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조흐르 가스전
“결정을 돕기 위해서 한 가지를 더 알려 드리겠습니다. 저는 출국장을 나서기 전에 변호사에게 연락해, 제가 유고시 쇼룩 광구에 대한 권리는 라이나 왕비님과 알-아즈하르 대사원이 갖도록 하는 유언장을 작성했습니다.”
정확히 광구 이름을 알고 있고, 나중 일까지 생각하고 찾아온 모습에 압델은 애초의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진혁은 카심의 전화를 받고 이동하면서 사태를 파악했다.
어처구니없이 뒤통수를 맞은 게 두 번이었다.
지금도 그중 하나는 진행 중이었다. 세 번씩이나 같은 일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진혁이 찾은 상대는 CIA의 잭슨이었다.
중국 정부의 공작으로부터 진혁을 지켜 주지 못한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던 잭슨이라, 모든 역량을 동원해 사태를 파악해서 적시에 알려 줬다.
잠시 당황했던 압델이 빠르게 평정을 찾았다.
“하하하하. 자네가 그 난리통에도 혼자 남아 있던 지독한 상사원임을 잊고 있었네. 난 용기 있는 자는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알려 줘라.”
“석유부 장관 파흐미오. 탐사 중이던 이탈리아 에너지 기업인 에리(ERI)가 쇼룩 광구에서 대형 가스전을 발견했소.”
이어진 이야기는 잭슨에게 들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파흐미가 말을 이었다.
“조반니 비스코 에리 회장이 개발권을 주면 가스 판매 계약 때 산유국에 내는 로열티 10%를 미리 일시불로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해 왔소. 우리가 여전히 51%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있어서 이쪽으로 연락해 온 거요.”
진혁은 그제야 자신을 이렇게 무식한 방법까지 동원해 급하게 부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언제 개발하고 채굴해서 가스 판매 계약이 될지도 모르고, 설사 계약한다고 해도 로열티 계약 기간에 따라 분납하게 되니 실제로 한 번에 들어오는 돈은 많지 않았다.
이집트는 여전히 외화 부족을 겪고 있어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해 놓은 상황이었다.
에리의 제안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혁은 표정은 싸늘했다.
“당신 바봅니까?”
“말이 심하오.”
“상대가 그런 제안을 했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의심해야 할 거 아닙니까. 조반니 회장이 자선 사업가라 이집트 정부 사정이 딱 해서 그런 제안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말인가.”
진혁의 호통이 길어지자 세라피가 자르고 들어왔다.
“가스를 터키로 가져가겠다는데 태평스럽게 그걸 받아들이자고 하잖습니까.”
“터키로?”
“쇼룩 광구는 지중해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여기나 터키나 별반 차이 없습니다.”
“지도 가져와라!”
압델의 호통에 뺨이 부풀어 오른 채 슬쩍 일어나 옆에 앉아 있던 이브라힘이 급히 지도를 펴서 내밀었다.
“이런.”
진혁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꼭 터키로 가져간다는 보장은 없잖은가?”
“EU는 천연 가스의 69%를 수입하는데, 그중 37%가 러시아산입니다.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중단하면 EU 공장 반이 멈추게 됩니다. 그래서 EU는 터키를 통해 인근 아제르바이잔이나 투르크메니스탄, 알제리 등으로부터 공급받아 러시아 의존도를 낮추려는 계획을 진행 중입니다.”
“사실이냐?”
파흐미는 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압델의 싸늘한 눈빛에 몸만 떨고 있었다.
“쓸모없는 놈들. 서 회장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제가 51%를 가진 최대 주주입니다. 당연히 챙겨야 할 일이었습니다.”
진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자신이 대주주임을 은근히 확인시켜 줬다.
그걸 느낀 압델이 잠시 진혁을 잠시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서 회장이 광구 개발을 맡아 주게.”
“제가요?”
“군 출신 놈들은 충성심은 좋은데 대가리가 굳어서 안 돼. 사업은 사업가가 상대해야지. 자네가 최대 주주잖은가?”
