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가스전 개발 암투
인천 공항에 도착한 조반니 비스코 회장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에리는 연간 매출액만도 천억 달러가 넘는, 이탈리아 최대 국영 에너지 기업이었다.
조반니는 글로벌 500대 기업 중 당당히 21위에 오른 그 거대 기업을 이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한낱 이름 없는 사업가를 찾아 이 먼 길을 직접 왔다는 데 화가 났다.
그때 비서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두 시간은 더 이동하셔야 합니다.”
“비행기 없어?”
“그쪽에는 공항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욕이 절로 나왔다.
* * *
진혁은 괴산 동행 센터에서 직원들과 함께 고추를 따고 있었다.
한 달이 넘게 해 오는 농사일이지만 만만치 않았다. 한꺼번에 다 따는 것도 아니고 일일이 허리를 숙여 익은 것만 상처 나지 않게 따는 게 보통 곤욕이 아니었다.
우두둑.
몸을 펴자 허리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때 지킴이 중 한 명이 뛰어오며 소리쳤다.
“회장님! 센터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누구?”
“모르겠습니다. 나이 드신 외국분인데 모시고 오라십니다.”
진혁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일하는 중이니 기다리시라고 해라.”
“예?”
“일합시다.”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급하면 오겠지요. 여긴 오늘 중으로 끝내야 하니 서두릅시다.”
다시 허리를 숙여서 고추를 따는 진혁의 모습에 다들 다시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얼마 후 돌아갔던 지킴이 청년이 다시 왔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붉은 머리에 체구가 작은 노인과 금발의 체격이 좋은 중년이 함께였다.
“아무래도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진혁이 고추밭을 벗어나자 우상우가 눈치껏 따라왔다.
“서진혁입니다.”
“조반니 비스코네.”
“먼 길 오셨습니다. 손이 이래서 죄송합니다.”
악수를 하려 했던 진혁은 고추를 따느라 더럽혀진 손을 보고 다시 거두어 들였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제 의견은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조반니 회장이 으르렁거렸다.
심사 위원단 배분 문제 때문이었다.
원래는 지분대로 이집트 정부와 에리가 각각 다섯 명씩 선정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진혁에게 이집트 정부의 지분이 넘어가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광구에 대한 소유권이 없더라도 개발과 판매를 하기 위해서는 이집트 정부의 도움이 필수였다.
이집트 정부를 배려해야 한다는 진혁의 주장에 반해, 에리는 진혁과 이집트 정부 사이의 문제라며 양보하지 않아서 협상이 결렬된 상태였다.
“말이 안 되면 어쩔 수 없지요. 개발 안 하면 그만 아닙니까? 종일 서서 일했더니 다리가 아프네요.”
진혁이 나무 그늘을 찾아 앉으려고 하자, 우상우가 얼른 돗자리를 찾아다가 밑에 깔았다.
이를 악물고 노려보던 조반니가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앉아 있는 진혁에게 다가가 말했다.
“우리가 한 명 양보하지.”
“그건 원래부터 제 몫이었습니다. 양보가 아니지요.”
“뭣이!”
“51:49. 회장님도 사업하시니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잘 아시잖습니까?”
“끙.”
비록 2% 차이지만 그걸로 경영권이 바뀐다.
진혁이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서 말씀하시지요.”
“이보시오. 이분이 누구신지…….”
“됐다.”
비서의 말을 막은 조반니가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옆에 앉았다. 뙤약볕 아래에 서 있는 게 곤욕이었다.
눈길도 주지 않은 진혁의 행동에 오늘의 일이 쉽지 않다고 느껴졌다.
멍하니 고추밭만 쳐다보는 진혁의 모습에 결국 조반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길 원하는가?”
“4:3:3. 당연히 제가 4입니다.”
“욕심이 과하군.”
“유가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
툭 던진 진혁의 말에 조반니 회장의 눈이 커졌다.
놈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대형 가스전 발견은 진혁에게 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에리에게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최대 국영 에너지 기업답게 지분을 소유한 다른 가스전과 유전이 많았는데 그 대부분이 중동에 있었다.
