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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50화 (150/307)

150화. 화가 복이 되어

잔뜩 굳은 목소리라 진혁은 서둘러 채널을 돌렸다.

TG 그룹 주경운 회장이 직접 기자 회견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TG 그룹은 정부 시책에 맞춰 전자 통신 전문 그룹으로 거듭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방만한 계열사를 정리할 것이며, 매각 대금과 사내 유보금을 더해 5조 원을 투자해, 청년 일자리를 확대하고 소프트웨어 인력을 양성하며, 협력사와 상생을 통해 더욱 국민에게 신뢰받는 TG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경운이 뭐라 주절주절 떠들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핸드폰에서 고용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보고 계십니까?

“우리가 포함된 겁니까?”

진혁의 목소리가 어느새 갈라져 있었다.

-그렇습니다. 전부 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회장님.

“내일 첫 비행기로 올라가겠습니다. 다들 모이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진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모습에 지민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혜주를 안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아아악! 으아아악!”

와장창창!

창자를 쥐어짜는 비명과 함께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 * *

다음 날 서울로 올라와 시내의 모 호텔로 들어가자 다들 모여 있었다.

고용준, 박이동, 김상조, 신용찬, 노선기, 황진선, 한상국…….

억지로 연락을 끊고 지낸 시간이 길어 반갑게 맞아도 모자랄 판에 굳은 얼굴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진혁이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보고해 보세요.”

“열 개의 계열사를 매각한다고 발표했는데 우리를 모두 포함시켰습니다. 나머지는 무늬만 남은 곳들로 구색 맞추기로 끼워 넣은 겁니다. 회장님이 다시 활동하자 넘겨주지 않으려고 서둘러 정리하려는 겁니다.”

“발표문 내용에 방만 경영 지양, 신규 투자, 일자리 창출, 상생이라는 대통령의 국정 운영 철학을 모두 담았습니다. 청와대의 반대를 막겠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발표 시기도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졌습니다. 회장님이 신설 ‘농어촌 지원단’을 맡게 된다는 발표와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사전에 미리 알고 동시에 기자 회견을 연 겁니다.”

“억울합니다, 회장님. 이대로 당할 수는 없습니다. 명예 회장님에게라도 따지셔야 합니다.”

노선기가 참았던 울분을 토해냈다.

진혁은 그렇지 않아도 주명근 명예회장에게 전화를 했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기대할 게 없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진혁이 말했다.

“당분간은 서울에 머물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일단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회장님!”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는 알라딘의 직원들을 잊으신 겁니까. 흔들리고 있을 그들을 위해서라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세요. 각자 고민해 보고 퇴근 후 다시 봅시다.”

“알겠습니다. 저녁때 오겠습니다.”

다들 떠나고 혼자 남은 진혁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태후 그룹 회장실에서도 TG와 관련해 대화 중이었다.

“TG 기획실장이 모사꾼이라더니 이번에 제대로 한 건 했구나.”

“너무 비열해요.”

“비열? 넌 이것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정진호가 오늘자 신문들을 정인영 앞에 가져다 놓았다.

한결같이 일면 머리기사는 TG 그룹 주경운 회장의 발표가 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칭찬 일색이고 환영하는 논조였다.

인터넷 기사들의 댓글은 그 강도가 더 했다. 다른 그룹들도 따라 해야 한다며 성토까지 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알라딘 코리아를 서진혁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글은 없었다.

신문을 애써 외면하고 진영이 말했다.

“진혁 씨가 쉽게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예요.”

“누차 이야기했지만 놈이 아무리 뛰어나도 개인이다. 지난번에 TG에 넘겨주고 은퇴했을 때 이미 그건 증명이 되었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지금은 정부의 요직까지 맡게 된 상태다.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진 거지.”

“…….”

“이제 그놈은 잊어라. 지금은 알라딘 코리아의 인수에 집중해야 할 때다. 조사한 것을 말해 봐라.”

정인영은 한숨을 쉬고 가져온 서류철을 펼쳐 보고를 했다.

“보름간 신청을 받아 최고가를 적어낸 기업으로 선정하겠다고 했어요. TG 그룹이 보유한 알라딘 코리아의 전체 가치는 4조 원 정도로, 알쇼핑을 가지고 있는 알라딘 유통이 2조 원으로 반을 차지하고 있어요. 화장품과 동성F&B는 우리와 중복되니 맞지 않고, 알라딘 헬스 케어가 좋을 것 같아요. 5천억 원 정도로 가격도 적당하고요.”

“알라딘 유통을 타깃으로 잡고 계획을 세워 봐라.”

“너무 크지 않아요?”

“네 오빠도 이제 들어올 때가 됐다. 그 정도는 되어야 체면이 선다.”

정진호는 이번을 기회로 중국에 머물고 있는 정호영을 불러들일 작정이었다.

* * *

호텔에 있던 진혁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청와대 인근 삼청동으로 갔다.

고풍스런 느낌의 한정식 집으로 들어가자 밀실로 안내해 줬다.

이현국과 김세동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와서 앉읍시다.”

이현국의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김세동도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혁이 자리에 앉자 이현국이 말했다.

“대통령의 심려가 크십니다.”

“송구스럽게 됐습니다.”

“단장은 원래 다른 이였는데 막판에 서 회장님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게 다 TG 그룹의 농간이었습니다.”

“…….”

“이미 검토하시고 오셨겠지만 우리가 TG 그룹을 압박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칭찬해 줘야 한다는 분위기입니다.”

“이해합니다.”

