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화끈한 귀환
“여보.”
지민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제야 진혁의 눈에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는 동행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죄가 없는 사람들, 힘없고 절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모두 함께 가야 살 수 있다고 떠든 이가 자신이었다.
한국인과 한국 기업가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키는 것은 이것으로 됐다.
주명근은 ‘한강의 기적’을 일군 주역으로 국민들의 가슴속에 영웅으로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한순간의 실수로 그 모든 것을 무너지게 할 수는 없었다. 주명근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들을 위해서도.
마음을 정한 진혁이 얼른 다가가 그 앞에 함께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십시오. 회장님은 전후 고통받는 국민들이 잘살 수 있는 길은 기술 입국뿐이라고 생각하셔서 굴욕을 참아 가며 일본 기술자에게 기술을 배워 오신 분입니다. 그 높은 혜안으로 지금 대한민국이 부강한 나라가 되었음을 국민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서 회장…….”
“회장님은 재계에 마지막 남으신 버팀목이십니다. 저를 포함한 여기 모인 이들 모두 그런 회장님을 존경하고 닮고 싶어 합니다. 회장님은 개인이 아니십니다. 회장님이 쓰러지시면 이 나라의 미래는 없습니다.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당당하게 말씀하십시오. TG가 아니라 이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서진혁이 손을 잡아 일으키자 따라 일어난 주명근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말했다.
“서 회장.”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TG에 걸려 있는 입이 한둘이 아니네.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되네. 그들 역시 이 나라의 국민들이네.”
“알겠습니다. 진정으로 이 나라와 국민들을 위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회장님을 믿고 그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조만간 다시 보세.”
비서가 가져온 지팡이를 짚고 돌아서려던 주명근이 여전히 둘러서 있는 동행 가족을 보며 말했다.
“많이들 배우시게. 앞으로 대한민국의 재계는 서 회장이 이끌어 갈 것이네. 하지만 혼자서 할 수는 없는 일이야. 자네들이 곁에서 도와줘야 해. 그래야 멀리 함께 갈 수 있다네. 지금부터는 자네들이 새 시대의 주역들이야. 국민들에게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어 주게. 부탁하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회장님.”
동행가족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지민도 그들과 함께했다.
진혁만이 허리를 꼿꼿이 한 채 멀어지는 주명근의 등을 바라봤다.
주명근의 말대로 앞으로의 세상은 이제 자신이 이끌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 *
다음 날 오후.
TG 그룹 본사에서 주명근 명예 회장의 기자 회견이 있었다.
현 사태의 책임을 지고 주경운 회장이 일선에 물러나는 것은 물론, 사재를 처분해 2천억 원을 농어촌 발전 기금에 기탁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아울러 알라딘 코리아는 서진혁 회장에게 조건 없이 양도하고 그간에 얻은 이득도 모두 넘겨준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전문 경영인을 신임 회장으로 임명해 TG 그룹을 국민의 기업으로 이끌 것임을 밝혔다.
참석한 기자들 모두 주명근 명예 회장의 큰 결단에 탄복했다.
주경운 회장의 퇴진이나 알라딘 코리아를 양도한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신임 회장은 차남인 주성운 미주 본부장이 맡을 거라는 예상이 많았는데, 그마저도 내려놓고 전문 경영인 체제를 택했다.
당연히 기사도 호의적으로 나갔고, 국민들도 TG 그룹에 대한 성토를 멈췄다.
* * *
교육의 마지막 날.
진혁이 다시 한번 연단에 섰다.
“장시간 교육받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지는 상관없습니다. 한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세상은 넓고 팔 곳은 많습니다. 우리 모두는 물론 지역 사회, 국민 모두가 다 함께 살아갈 만큼 풍족합니다. 크고 넓게 보십시오.”
“예.”
“동행 가족들은 당당하게 행동하고 당당하게 요구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욕심은 잠시 접고 남부터 챙겨 주십시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싸우십시오. 그럼 비굴할 이유가 없습니다. 떳떳한 동행 가족이 되어 주십시오.”
