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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58화 (158/307)

158화. 큰 그림을 그리다

나즈마 총리는 심호흡을 해서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옆의 사내를 소개했다.

“이쪽은 국영 방직 공사를 맡고 있는 책임자입니다.”

“이누입니다.”

“서진혁입니다.”

인사를 나누고 커피가 나왔는데도 진혁이 침묵하자 이누가 먼저 말했다.

“국영 방직소에 관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어디를 말씀하시는지요?”

“그게 뭐였더라…….”

진혁이 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지더니 결국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보고 말했다.

“소나르 제2공장입니다. 이거 참, 이런 걸 산다는 말을 하기도 민망하네요. 이 정도면 오히려 제가 돈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 싶습니다.”

“작년까지 문제없이 원단을 생산했던 곳입니다. 간단한 정비만 하고 바로 가동해도 됩니다.”

“그런 걸 왜 멈춰 놓고 파는 건데요. 돌리면 돌릴수록 손해여서가 아닙니까?”

진혁의 싸늘한 추궁에 이누가 답을 못하고 쩔쩔맸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즈마 총리가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고 나섰다.

“그 전에 그걸 사려는 이유부터 이야기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라이나 왕비님 때문입니다. 로힝야족에 친척이라도 있으신지 엄청 관심이 많으십니다. 총리님과 첫 만남도 그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학교를 세워 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이번에는 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시네요. 그래서 방직소를 인수해서 일을 시킬까 해서요.”

“그건 불가합니다.”

“아니, 왜요?”

“난민은 캠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채용도 불법입니다.”

“그런 규정이 있었군요. 미리 알았으면 그 고생을 하며 이런 쓰레기까지 보러 가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이누의 얼굴이 다시 심하게 일그러졌다.

진혁은 모른 척 말을 이었다.

“공장을 보러 간 김에 난민 캠프에도 들렀는데 난민 수가 엄청나게 늘어 있더군요. 총리님의 고충이 심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맞아요. 국제 사회는 해결할 의지도 없고, 라이나 왕비도 큰소리치고 가더니 코빼기도 안 보이고. 우리 정부의 부담만 가중되고 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이집트 가스전으로 공돈이 좀 생겨서 도와줄까 했는데 이건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저 같은 일개 사업가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라이나 왕비님 부탁이라 쓰레기 방직소라도 하나 사 드려서 생색이라도 내려고 했는데, 뭐 불법이라니 포기해야겠습니다.”

남은 커피를 단번에 마신 진혁이 말했다.

“괜한 일로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바쁘실 테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일어났다.

뒷모습을 보이며 문으로 걸어가는 진혁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여기서 잡지 않으면 일이 훨씬 힘들어진다.

막 문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요.”

바로 돌아가려는 몸을 억지로 막고 천천히 돌렸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먼저 다시 와서 앉아 보세요. 이누 사장은 잠깐 나가서 기다리세요.”

이누 사장이 서둘러 나가고 진혁이 천천히 걸어 다시 자리에 앉자,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노려보던 나즈마 총리가 입을 열었다.

“서 회장이 사업에 능숙하다면 난 정치에 능해요. 그러니 내 앞에서 어설픈 정치 놀이는 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이라면 다시는 이 나라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겠지만, 서 회장의 능력이 이 나라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

“난민 캠프에 다녀왔다니 그곳 실상은 말 안 해도 알 겁니다. 미얀마 정부에 누차 송환 요청을 했는데 들은 척도 안 해요. 중국 정부를 믿고 배짱을 부리는 거지요. 국제 사회의 돌아가는 실상도 그렇고요. 장기전이 될 겁니다. 그래서 나도 대비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난민을 이용해 돈벌이를 한다고 비난한다는 것은 알지만, 이 나라가 그들을 오랫동안 보호해 줄 만큼 여유롭지 못해요.”

솔직하게 툭 까놓고 이야기하니 진혁도 더 이상 연극을 할 수 없었다.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이제부터가 본 게임이다.

“서 회장이 책임진다는 조건에 로힝야 난민들이 해당 공장에 일하는 것을 허락해 줄게요.”

“감사합니다.”

“대신 두 개 다 인수해 줘요.”

“두 개 다를요?”

“부채 정도만 받을 거니 서 회장이나 라이나 왕비의 재력이라면 큰 부담이 안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한 곳은 우리 국민들을 채용해야 해요. 그 정도는 돼야 반대 여론을 잠재울 수 있어요. 로힝야 난민의 취업을 제일 우려하는 게 국민들이에요.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길까 봐서요. 그런 분위기는 서 회장도 알고 있지 않나요?”

능청스럽게 묻는 나즈마 총리의 얼굴은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계속 조건을 달더니 결국 빼도 박지도 못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정치에 능하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은 사업가였다.

이런 식으로 그냥 당하고 나가면 사업을 그만둬야 했다.

‘권력은 유한하지만 기업은 영원하다.’

자신은 나즈마 총리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대신 수출 가공 공단과 동등한 혜택을 받게 해 주십시오.”

“쉽지 않은 요구입니다. 원칙이 무너지면 다른 공장들도 동일한 요구를 해 올 겁니다.”