조흐르 가스전 소식이 알려지자 공급 과잉 우려로 국제 유가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이미 작년 대비 절반 가까이 떨어졌는데 더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개발 중이던 레비아탄 가스전마저 좌초됐다.
진혁과 이집트는 ‘노다지’를 캔 격이지만 중동 산유국과 이스라엘, 에리는 폭탄을 맞았다.
일부에서 성급하게 발표한 조반니의 실책이라며 비난하는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개발마저 지지부진하다면 이사회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몰랐다. 어떻게든 서둘러 개발에 착수해야 했다.
“이제 아셨겠지만 제겐 애초부터 생각지도 않던 돈이었습니다. 회장님 정도는 안 되지만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은 있습니다. 지금보다 후대에 개발해 파는 게 훨씬 이득인데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압델 대통령이 공장과 직원을 잡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나선 일입니다.”
“자네 말대로 하겠네. 서둘러만 주게.”
조반니는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결정으로 가스전 개발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 * *
일주일 후, 이집트 대통령 집무실에서 의미 있는 만남이 이루어졌다.
각자 선정한 심사 위원 명단을 밝히는 자리였다.
예상대로 압델 대통령은 파흐미 석유부 장관과 건설, 산업부 각료를 선정했다.
조반니 회장은 에리의 개발 전문가 세 명으로 채웠다.
하지만 진혁이 내민 명단은 두 사람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앤서니 러브 캠브리지 에너지 연구소장, 에너지 컨설팅 회사 오일샌더의 애널리스트 크리스 하든, JK모건의 에너지 전문 애널리스트 케빈 챈들러.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세계적인 에너지 경제 전문가들이었다.
압델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의외군.”
“제가 파는 것은 잘하는데 에너지 개발에 대해서는 젬병이라서요. 어렵게 얻은 가스전인데 수익이 많이 남는 방향으로 개발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 세 명에 서 회장까지 포함해서 네 명인가?”
이번에도 진혁이 예상과 다른 답변을 했다.
“저 대신 다른 분을 선정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집트 에너지 투자 회사인 카이로 홀딩스의 아메드 말렉 회장입니다.”
“말렉을?”
“저를 믿고 위원장을 맡겨 주셨는데 제가 표를 행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렉 회장님이라면 이 나라의 국익을 위한 결정을 내리실 겁니다.”
“그건 그렇지.”
압델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국민을 추가로 선정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반대로 조반니 회장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LNG 선을 이용해 터키로 가져가려던 계획에 또 다른 암초가 튀어나왔다.
사흘 후, 조흐르 가스전 개발 위원회가 공표한 선정 방식은 파격적이었다.
경제성 분야의 점수가 50점으로 가장 높았다. 안정성이나 편의성은 후순위였다. 정부 주도의 개발에서 통상적으로 들어가는 기여도는 아예 항목에 제외되어서 있지도 않았다.
개발권을 따내기 위해 해당 국가에 별도로 차관을 제공한다든지 무기를 제공하는 식의 정치적인 꼼수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전 세계 기업들의 개발권을 따내기 위한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 * *
미국 뉴욕의 존에프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점장실로 가자 스미스가 반갑게 맞았다.
“새로운 곳에서 봬서 그런지 얼굴이 더 훤해지신 것 같습니다.”
“모두가 서 회장님 덕분입니다. 이집트에서 좋은 일이 있다는 소문은 듣고 있습니다.”
스미스는 진혁의 도움을 받아 중국 증시 폭락을 예견한 보고서로 유명해진 데다 함께 투자해서 큰 수익을 얻어 그토록 원하던 미국에 입성해 있었다.
비서가 차를 내놓고 나가자 스미스가 말했다.
“제가 찾아뵀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우리 사이에 누가 찾아오는 게 무슨 대수입니까.”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먼저 조흐르 가스전에 대한 제 지분 가치를 얼마 정도로 보십니까?”
