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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49화 (149/307)

149화. 비열한 꼼수

“해 보게.”

“온실 속의 화초가 예쁘기는 하지만 환경이 바뀌는 순간 죽습니다. FTA는 세계적인 흐름으로, 막고 싶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주 감귤 사태는 그런 흐름에 역행하고 정부 지원금으로 연명하다가 한계가 오니 뒤늦게 터진 겁니다.”

“…….”

“지금은 아프시겠지만 무조건적인 지원은 고통만 연장할 뿐입니다. 스스로 경쟁력을 찾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도움만 주십시오. 그게 진정으로 그들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말씀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이야기 깊이 간직하겠네. 구체적인 것은 이 실장하고 상의하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이제 길을 텄으니 가끔 들르게.”

“동행 센터 건립하느라 열심히 다녀야 해서 시간이 안 날 것 같습니다. 그럼 바쁘실 테니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진혁은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나왔다.

이현국과 얼마간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 조율을 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어서 김세동과 함께 청와대를 나섰다.

“나도 옳은 소리 하다가 쫓겨난 사람이지만, 자네 하는 것을 보니 새 발의 피였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떻게 아버님을 따라가겠습니까?”

“아니네. 능글맞은 위 장관을 한마디도 못하게 몰아붙일 때는 내 속이 후련했어. 아마 농협의 문제로 얼마 가지 못할 것이네. 하하하.”

김세동은 속이 후련한 듯 크게 웃었다.

솔직히 그는 진혁의 모습에 크게 놀라고 있었다. 김상균에게 듣고 그간 옆에서 지켜보며 보통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 보니 그 이상이었다.

일반인들은 대통령 앞에 서면 굳어 버리고 머리를 조아리기 바쁜데 진혁은 시종일관 당당하게 할 말을 다 했다.

거기에 따끔한 조언까지 하는 모습에 절로 감탄이 터졌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정부의 간섭이 싫어 지원을 최소화한 자네 뜻은 알겠네. 헌데 굳이 납품권을 포기할 이유는 없지 않나? 새로 시작하는 입장에서 그런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하면 큰 힘이 될 텐데.”

“동행은 주 판매 루트가 온라인입니다.”

“알지만 판매처가 하나라도 더 있는 게 낫지 않느냐는 말이네.”

“그건 아버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왜?”

“대통령이 직접 추진하는 사업입니다. 위장관이 알아서 기어 줄 텐데 굳이 머리 숙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뭐? 하하하하하하.”

김세동이 이번에는 더 크게 웃었다.

맞는 이야기였다.

알아서 기는 병폐가 그 어디보다 심한 게 공직 사회였다. 특히 위 장관 같은 간신배들이라면 더 했다.

진혁도 그걸 알고 겉으로 거절하는 척한 것이었다.

* * *

진혁이 다시 제주도로 내려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갑자기 추진하는 사업인 데다 기존 정부 지원 사업과 방식이 다르다 보니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소관 부서마다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이현국이 처리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그래도 권성일의 의지가 강해 겨우 가닥이 잡혔다.

나머지는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 제주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빠져 나왔다.

제주 동행에 가자 우상우가 급히 다가왔는데, 그 뒤로 낯선 이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 수가 족히 삼십은 넘어 보였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저, 그게…… 제가 가르쳤던 이들입니다.”

“그래요?”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자신들도 참여시켜 달라고 하나둘 오더니 이렇게나 모였습니다. 또 온다는 이들도 있고…….”

우상우는 죄스러운 심정에 눈길도 마주치지 못했다.

지난번에 온 열 명 중 다섯 명도 그냥 돌려보내서 마음 아팠었다.

그래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데도 딱한 사정을 아는지라 매몰차게 돌려보내지 못했다.

진혁이 가타부타 말이 없자 우상우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제가 따끔하게 말해서 내일 돌려보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왜 돌려보냅니까? 그렇지 않아도 일손이 부족한데. 아주 입에 단내가 나게 부려 먹어야지요.”

우상우를 제치고 앞으로 나간 진혁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서진혁입니다. 저와 함께 가시겠다고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받아 주십시오.”

“제 신조가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입니다. 아주 죽어라 함께 걸어가 봅시다. 잘 오셨습니다.”

“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다들 다시 작업하러 갔는데 네 명은 남았다.

남자 하나에 여자 셋.

우상우가 그들을 소개시켰다.

“저와 함께 본부를 이끌던 이들입니다.”

노일영은 우상우와 함께 교육을 맡았던 이었고, 김미정은 여성 귀농 학교, 한상미는 회원 관리와 홍보, 이민영은 회계 담당이었다.

“잘 오셨습니다.”

진혁은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말했다.

“우리는 입으로만 떠드는 이들을 무수히 봐 왔습니다. 그래서 전 제 눈으로 본 것 외에는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심정일 겁니다. 동행을 직접 겪어 보십시오. 그런 다음 확신이 서시면 그때 찾아오십시오. 언제든지 환영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직접 겪어 보고 마음을 정하겠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에게 돌아갔다.

우상우에게 이야기를 듣고 호감이 가서 따라왔지만 아직 마음을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진혁이 먼저 그렇게 이야기해 주니 마음이 편해졌다.

사무실에 둘만 남자 우상우가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 큰 부담을 드린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하늘이 우리 동행을 돕는가 봅니다.”

“……?”

의아해하는 우상우에게 진혁이 목소리를 낮춰서 청와대를 다녀온 일을 들려주었다.

“헉, 그럼?”

“전국에 걸쳐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하게 됐습니다. 정부의 도움은 받되 간섭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합의를 봤습니다.”

이어 세부 사항까지 들려주자 우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거의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큰일을 하셨습니다.”

