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53화 (153/307)

153화. 각자 알아서들

-인재 개발원입니다.

“청와대인데, 원장님 계십니까?”

-헉……. 청와대시라고요?

“안 계십니까?”

-아닙니다. 잠시만요.

놀란 직원이 후다닥거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까지 들려왔다.

얼마 후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장 최효을입니다. 청와대시라고요?

“부총리실 산하 농어촌 지원단입니다. 발표는 보셨지요?”

-아, 네. 봤습니다. 대통령께서 직접 챙기시는 일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다음 주부터 2주간 이백 명 정도 급하게 합숙 교육을 시키게 생겼습니다. 청와대에서 워낙 재촉해서요. 가능하겠습니까? 안 되면 그렇게 보고하고 연기하려고요.”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다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최효을이 답했다.

-다행히 잘 맞추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이고, 이런. 혹시라도 저희 때문에 다른 곳에서 피해를 보는 건 아닙니까?”

-아닙니다. 저희가 항상 이런 일에 대비해서 여유를 두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정확한 인원수가 파악되면 실무자를 통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전화를 끊은 박이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이들을 보고 한마디만 했다.

“봤죠?”

* * *

진혁은 교육 준비를 우상우에게 맡기고 거의 한 달여 만에 제주도로 내려왔다.

제주도는 한창 여름 야채를 수확하는 철이라 바빴다.

그래도 서귀포 센터의 감귤 작업이 끝나서 공장이 멈췄기에 그나마 여유가 있었다.

물론 그동안 만들어 창고에 쌓아 놓은 제품들은 컨테이너에 실려 계속해서 팔려 나가고 있었다.

“입소문이 퍼져나가는지 주문량이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올해는 제품을 더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상하시는 것보다 더 만들어야 합니다. 알쇼핑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그 파급력은 훨씬 클 겁니다.”

“알겠습니다.”

최창봉이 큰 목소리로 답했다.

물건이 더 팔린다는데 싫어할 이는 없었다.

* * *

이틀 후 진혁이 혜주를 안은 지민과 함께 펜션 앞에 섰다. 서울로 올라가서 생활해야 할 시간이 됐다. 짐은 이미 차에 실었다.

갑작스럽게 서울 생활을 해야 해서 일단은 김세동의 집에서 지내면서 집을 구하고 이삿짐은 그때 옮기기로 했다.

그들 앞에 이수호네 가족이 아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특히나 예솔이는 눈에 눈물이 한 가득이었다.

“언니, 우지 마. 금방 오께.”

아직 어린 혜주라 명절 때처럼 잠깐 다녀온다고 알고 있었다.

진혁이 몸을 낮춰 예솔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예솔이 에버랜드 가고 싶다고 했지?”

“흑흑. 예…….”

“방학 때 모두 가자. 자유 이용권 끊어서 하루 종일 놀아.”

“정말요?”

“그럼 언제 큰아빠가 거짓말한 적 있어?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있다가 방학하면 언니 오빠랑 올라와.”

“알았어요.”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한 후에야 예솔이가 눈물을 그쳤다.

“이제 가 보셔야지요.”

“그래. 서울에서 보자.”

이수호와 최창봉도 강의를 하게 되어 있었다. 전문 지식도 중요하지만 직접 몸으로 체험한 경험을 듣는 것도 좋은 교육이었다.

지민도 난숙과 아쉬운 작별을 나눴다.

“형님,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무슨 소리. 내가 더 고마웠지. 동생이 있어서 큰 힘이 됐어. 나중에 올게.”

난숙마저 눈물바람을 할 것 같아 보여 서둘러 차에 타고 출발을 했다.

* * *

남부 순환로에 위치한 인재 개발원 강당에 240여 명의 동행 식구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최을효 원장이 과할 정도로 신경을 써서 준비해 줬다.

간단히 환영 인사와 동행의 의의에 대해 설명한 진혁이 강사 대기실로 가자 서울 모스크의 이맘 나흐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오늘의 강사였다.

아랍식 인사를 나누고 마주 앉았다.

“너무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습니다. 아니, 들려왔다가 맞는 표현 같습니다. 여러 일을 겪으셨는데도 항상 우리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여러 가지로 더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서로 감사하면 된 겁니다.”

“이제는 저 혼자 힘만으로는 벅차서 함께 갈 이들을 모았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그 또한 우리를 위하는 이들이니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한상미가 들어와 시간이 됐음을 알렸다.