“좋습니다. 제가 맡겠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각자 달랐다.
압델은 이런 식으로 해서 우선 가스전 개발의 주도권을 쥔 다음 서서히 진혁의 힘을 약화시키고 자신이 전면에 나설 작정이었다.
진혁 역시 그 점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과 같이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만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제주도에서 구상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가스전 개발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 일의 주도권을 자신에게 맡기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웃는 얼굴로 대통령 궁을 나서자마자 진혁의 얼굴은 바로 딱딱하게 굳었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TG 그룹 회장실은 그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좋았다.
신청서 접수가 마감되었는데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었다. 평균 경쟁률만 5:1이 넘었다.
오교훈이 재빨리 분위기를 맞추는 말을 했다.
“모든 기업이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그중에 태후 그룹이 압권입니다.”
“그래?”
“알라딘 유통에 금액란을 비운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정인영 실장이 직접 전화해서 얼마를 적어도 상관없으니 자기들이 받게 해 달라며 부탁까지 하더군요.”
“콧대 높게 굴던 태후가 말인가?”
“아마 중국에 있는 정호영을 불러들여 맡기려는 모양입니다.”
“어디건 자식들이 말썽이야. 정진호 회장도 그놈 때문에 골머리깨나 썩을 거야. 하하하하.”
통쾌한 웃음이 주경운의 기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박인식의 말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기업들이 전화해서 신청을 철회하겠답니다.”
“갑자기 왜?”
“그건 모르지만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당장 알아봐.”
오교훈이 일어나려고 할 때 다시 문이 열리며 직원이 들어왔다.
“TV에서 속보가 나온답니다. 회장님이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박인식이 재빨리 리모컨을 찾아서 켰다.
-이탈리아 에너지 기업인 에리(ERI)가 지중해 해역에서 사상 최대 규모 천연 가스전을 발견했습니다. 이집트 석유부의 발표를 들어 보시겠습니다.
화면이 바뀌며 석유부 장관 파흐미가 발표문을 낭독했다.
-조흐르(Zohr) 가스전에는 천연 가스 30조 입방 피트가 매장된 것으로 확인됐는데, 이는 지금까지 세계에서 발견된 가스전 중 최대 규모입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천억 달러에 이릅니다.
“헉.”
그때 화면 상단에 사진 한 장이 나타났는데 모두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이집트 정부는 최대 지분을 가진 서진혁 알라딘 그룹 회장을 개발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최대한 빨리 개발이 되도록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임을 밝힙니다.
이후 국내 전문가라는 자가 나와 한국이 12년 이상 소비할 수 있는 메머드급 가스전이라며 흥분해 떠들었지만 누구의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놀라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 * *
태후 그룹 회장실의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당사자가 아니라 충격이 덜한 정진호가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생명력 하나는 질긴 놈이다. 밟아도 밟아도 끝끝내 일어서는구나.”
정인영은 서진혁에 대해 누르면 더 튀어 오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만큼 분위기가 무거웠다.
“네 오빠에게 들어올 필요 없다고 전해라.”
“다른 계열사를 맡기셔도 되잖아요?”
“바보같이……. 보이는 현상은 누구나 안다. 경영자는 그다음을 봐야 한다. 시야를 넓게 가져라.”
“…….”
“지금은 서진혁이 알라딘 코리아를 지킨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저 정도면 개발비만도 최소 30억 달러는 될 거다. 앞으로는 개발권을 따내기 위한 전쟁의 시작이다. 놈은 이제 모두가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는 인물이 됐다. 그룹 총수들은 물론 대통령까지도.”
정인영은 아직 아버지의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 * *
인천 공항에 도착한 진혁은 국정원 김상균 차장을 보고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차장님이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원장님이 아니라서 서운하다는 말씀 같습니다.”
“하하하. 그럴 리가요.”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편하게 농담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게 감사했다.
함께 걸으며 김상균이 말했다.