“…….”
“요즘 제가 뉴스에 자주 나오다 보니 여기저기서 동행 사업을 돕겠다고 연락들이 옵니다. 기업체들은 물론 관공서들도 동행 제품을 납품해 달라고 청탁을 합니다. 하지만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아무도 답을 하는 이가 없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니어서입니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성실하게 납품하던 업체가 피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당하게 품질을 인정받아 납품해야 당당할 수 있습니다. 말이 쉽지 현실은 다르다고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해남 동행 센터장님, 어디 계십니까?”
“여기 있습니다.”
한 사내가 손을 들고 일어났다.
“요즘 대세가 해남 절인 배추인데 돈 좀 버셨습니까?”
“김장 때만 반짝할 뿐 큰 수익은 안 됩니다. 다른 지역들도 절인 배추 팔면서 그나마도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자체에서 김치를 만들어 팔면 부가 가치가 높다고 권유했을 텐데요?”
“맞습니다. 그 말 믿고 김치 공장 차렸다가 망한 이가 한둘이 아닙니다.”
“바닷바람 맞으며 자란 배추에 전라도 솜씨로 담은 김치면 맛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지자체 보조금 받아서 하는 사업이라 가격도 비싸지 않을 텐데 왜 망했다고 생각합니까?”
“판매처를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지자체 소개로 찾아가도 이미 납품하는 업체가 있다며 어렵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예전같이 관에서 시킨다고 무조건 받아 주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직거래를 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고요.”
진혁이 모두를 둘러보고 말했다.
“좋은 제품을 만든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팔아야 결과가 나오는 일입니다. 해남 김치 사업이 실패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고착화된 기존 시장에 차별화 없이 다가갔기 때문입니다. 여기를 보십시오.”
진혁이 화면에 무언가를 띄웠다.
다시 떠오른 무슬림 지도였는데 이번에는 한국을 중심으로 무수한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무슬림 국가로 오가는 항공편입니다. 하루 비행편 수만 수십 대도 넘습니다. 승객 수는 만 명이 훨씬 넘고요. 물론 승객은 무슬림만이 아닙니다. 한국인도 있고 다른 외국인들도 섞여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기내식을 어떻게 제공해야 할까요? 무슬림은 할랄 식품만 먹는다는데.”
“……?”
“지금은 승무원이 일일이 물어봅니다. 무슬림이라고 하면 할랄 인증을 받은 외국의 패스트푸드 제품을 따로 제공합니다.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한국인은 아무거나 잘 먹으니 할랄 인증 된 김치가 있다면 물어볼 이유도, 따로 준비할 필요도 없고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런 편한 제품을 같은 값에 납품하겠다면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다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서울에는 외국인 학교가 있습니다. 대사관이나 주재원들의 자녀들이 다닙니다. 당연히 무슬림 자녀들도 섞여서 교육받습니다. 지금은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같은 현상이 발생하지 않을까요?”
“……!”
“자, 여기서 다시 한번 사고를 넓혀 주십시오. 도시락을 만드는 데 김치만 들어갑니까? 쌀도 들어가야 하고 다른 반찬도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못 팔아도 다른 센터에서 팔아 줄 거니 할랄 인증만 받아 놓으십시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팔 곳은 많습니다.”
다들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의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그는 생각의 끝이 없는 사람 같았다.
정명근 회장 같은 사람이 왜 진혁이 재계를 이끌어 갈 재목이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교육이 끝났다고 이제부터는 알아서 하라고 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알쇼핑에서 우리 실정에 적합한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성질이 고약해서 그렇지 구룡포의 권기남 공장장님은 우리나라 통조림 최고의 기술자입니다. 그들을 귀찮게 하십시오. 끊임없이 요구하십시오. 그래도 됩니다. 왜? 우린 동행의 한 가족이니까. 감사합니다.”
고개 숙인 진혁의 머리 위로 뜨거운 박수 소리가 떨어졌다.