나흐얀이 강당으로 들어가자 진혁도 밖으로 나왔다.

한편, 그 시각 고용노동부 대강당에서는 농어촌 지킴이 교육이 있었다.

농어촌으로 가고자 하는 젊은이들 오백 명으로 강당 안은 열기가 대단했다.

연단에서는 이수호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최창봉은 아래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이런 자리에 강사로 나설 거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진혁에 대한 감사함과 다른 동행 가족들을 위해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하나도 숨김없이 알려 줬다.

한 주가 끝나는 마지막 날은 지민이 강사였다.

그녀가 무슬림 관광객 유치를 시작한 산증인이었다. 오후에는 알쇼핑 사이트 이용에 대한 교육도 맡았다.

강의를 마친 지민이 힘든 표정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진혁이 얼른 다가갔다.

“힘들었지?”

“조금요. 오랜만에 여러 사람 앞에 서서 긴장했나 봐요.”

함께 주차장으로 걸어가던 진혁이 무언가 생각하다 물었다.

“우리 저녁 먹고 들어갈까?”

“혜주가 기다릴 텐데.”

“장모님이 잘 봐주시겠지. 내가 먹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뭐 먹고 싶은데요?”

“집밥.”

“먹고 가자면서요?”

“그 집밥 말고.”

“아!”

지민의 얼굴에도 미소가 맺혔다.

이모네 집밥.

제주도로 가면서 못 가 본 지 2년이 훌쩍 넘었다.

“그래 가요.”

두 사람은 꽉 막힌 남부 순환로를 내려다보고 전철을 타고 가기로 했다.

사당역까지는 가까웠다.

항상 붐비는 곳인데다 퇴근 시간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당연히 서서 가야 했다.

얼마쯤 갔는데 앞자리에 앉은 오십 대 중반의 아저씨가 자꾸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는 핸드폰을 열어 뭔가를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서진혁 회장님 아니십니까?”

“절 아십니까?”

“맞네, 맞아. 대한민국에서 서 회장님 모르면 간첩이지. 뉴스에 몇 번이나 나왔는데.”

아저씨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주변 사람까지 쳐다봤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손 한번 잡아 봅시다.”

손바닥을 바지에 빡빡 문지르고 내민 손을 얼떨결에 잡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걸 타요?”

“오랜만에 집사람이랑 데이트 가는 중입니다. 제 아내입니다.”

“아이고, 부인도 미인이십니다. 그런 큰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이러니 그렇게 좋은 일들을 하시지.”

“칭찬 받으려고 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지하철이 어때서요. 빠르고 편한데.”

“말씀도 참 소탈하게 하시네. 이렇게 착한 분 것까지 빼앗아 제 뱃속을 채우려고 했으니 쳐 죽여도 시원치 않습니다.”

“……?”

“TG 놈들 말입니다. 내가 그 소리 듣고 집에 있는 TG 제품은 다 때려 부숴서 버렸습니다. 국민들이 사 줘서 그만큼 큰 줄도 모르고.”

“저기, 아저씨……. 저는 괜찮으니 이제 그만…….”

아저씨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이제 전철 안의 손님들이 다들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진혁이 막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게 사태를 악화시켰다.

“천사가 따로 없네, 천사가. 이러니 그 도적놈들에게 전 재산을 다 맡겼지. TG 물건은 싹 다 버려 버리고 사지도 맙시다. 안 그래요, 여러분?”

“맞습니다.”

“옳소.”

여기저기서 자신의 말에 호응하자 기분 좋아진 아저씨가 갑자기 일어섰다.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읍시다. 대대로 가보로 물려줄 거요.”

“그건 좀…….”

찰칵.

그게 시작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사진 찍기를 원했고 일부는 사인까지 해 달라고 했다.

지민도 덩달아 같이 찍어야 했다.

새롭게 탄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왔다가 또 사진을 찍자며 달려들었다.

진성여대역이 조금만 멀었으면 두 사람은 실신했을지도 몰랐다.

“후아……. 대단들 하시네.”

“앞으로는 선글라스라도 가지고 다녀야겠어요.”

“그러게 말이야. 황당하네.”

힘들게 도착한 이모네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 정겨웠다.

진혁이 들어서자마자 크게 소리쳤다.

“이모! 저희 왔어요.”

“어머, 어머. 이게 누구야.”

“그동안 건강하셨지요?”

“왜 이제 와?”

“보고 싶어서 혼났어요.”

지민이 글썽이는 눈물로 눈이 벌게진 이모를 껴안아 줬다.