“정확한 것은 면밀히 검토해 봐야겠지만 조흐르 가스전의 가스 매장량은 천억 달러인 수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지분이 51%이니 510억 달러지만 개발비와 각종 세금, 그리고 판매까지 걸리는 기간을 감안하면 실제 가치는 200억 달러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출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가능하겠습니까?”
“유전이나 가스전은 위험 요소가 많아 50% 정도만 담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대출을 받으시게요?”
“아닙니다. 그냥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 물은 겁니다.”
자신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키프로스 금융 위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 같습니까?”
“구제 금융의 결정권자인 유럽 연합(EU)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유로존 가입국인 키프로스는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무리한 복지 정책을 시행하다가 급격히 상승한 국가 부채로 인해 구제 금융을 신청해야만 했다.
유럽 연합 측은 구제 금융을 지원해 주는 조건으로 러시아 부호들의 조세피난처 역할을 하는 예금액에 대한 과세를 요구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예금자들이 놀라 은행에 들이닥쳐 돈을 찾아가려는 바람에 뱅크런 사태를 맞았다.
카프로스가 디폴트를 선언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전망에 국제 증시가 크게 출렁이고 있었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히 해결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일부 우려의 시각도 존재합니다만 키프로스 규모가 유로존 전체 GDP의 0.2%에 불과합니다. 최악의 상황이 도래해도 국제 경제에 미치는 것은 제한적일 거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혹시 문제가 커지는 겁니까?”
스미스가 침을 삼키고 물었다.
그가 아는 한 진혁은 이 시대 최고의 투자가였다. 그가 키프로스 사태에 집중한다는 것은 뭔가 큰 건이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의 투자 계획에 편승한다면 다시 한번 대박을 터트릴 수 있었다. 잔뜩 기대감이 밀려왔다.
그 모습에 진혁이 웃으며 답했다.
“큰일이 일어나겠지만 그것은 지점장님이 생각하는 그런 식은 아닙니다.”
“……?”
“비트코인을 아십니까?”
“전자 화폐잖습니까?”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용어일 텐데도 스미스는 금융 전문가답게 알고 있었다.
“맞습니다.”
“그쪽의 투자는 신중하셔야 합니다.”
스미스가 당장 우려를 나타냈다.
비트코인은 2009년 익명의 개발자에 의해 처음 등장한 암호화 화폐였다.
생소한 방식인 데다 공식 화폐로도 인정받지 못해 사설 거래소에서만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가격도 3, 4달러 정도고, 시장 규모도 겨우 20억 달러 정도로 미미해 언제든지 투기판으로 전략할 수 있어 위험성이 너무 컸다.
진혁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스미스였다.
순간의 기지로 그룹을 지켜냈지만 우군을 모두 잃고 말았다. 중동의 수피넷은 아마존에, 동남아시아의 자포라는 알리바마에.
진혁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도 버거운 상대들이었다. 기업 가치만도 5,000억 달러에 이르는 거대 공룡들이었다.
그에 반해 알라딘 그룹은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좋게 평가해도 겨우 200억 달러에 불과했다.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에 냉정함을 잃은 게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스미스의 표정을 보고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지점장님이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압니다만, 복수심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그러시면?”
“제 개인 자금의 일부만 비트코인에 투자해 실탄을 만들려고 합니다. 복수는 그다음에 정정당당하게 할 겁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저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그렇다면 안심입니다만, 여러 가지 여건상 JK모건이 이번 투자에 동참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해합니다. 오늘 상담료는 나중에 좋은 정보로 보답하겠습니다.”
스미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오늘은 비록 소득이 없었지만 약속을 받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진혁은 약속하면 반드시 지켰다.
그날 진혁은 스미스와 저녁 식사를 하고 그가 잡아준 호텔에서 푹 쉬었다.
* * *
공항에 도착해서 알라딘 홀딩스의 야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진혁입니다.”
-네, 회장님.
답하는 야맘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검은 머리 짐’의 능력을 여러 번 목격한 터라 이제 진혁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제 개인 계좌의 자금으로 비트코인에 투자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