* * *
동행 가족들이 돌아가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자 진혁은 알쇼핑 건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그간 고생 많았습니다. 이제 와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악수를 하는 경비원의 눈가에 이슬에 맺혔다.
그만이 아니라 마주치는 직원 모두 진혁의 복귀를 반겼다.
최상층에 마련된 회장실에 들어서자 모두 모여 있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고용준부터 지난 실적에 대한 업무 보고를 했다. 주경운의 와해 공작 속에서도 꾸준히 실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생했습니다.”
“회장님이 돌아오셨으니 이제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보고를 끝낸 AK 화장품 황진선 사장이 무심코 하는 말에 진혁이 가타부타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 남은 노선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고하십시오.”
“회장님이 돌아오실 때를 대비해 AK 헬스 케어는 그동안 신제품 개발에 매진했습니다. 주력 상품인 덱스톨과 덱스첵은 개인용이고 고가라 판매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용량 제품에 대한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해 개발에 착수, 마침내 덱스론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보고했던 이들이 뜨끔한 표정을 지을 때 노선기의 보고가 이어졌다.
“덱스론은 플래닛82 기술을 도입해 한 번에 최대 20명까지 동시에 혈당을 측정할 수 있어 병원용으로 적합니다. 그동안은 TG 소속이라 FDA 승인을 미뤘는데, 바로 관련 작업을 진행하여 최대한 빨리 판매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다들 고생하셨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사업에서 시간은 돈입니다. 유지는 퇴보입니다. 앞서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당연히 황진선의 고개가 제일 깊이 숙여졌다.
“많은 이들이 제가 뜬금없이 동행 사업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알라딘과 동행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실례로 서귀포 동행에서 성공한 청귤 관련 제품이 동남아시아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박수로 끝나면 안 됩니다. 청귤 추출물이 함유된 화장품이 바로 뒤따라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
“우리가 그들을 돕는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도움은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절박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든 만들어 낼 겁니다. 그걸 우리가 납품받아서 독점적으로 판매합니다. 그게 제가 알쇼핑을 분리 독립시킨 이유입니다. 최선을 다해 도와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유통에서 분리된 알쇼핑을 맡게 된 한상국 사장이 대표로 답했다.
“한 달 후에 향후 계획에 대한 보고를 받겠습니다. 잘 준비해 주십시오.”
초장부터 분위기를 다잡아서인지 모두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서둘러 보고 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고용준은 남았다. 할 말이 있어서였다.
“갈리 사장님과 선병식 사장님이 언제 오시는지 여쭤 달라고 하셨습니다. 어디부터 들르실 생각이십니까?”
“당분간은 국내에 머물면서 전국의 동행 센터를 둘러볼 작정입니다.”
“다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단호한 진혁의 태도에 고용준은 입을 닫았지만 답답한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공백기가 길었던 만큼 서둘러 해외 사업도 점검해야 하는데 태평스럽게 전국 투어를 하겠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혁이라고 왜 해외 사업을 챙기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억지로 그 마음을 눌렀다.
비겁한 도망자가 되어 제주도에서 고통을 곱씹으면서 보낸 세월이 2년이 넘었다. 어설프게 움직였다가는 또 그들의 사냥감이 될게 분명했다.
서둘러서는 다시 당한다.
앞으로는 그들이 먼저 찾아오게 만들어야 한다.
진혁은 자신의 말을 실천하듯 우상우와 함께 새로 오픈한 동행 센터들을 방문하는 일정을 가졌다.
단순히 얼굴만 내비치는 게 아니라 머물면서 지역 현황과 재배 작물에 대해서 듣고 바쁘면 일손도 거들었다.
저녁에는 직원은 물론 지킴이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그러다 보니 한 달 동안 겨우 열 개를 도는 게 다였다.
가을 햇볕에 시커멓게 탄 모습으로 서울로 올라와 보고를 받고 또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동행 센터 투어에 나섰다.
* * *
진혁이 움직이지 않자, 결국 그를 찾아 한국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