밥맛도 변한 게 없었다. 스테인리스 밥그릇, 투박한 사기그릇에 담긴 반찬에 진혁이 두 그릇을 뚝딱 비웠다.

“좀 더 먹어.”

“아이고, 배 터져요.”

“고생 많았지? 내가 뉴스 보고 TG 제품은 다 내다 버렸어. 나쁜 놈들.”

여기나 저기나 TG 욕이었다.

“나도 시위하러 가려다가, 더운 나라에서 가스 파서 큰돈 벌었다고 해서 참았어.”

“잘하셨어요. 여기 찾아오는 배곯는 학생들 생각하셔야지요.”

“그래야지. 고마워. 여기서 밥 먹으며 열심히 공부해도 취직 못 한 애들이 많은데 그런 일자리도 만들어 줘서.”

“이모 밥 먹고 온 애들은 다들 잘할 거예요. 그간 제주도에 있어서 못 왔어요. 앞으로는 자주 올게요.”

“뭐 하러 이 허름한 곳을 와. 더 좋은 데 가. 이제 돈도 많다면서.”

“돈 많은 놈들은 밥을 금덩이로 먹는대요? 제가 가 본 식당 중에 여기 밥이 최고예요.”

“으이그. 말이나 못 하면.”

눈을 흘긴 이모가 지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랑이 아무리 바빠도 애는 가져야지?”

“예? 아, 저 애기 낳았어요. 딸이에요. 지금 두 살 됐어요.”

“그랬구나, 그랬어. 잘했다, 잘했어.”

손을 토닥거리며 칭찬하는 이모의 손길에는 힘이 없었다.

혜주를 가진 사실을 알자마자 급하게 내려가는 바람에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손님이 들어와 이모가 일어나자 진혁이 말했다.

“다음에는 혜주 데리고 옵시다.”

“그래요. 보시면 많이 좋아하실 거예요.”

조금 더 앉아 있다가 시간이 늦어 일어났다.

“이모, 우리 가 볼게요.”

“그래. 늦었다. 얼른 들어가.”

“다음에 또 올게요.”

나가려는 지민의 손에 이모가 쇼핑백을 들려 주었다.

“이게 뭐예요?”

“애기 옷. 두 살이라고 이야기하고 사 왔는데 맞을지 몰라.”

“이모…….”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네가 애기 낳으면 꼭 옷 한 벌은 사 주고 싶었어. 명품이 아니라서 미안해.”

“그런 말씀 왜 하세요. 혜주도 저 닮아서 아무거나 잘 입고 잘 먹고 그래요.”

“너 닮았으면 예쁠 거야.”

“다음에 올 때는 혜주랑 같이 올게요.”

“정말?”

이모의 얼굴에 당장 화색이 돌았다.

“오늘은 회사에서 바로 오느라 못 데려왔어요. 주말에 같이 올게요.”

“주말에는 쉬어야지.”

“이모 방에서 쉬면 되죠. 가끔 몸 아플 때 거기서 쉬게 해 주셨잖아요.”

“그래, 그래. 내가 깨끗하게 치워 놓을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진혁이 말했다.

“꼭 와야 할 분위기네.”

“제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요.”

“그게 자기 잘못인가. 나 때문이지. 이제 자주 오자고.”

진혁이 지민의 어깨를 안았다.

결혼 전에 함께 같던 커피숍까지 들렀다가 집에 가니 혜주는 벌써 잠들어 있었다.

* * *

이틀 후 진혁은 지민과 함께 평소대로 출근길에 인재 개발원부터 들렀다.

9시가 가까워져 교육생들이 속속 강당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교육생들과 인사를 하며 강당으로 다가가던 진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서 회장!”

노구에 지팡이를 집고 서 있는 이는 TG 그룹 주명근 명예 회장이었다.

주경운에 이어 그까지 계속 면담을 요청해 왔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더니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거다.

“용서해 주게.”

“돌아가십시오.”

진혁이 차갑게 말했다. 주경운이 벌인 일이지만 주명근도 방조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주명근 회장이 무릎을 꿇었다.

“살려 주게.”

“엇!”

주변에서 지켜보던 교육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졌다.

주명근은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교육생들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TG 그룹이 어떤 상태이고 왜 그렇게 됐는지도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를 믿었던 만큼 배신당한 아픔도 컸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관한 한국 정부, 침묵한 언론. 그들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때 옆에서 손을 잡아 오는 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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