혁의 가족들은 바로 서울로 가고 진혁만 명절 당일 날 속초로 가서 차례를 지내기로 했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 서명수에게는 장손이 명절에 빠지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갖은 아양 공세와 지민에게 설득당한 진혁까지 나서서 지원하고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장손 며느리라고 평생 명절 날 일만 하셨는데 한 해 빠진다고 그리 이야기하면 안 되죠.”
“아는데, 명절에 집에 안 간다니 이상해서 그래.”
“우리 집에 가잖아요. 설마 우리 집에 가는 게 싫은 거예요?”
“아니야, 싫긴. 장모님, 장인어르신이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 얼른 뵙고 싶네.”
진혁이 후다닥 움직였다.
여기서 삐끗 잘못 대답했다가는 명절 내내 시달려야 했다.
* * *
서울로 올라온 진혁은 갑작스럽게 시간이 남자 희준을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들어서던 진혁이 누군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