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밝혀지는 내막
희준이 한지철과 함께 있어서였다.
“내가 억지로 끼어든 자리니 나무라지 마라. 설마 끝까지 안 볼 참이었냐?”
“아닙니다. 진급을 축하드립니다.”
희준으로부터 정인영이 기획실로 자리를 옮기며 한지철이 상무로 진급해 유통 부문을 총괄하게 됐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다 네 덕분이지. 그런데 너는…….”
“옛날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진혁이 말을 잘랐다.
이래서 다른 이들을 안 보려고 했던 것이다.
과거를 아쉬워하는 것은 패배자들이나 하는 못난 짓이었다. 아무것도 보여 줄 게 없으면서 떠드는 것은 허풍쟁이들이다.
확실하게 자신을 내보이고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을 때까지 만남을 미뤘을 뿐이다.
한지철에게는 처음 듣는 진혁의 차가운 말투였지만 그 이유를 알기에 마음이 상하진 않았다.
“그래. 현재 이야기를 하자. 이제 본격적으로 나설 생각이냐?”
“아시겠지만 시작한 일이 있습니다. 그게 커지다 보니 알려지게 된 것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습니다.”
“물론 넌 그렇겠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제가 그들의 생각까지 고려할 이유는 없잖습니까?”
다시 한번 날카로워진 진혁의 말투에 한지철은 쉽게 풀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안 떨어지는 입으로 억지로 말했다.
“정인영 실장이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더라.”
“아직은 제가 누굴 만날 마음의 준비가 안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겠냐. 그럼 이야기들 나눠라.”
한지철이 일어나자 희준이 밖에까지 따라갔다 왔다.
“아, 자식. 좀 적당히 말하지. 한 선배가 뭔 죄냐? 정 실장이 자꾸 쪼니까 억지로 나온 건데.”
“알아. 아니까 그 정도로 한 거야.”
“그나저나 너 이제 어쩔 거냐? 다 알려져서 모른 척하며 살 수만은 없잖아?”
“난 내 일을 할 뿐이야. 나머지는 신경 안 쓴다.”
“네 고집을 누가 말리겠냐. 술이나 먹으러 가자.”
진혁도 술 생각이 간절했기에 바로 일어났다. 한지철에게 냉정하게 대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려 있었다.
* * *
명절이 끝나고 제주도로 돌아온 진혁은 각 센터별로 ‘결산 보고회’를 열었다.
제주 센터는 다음 양파와 마늘 구입 비용과 최소한의 운영비만 남기고 모두 조합원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했다.
가구당 2,500만 원이었다.
서귀포 센터는 작년 실적이 없으니 배상금 지급은 없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하이디 복지 기금’의 독거노인 쌀 전달 행사였다.
진혁은 채린이 모델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자 수익의 1%를 걸 그룹 이름의 복지 기금을 만들어 취약 계층을 돕는 일에 쓰기로 했다.
* * *
2월이 끝나자 진혁은 스미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국 지수 선물에 투자해 놓은 게 만기되어 정리되어 있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스미스가 내역부터 들려주었다.
-신용을 최대인 일곱 배를 이용했는데 지수는 약 22% 하락했습니다. 이자와 수수료를 제하고 2억 5천만 달러의 수익이 발생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잔고가 7억 5천만 달러 정도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묻는 스미스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검은 머리 짐’의 투자 전략을 아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알리바마 주식을 60달러 이하에서만 조금씩 매입해 주십시오.”
-알리바마는 중국 업체이긴 하지만 미국 나스닥 시장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압니다. 새로 시작한 사업이 있어서 당분간은 투자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 안전하게 장기로 묻어 두려고 합니다. 그러니 이번 건은 공개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답하는 스미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중국 증시의 급락으로 세계 증시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사방에 먹을 게 천지인데 장기 투자라니.
스미스는 진혁이 전문 투자가가 아니라 사업가인 것을 안타까워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어 진혁은 야맘에게도 전화를 했다.