“김 특보님이 내내 걱정하셨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걱정을 끼쳐드린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전 걱정을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
“서둘러 이집트로 출국하셨다는 소식에 오히려 기대가 컸습니다. 항상 그러셨잖습니까? 위기 때마다 오히려 더 큰 건을 가지고 돌아오셔서 해결하셨지요.”
“하하하. 또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요?”
시나이 반도의 한국인 관광객 납치 사건으로 만나 이런저런 일을 함께 겪으며 지내 온 인연이 길었다.
걸어가던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국장은 저쪽 아닙니까?”
“대통령께서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앞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 뒷문으로 빠져나갈 예정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부딪힐 일인데 그냥 여기서 하고 갑시다.”
“대통령께서 기다리십니다.”
“짧고 굵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해 주십시오.”
이전과 달리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펴는 진혁의 모습에 김상균이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진혁의 위상은 그때와 천양지차였다. 조흐르 가스전 개발 위원장은 장관급 인사였다.
인천 공항 기자 회견장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진혁이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신문사는 물론 방송 카메라까지 보였다.
“서진혁입니다. 이미 다들 아실 테니 사설은 빼고 바로 질문을 받겠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손을 들어 진혁은 가장 앞자리의 기자를 지목했다.
“쇼룩 광구에 투자한 경위를 알려 주십시오.”
“제가 알라딘 사업을 일으킨 게 이집트입니다. 감사한 마음에 투자할 곳을 찾다가 마침 정부에서 광구 매각을 추진하고 있어 매입하게 된 겁니다.”
“자원 개발 투자는 그 성공 확률이 굉장히 낮다고 알려졌는데, 단번에 성공한 비결이 있으십니까?”
“그냥 운이었습니다. 제가 학창 시절에 연필 좀 굴려 봤습니다.”
“하하하하.”
적당히 둘러대고 넘겼다. 성질 같아서는 그때의 억울함을 알리고 성토하고 싶지만 이제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게다가 이집트 정부의 감투까지 쓴 마당이라 누워서 침을 뱉을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 지목된 기자가 질문을 이었다.
“개발 위원장을 맡으셨는데, 개발사로 한국 기업도 고려하고 계십니까?”
“당연히 고려하고 있습니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제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기업을 택할 것이라는 기대는 말아 주십시오. 전 열 명의 심사 위원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이어서 개발위원장을 맡게 된 경위와 압델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도 성심껏 답변했다.
앞으로 계획에 대해 묻는 질문에는 확정된 것이 없다며 적당히 들려줬다.
얼마간 더 질문을 받던 진혁이 손을 들고 말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마지막 질문을 받고 마치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지목받은 기자에게 마이크가 넘겨졌다.
“TG 그룹의 알라딘 코리아 매각이 무산됐는데 이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그건 제가 답변하기 적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TG 그룹에서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TG 그룹은 개발에서 배제되는 겁니까?”
“말씀드렸듯이 신청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TG의 의사에 달려 있습니다만, 주경운 회장님이 국민들 앞에서 전자 통신에 매진하시겠다고 직접 발표까지 하셨는데 설마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하겠습니까?”
뒤끝이 분명한 답변으로 마무리 지은 진혁이 나가는 모습에 질문을 못 한 기자들이 앞다퉈 소리를 질렀지만 국정원 직원들이 막았다.
청와대로 가는 차 안에서 김상균이 물었다.
“신문 보셨습니까?”
“다 아는 이야기라 안 봤습니다.”
“가스전이 아니라 TG 그룹에 대한 기사 말입니다.”
“……?”
“그동안 철저히 침묵하다가 상황이 바뀌니까 신문사들이 앞다퉈 TG 그룹의 부도덕성을 비난하는 기사를 올렸습니다. 그걸 읽은 국민들이 TG 그룹으로 몰려가 ‘알라딘 코리아’를 회장님께 돌려주라며 항의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TG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지요. 알아서 잘 정리해야 할 겁니다.”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에 김상균은 그가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혁은 대답한 후 등을 시트 깊숙이 묻고 눈을 감았다.
‘총성 없는 전쟁에서 죽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바뀌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