“지금 오신 분들이나 앞으로 오는 분들은 모두 받아들이십시오. 하지만 청와대와 합의한 내용은 끝까지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빛을 쫓아 날아드는 불나방들은 식구가 될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자들은 조직에 해만 될 뿐입니다. 철저히 함구하겠습니다.”

“국민들의 피 같은 세금이 들어가는 일이고, 농어민을 위해 꼭 성공시켜야 할 일입니다. 대외 업무는 제가 책임질 테니 우 이사님은 내부 조직 관리를 맡아 주십시오. 전권을 드리겠습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어나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

각자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 * *

TG 그룹 본사 회장 비서실로 한 사내가 급히 뛰어 들었다.

“회장님 계십니까?”

그를 바라보는 박인식 비서실장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쥐 상에 얍삽하게 생긴 이는 기획실장 오교훈이었다. 생긴 것처럼 기회주의자로 요즘 회장 주경운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알라딘 코리아 사수 작업을 박인식이 미적거리자 주경운은 오교훈에게 그 일을 맡겼다.

요즘 들어 두 사람의 회동이 부쩍 늘었다.

“안에 계시…….”

“알겠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는 오교훈의 행동에 박인식이 크게 호통치며 따라갔다.

“드디어 알아냈습니다, 회장님!”

갑자기 들이닥쳐 소리치는 무례한 행동에 주경운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오교훈은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서진혁이 청와대에 들어간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그래요? 와서 앉읍시다.”

주경운이 언제 화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반기며 자리를 권했다.

서진혁을 주시하고 있던 TG 그룹이라 그가 청와대에 들어가자마자 보고가 올라왔다.

놀란 주경운이 즉시 그 내막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었다.

“대통령의 지시로 경제부총리 산하에 농어촌 지원단을 만들어 서진혁이 현재 하는 동행 사업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답니다.”

“헉. 그럼 당장 작업을 중단해야 합니다. 청와대와 척을 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박인식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주경운이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나무라지는 못했다.

한국에만 존재하는 재벌이란 집단은 그 태생적 한계로 정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그룹이 흥하고 망한 예가 비일비재했다.

비록 권성일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고 공언했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오교훈의 말에 주경운이 쉽게 답을 못 했다.

돌아가는 상황은 포기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알라딘 코리아라는 먹음직스러운 고기를 이대로 포기하는 게 너무도 아쉬웠다.

뻔한 결론이기에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지켜보던 박인식의 눈에 오교훈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위험 신호였다.

막 입을 열려고 했는데 오교훈이 한발 빨랐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뭔가?”

주경운이 반색하며 묻는 건 당연했다.

“서진혁의 입에 마개를 씌우면 됩니다.”

“입마개를?”

“그렇습니다. 놈은 이제 대통령이 지시한 국책 사업을 맡게 된 겁니다. 그게 놈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자세히 말해 봐라.”

“절차는 밟겠지만 이미 사전에 내정된 거나 진배없는 사업입니다. 충분히 특혜 시비의 논란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자가 소송에 휘말린다면 대통령에게 엄청난 부담이 될 겁니다.”

“그렇지.”

“억울하더라도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할 겁니다. 아니, 청와대가 무조건 막을 겁니다. 이건 오히려 저희한테 호재입니다, 회장님.”

“역시 오 실장이야. 아주 좋아.”

주경운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내고 대안을 내놓는 오교훈의 처사에 박인식은 혀를 내둘렀다.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졌다.

주경운이 결단을 내렸다.

“계획대로 진행한다. 그 전에 놈의 입마개를 더욱 확실하게 채워야겠다.”

“어떻게 말입니까?”

“농어촌 지원단이란 곳의 단장을 맡게 해라. 그럼 공직자가 되는 것이니 그보다 더 확실한 입마개는 없다.”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기가 막힌 혜안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다. 우리 그룹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박인식은 북 치고 장구 치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냥 지켜보는 게 다였다.

* * *

그때 진혁은 인천으로 가서 곽영섭을 만나고 있었다.

발표만 나면 바로 시작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력과 자재도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오존메이드 홍준기 사장에게도 대용량 오존팩을 준비시켰다.

두 사람 모두 반색한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연락이 오자 진혁은 서둘러 퇴근해 집으로 갔다.

“당신이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에요?”

“TV 볼 일이 있어.”

“무슨 좋은 일 있어요?”

“같이 봅시다.”

진혁이 지민을 끌어다 옆에 앉히고 TV를 켰다. 놀아 달라고 칭얼거리는 혜주는 무릎에 앉혔다.

막 뉴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첫 번째 뉴스로 나왔다.

-오늘 청와대에서 약칭 ‘농어촌 지원단’에 대해 발표를 했습니다. 대변인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남자 앵커의 말에 이어 청와대 기자 회견실로 장면이 바뀌고 대변인의 발표가 이어졌다.

진혁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이에 대통령님의 지시로 부총리실 산하에 ‘농어촌을 위한 6차 산업 지원단’을 신설하기로 했습니다. 단장으로는 서진혁 씨가 내정되었습니다.

“어머, 어머. 당신이 단장을 맡게 된 거예요?

“쩝. 이젠 완전히 코가 꿰었네.”

단장은 사전에 합의된 내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간섭 없이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으니 오히려 나았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는데 AK 유통의 고용준이었다.

2년이 넘게 서로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진혁이 그렇게 지시했었다.

하지만 이제 일부러 피할 이유가 없었다. 경쾌한 손길로 전화를 받았다.

“TV 보신 모양입니다.”

-어느 방송을 보고 계십니까? 회장님.

“KBC입니다만.”

-MBS를 봐 주십시오. 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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