기부 펀드는 3억 달러가량이 되어 있었다. 역시 알리바마 주식을 매입하라고 지시하고 끊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진혁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자포라를 인수하기 위해 자신을 밀어낸 알리바마 하윤 회장의 치졸한 형태를 잊지 않고 있었다.
복수할 그날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 갈 작정이었다.
* * *
급한 일이 끝나자 진혁은 본격적인 동행 센터 추가 설치 준비에 착수했다.
우상우와 함께 선정된 지역을 직접 돌아보며 준비 사항을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센터 건립 부지와 핵심 조합원으로 활동하는 이들을 살피고 해당 지역을 직접 돌아봤다.
저녁에는 다들 모여 토론을 통해 사업 계획서를 수정 변경했고, 이후에는 해남, 고창을 거쳐 산청에 도착해 지리산 온천에서 피로를 풀었다.
우상우와 가볍게 한잔하며 앞으로 일정에 대해 논의하고 룸으로 돌아왔다.
씻고 나와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외국의 전화번호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서진혁입니다.”
-지크캐피탈의 존이오, 서 회장.
진혁이 갑자기 얼음이 되었다.
존 지크 회장은 워런 버핏, 짐 로저스, 조지 소로스와 함께 세계 4대 투자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그가 투자한 곳 중 성공하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그중 알리바마가 대표적이었다.
계획만 있던 하윤에게 존은 100억이라는 거금을 시드 머니로 내놓고 17%의 지분을 소유한 최대 주주가 되었다.
하윤은 그 자금으로 알리바마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존은 단순히 투자만 한 게 아니었다.
중국 주식 시장의 진입을 고민하는 하윤에게 미국의 나스닥에 직상장할 것을 권해 대박을 터트리게 했다.
알리바마의 성공으로 존은 하윤보다 훨씬 더 큰 이득을 얻었다.
100억이 지금은 30조로, 3천 배가 되어 있었다.
‘검은머리 짐’의 진혁이지만 존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먼저 연락을 주었으니 놀란 것은 당연했다.
존이 말을 이었다.
-서 회장님이 하시는 일에 투자를 하고 싶었는데 인연이 안 닿아서 아쉬웠습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불쑥 전화를 드린 것은 오해를 풀어 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서 회장님의 알쇼핑에 대한 공격에 하윤 회장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가 자포라를 인수하기 위해 벌인 일입니다.”
진혁이 이를 악물고 답했다. 아무리 존이라도 물러설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 정부 차원에서 벌인 일입니다. 하윤 회장도 굉장히 치밀하신 분입니다. 설마 그 사람들이 어설퍼서 서 회장에게 피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합니까?
“……!”
-JK모건 요한슨에게 우연을 가장해 서 회장님께 보낸 건 접니다. 하윤 회장이 내게 부탁한 일입니다. 그는 능력 있는 사업가가 정치권력에 희생되는 것을 막고 싶어 했습니다. 당당하게 사업으로 이기고 싶다는 소망도 내비치더군요.
“…….”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이 지배하는 경직된 곳입니다. 그들이 짜 놓은 프레임에 갇혀 우리끼리 쓸데없는 오해로 싸우는 것은 스스로 광대를 자처하는 일입니다. 하윤 회장의 말대로 사업으로 승부를 보십시오. 흥미 있게 지켜보겠습니다.
세세한 부분까지 다 아는 존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지도 깨달았다. 알리바마의 주식 매집을 눈치챈 것이다.
“고맙습니다. 당장 매집을 중단하고 보유한 주식도 처분하겠습니다.”
-노, 노. 오히려 계속 매집을 부탁드립니다.
“……?”
-알리바마가 현재 공매도 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도 방어를 하는데 60달러가 무너지기만 하면 계속 매수 주문이 들어와 조사하다가 서 회장님임을 알게 된 겁니다.
진혁의 눈이 커졌다.
최근 ‘헤지 펀드’들의 공매도에 세계 기업들이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주가가 떨어져야 수익이 나는 구조다 보니 온갖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일부러 큰 매도 물량을 터트려 투매를 유도해 주가 하락을 부추기고 있었다.