진혁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청와대에게 나서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현국의 질문에 여기 오기 전까지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긴 시간 치욕을 감내하며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알라딘 식구들을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끝까지 싸워야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주도에서 땀을 흘리며 희망을 키워 가고 있는 동행 식구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들에게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겨우 찾은 마지막 탈출구였다.

거기에 곽영섭, 홍준기 사장의 회사는 동행이 좌초되면 함께 쓰러진다. 자신을 믿고 확보해 둔 자재들 때문이었다.

진혁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동행은 절대 멈출 수 없는 일입니다. 거기에 많은 사람들의 삶이 걸려 있습니다.”

“압니다. 하지만…….”

“제 개인의 일로 그분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설사 알라딘을 포기해야 된다고 해도.”

“미안합니다. 대통령께서도 회장님의 결단에 감사해하실 겁니다.”

이현국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진혁은 함께 인사하고 힘없이 일어나 나왔다.

김세동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호텔로 돌아온 진혁은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을 보고 억지로 힘을 냈다.

포기할 때 포기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은 다해야 했다. 그게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같았다.

그만큼 TG 그룹의 전략은 철저했다. 희망은커녕 절망적인 소식만 들렸다.

알라딘 코리아는 모두 알짜 회사들이라 기업들의 신청이 쇄도하고 있었다.

진혁이 스미스에게 맡겨 운영하는 자금은 8억 달러 가까이 됐다. 개인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9천억이 넘는 큰돈이었지만 TG 그룹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금액이었다.

진혁은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무기력감을 느꼈다.

하지만 표현할 수는 없었다.

포기하지 않고 어떤 방법이라도 찾아내려고 눈이 벌겋게 되어 있는 이들 때문이었다.

* * *

신청서 마감을 사흘 앞둔 날.

마지막 희망의 끈을 끊어 버리는 전화가 왔다.

미국 폴스데이 로펌의 수석 변호사 베이커였다.

“베이커입니다, 회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계약서를 면밀히 검토해 봤지만 너무 허술하게 작성이 되어 승소 확률이 극히 적습니다.”

“…….”

“미국이라면 여론에 호소라도 해 보겠지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도움이 못 되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전화를 끊은 진혁은 낙담한 표정을 짓는 이들에게 말했다.

“B 플랜으로 진행해 주세요.”

“회장님!”

“죄송하지만 여러분이 결정해 주시고, 전 좀 쉬어야겠습니다.”

힘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진혁을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B 플랜은 최악의 경우 하나만이라도 건지는 전력이었다.

알쇼핑이 속한 알라딘 유통은 금액 문제로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다.

알리딘 헬스 케어는 노선기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제외했다.

진혁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 알라딘 화장품과 동성F&B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지만 해야만 했다. 그 결정을 진혁에게 내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혹했다.

그걸 알기에 붙잡을 수 없었다.

진혁이 막 침대에 누우려고 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

사건이 터진 후 일절 외부의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액정에 뜬 번호를 보고 그럴 수 없었다.

꼭 받아야 하는 전화였다.

“카심 씨?”

-이집트로 와 줘야겠소, 미스터 서.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잔뜩 굳은 카심의 목소리에 머뭇거릴 새가 없었다.

설혹 이보다 더한 일이 있더라도 그가 부른다면 달려가야 했다.

* * *

카이로 국제공항에 도착해 출국장을 빠져나오자 카심이 다가와 빠르게 말했다.

“핫산 사장을 포함해 임원들은 다 잡혀 갔어요. 공장은 군인들이 포위하고 있어 접근도 못 하게 하고 있고요. 대체 무슨 일이…….”

“서진혁 씨 되십니까?”

그 때 양복을 입은 건강한 체격의 사내들이 어느새 다가와 물었다.

“그렇소.”

“각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가시죠.”

“그럽시다.”

거부하면 끌고라도 가겠다는 태도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갔다.

대통령 궁으로 가자 압델 팔라햐 대통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셰라피 국방장관과 이브라힘 내무부 장관, 그리고 처음 보는 중년의 사내가 함께 있었다.

진혁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무리 서운했어도 그렇지 우리 인연이 얼마인데 발길을 끊나. 와서 앉게.”

자리에 앉자 셰라피가 말했다.

“자네를 불러들일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어쩔 수 없었네. 이미 다들 풀려났고 군인들도 철수했을 것이네.”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자네가 한국에서 코너에 몰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그래서 도움을 줄까 하고 불렀어.”

압델이 답을 하고 눈짓을 하자 이브라힘이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지난 시절 서 회장에게 3억 달러를 받으신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나 봅니다. 그래서 그 돈을 돌려주시려고 합니다.”

“…….”

“돈을 돌려드릴 테니 그때 맺은 광구 계약은 없던 것으로 하시지요.”

이브라힘은 당시 잡혀 있던 진혁을 풀어 주는 조건으로 3억 달러를 강탈해 갔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을 면하고자 쓸모없는 광구를 매각하는 형식을 취하게 하는 치졸함도 보였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닥이며 다가오게 했다.

이브라힘이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숙여 얼굴을 내밀었다.

쫘아악!

짝도 아니고 쫘아악 소리가 날 정도로 진혁이 온 힘을 다해 손을 휘둘렀다.

쿵!

이브라힘의 몸이 속절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뭐 하는 짓인가!”

셰라피가 호통을 쳤지만 진혁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노려보는 압델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장군께서는 은원이 확실한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는 은혜로, 피는 피로. 과거의 일은 이것으로 덮겠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각하와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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