알리바마도 중국 증시 폭락을 내세운 공매도 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혁의 입가에 처음으로 웃음이 맺혔다.
“알겠습니다. 회장님과 멋진 승부를 벌이기 위해서라도 승냥이 같은 놈들에게 넘어가도록 놔둘 수는 없지요. 미력하게나마 돕겠습니다.”
-역시 서 회장님은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말을 들으면 하윤 회장도 감사해할 겁니다. 언제 다 같이 한번 모입시다.
“언제든지 연락만 주십시오.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연락드리리다.
존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진혁은 오해로 큰 잘못을 저지를 뻔했다며 반성했다.
그날 오랜만에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 * *
봉화를 거쳐 마지막 횡성까지 둘러보고 나니 어느새 보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횡성 터미널에 도착하자 우상우가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우 이사님이 고생하셨지요. 저는 여행 다니는 기분으로 다녔습니다.”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제주도가 천국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더 열악해서 안타깝고 미안했습니다. 제가 괜히 귀농에 대한 희망을 줘서…….”
“그게 어디 우 이사님의 잘못입니까. 우리나라 농촌의 구조적인 문제지요. 미안한 마음은 동행 센터들이 성공하게 하는 밑거름으로 쓰십시오. 그럼 된 겁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을 잘 보필해서 떳떳한 스승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만 여기서 헤어집시다.”
“제주도에서 뵙겠습니다.”
우상우가 차를 타고 떠났다. 그는 겨우 연락이 된 과거 동료들을 찾아갔다가 제주도로 오기로 했다.
진혁은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서 강릉행 표를 끊었다. 명절 때 뵙지 못해 부모님 댁에서 하루 쉬었다가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강릉에 가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김세동이 급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김세동의 집무실은 청와대 본관 1층에 있었다.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대통령께서 뵙자고 하시네.”
“…….”
“죄 지은 거 있나?”
“없습니다.”
“그럼 대통령님이 밉나?”
“아닙니다.”
“그럼 못 볼 이유가 없잖나? 무조건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네. 제주도에서 자네가 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셨네. 아마 그 일을 물어보고 싶어서 부르신 것 같아.”
이곳으로 오라고 할 때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하고 있었다.
마음을 정한 진혁이 말했다.
“뵙지요. 하지만 억지로 좋은 말만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제주도 펜션은 내 명의야. 여기 아니어도 갈 곳은 많으니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말씀드려.”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대통령 집무실은 2층에 있었다.
계단으로 올라가자 이현국 비서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지라 가볍게 인사만 하고 권성일 대통령에게 갔다.
“처음 뵙습니다. 서진혁입니다.”
“억지로 불러서 미안하네. 꼭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어서 무리인 줄 알면서도 불렀네.”
다들 자리에 앉자 권성일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를 소개했다.
“이쪽은 농림식품부 위정근 장관이네.”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나자 차가 나왔다.
권성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다들 바쁜 분들이니 사사로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제주도의 일에 대해 듣고 싶네. ‘동행’이라고 했나?”
“모두가 함께 가서 더불어 행복하게 살자는 의미로 지었습니다.”
진혁은 동행 사업을 시작한 이유와 제주 동행과 서귀포 동행을 설립하고 벌인 일까지 들려주었다.
“듣는 내내 대단하다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군.”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제가 특별히 신기술이나 새로운 기법을 도입한 건 없습니다. 그냥 가지고 있는 자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운영한 것뿐입니다.”
“그게 중요한 거지. 지역에 문제가 생기면 자치 단체장이나 국회의원들은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중앙 정부에 돈부터 요구해. 그러니 매년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중앙 정부가 또 나서야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네.”
위정근이 슬쩍 눈치를 보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분위기 때문에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런데 효율적인 운영만으로도 충분히 지역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이번에 서 회장이 제주에서 벌인 일로 증명이 되었네. 그래서 말인데…….”
말을 멈춘 권성일이 잠시 뜸을 들이고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