“표현을 격하게 써서 그렇지 쓰레기 공장은 맞습니다. 돌릴수록 손해라 아무도 나서지 않은 겁니다. 그보다 더한 인센티브를 걸어도 매수자는 없을 겁니다. 동등한 요구를 주장하는 놈들에게 남은 공장을 사면 그렇게 해 주겠다고 하세요. 저같이 사정이 있는 사람 아니면 아무도 나서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인수하겠다면 고맙다고 얼른 쓰레기를 치우시면 됩니다.”

“…….”

“대신 공장에서 일하는 로힝야 난민도 방글라데시 국민과 똑같이 세금을 내겠습니다. 그런데 설마 시민권도 안 주시면서 세금만 걷으시려는 것은 아니지요?”

“……!”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나즈마 총리의 눈에 처음으로 이채가 띄었다.

그녀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점이었다.

로힝야 난민의 취업을 허락한 것은 그들이 받는 임금에 붙는 세금 수입 때문이기도 했다.

“역시 서 회장에 대한 내 생각이 맞았어요. 받아들일게요.”

“총리님과 대화는 항상 어렵습니다.”

“내가 이런 저런 조건을 건 것은 그만큼 나로서도 내리기 쉬운 결정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로힝야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서 회장에게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서였어요.”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계 각국이 나서도 안 되는 일이라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건 모르지요. 아무튼 기대합니다.”

진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총리실을 나섰다.

코트라로 가서 이영석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 다를요?”

그가 뜨악한 표정을 지은 건 당연했다. 남의 일이었다면 진혁도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말씀드렸듯이 무조건 해야 할 일입니다. 나즈마 총리가 준비하는 동안 우리도 미리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여러 가지 민감한 점들이 포함되어 있는 거래라 이런저런 뒷말이 나오지 않게 매각 공고를 다시 내기로 했다.

덕분에 얼마 동안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날 암담한 표정의 이영석을 달래 주고는 미뤘던 AK 화장품 공장 시찰을 샤물과 함께 했다.

깔끔한 성격의 권영호답게 공장은 잘 운영되고 있었다.

공장장 리즈비가 노조 위원장이 되어 직원들과 경영자들의 중간다리 역할을 잘해 준 덕분이라고 했다.

* * *

방글라데시를 떠난 진혁은 두바이로 건너갔다.

AM 본부로 가자 갈리, 하마드, 아자데와 야맘이 기다리고 있었다.

AA와 달리 이곳은 이전보다 매출액이 떨어져 있었다. 쑤피넷이 아마존에 흡수된 영향이 컸다.

“대책은 뭡니까?”

“회장님이 돌아오셨으니 우리도 적극적으로 신 시장을 개척하고 제품들도 런칭해서…….”

“그건 아니지요.”

진혁이 말을 잘랐다.

“상대는 골리앗입니다. 그것도 세계에서 제일 큰. 그에 반해 우린 아주 작은 다윗입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도 쑤피넷과 같은 꼴이 되어 사라질 겁니다. 규모로 싸워서는 무조건 집니다.”

“그럼 어떻게…….”

“적이 아닌 내 장점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우리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무슬림에 특화된 제품?”

“맞습니다. 쇼핑하러 가는 백화점에는 수많은 제품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난 내가 원하는 제품 하나만 사서 나옵니다. 규모가 전부는 아닙니다.”

답을 맞춘 아자데를 보며 진혁이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 제가 농어민과 함께 동행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을 겁니다. 그들을 돕기 위해 한 사업이 아닙니다. 알라딘에게 필요해서 벌인 사업입니다. 제주로 동행 제품이 바로 그렇게 탄생한 겁니다. 거기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있습니다.”

“……!”

“잘 팔리는 제품을 가지고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런 제품을 생산하는 이를 적극적으로 찾아가십시오. 없으면 만드십시오. 내가 만들지 못하면 잘 만들 사람을 찾으십시오. 그러기 위해 소비 트렌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빠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게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알겠습니다.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그날 함께 저녁을 먹으며 회포를 푼 진혁은 다음 날 요르단으로 떠나겠다고 나왔다.

야맘과는 비트코인 투자에 대해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키프로스 정부의 예금에 대한 과세와 이어진 뱅크런 사태는 일반 국민들이 정부가 발행하는 화폐와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는 오히려 인터넷상의 가상 화폐인 비트코인을 일반인들에게까지 알리는 호재로 작용했다.

그로 인해 비트코인은 10달러 선을 가볍게 넘기고 100달러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차로 배웅하겠다는 갈리를 말리고 택시를 탄 진혁은 공항으로 바로 가지 않고 시내 외곽의 한적한 주택가로 갔다.

정원이 있는 단층짜리 주택의 벨을 누르자, 나온 이는 평상복 차림의 쑤피넷 전 회장 조나타스 하이다르였다.

“안부 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들어오시오.”

그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진혁을 안으로 안내했다.

소박한 실내에서 하이다르의 검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자 손수 음료수를 가져온 하이다르가 맞은편에 앉았다.

“집사람은 시내에 나가 혼자 있었소.”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오. 서 회장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들었소. 다 내가 못난 탓이지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이다르는 아마존의 인수 제의를 끝까지 거부하며 버텼었다.

아마존이 제안한 임시 총회를 받아들인 것은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서였다.

헌데 믿었던 동업자 와르다의 배신이 뼈아팠다.

그걸 사전에 알았다면 10%의 지분을 가진 진혁을 어떻게라도 불러들였을 텐데.

“이미 다 지난 일을 지금 와서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난 지금의 생활이 편하니 걱정하지 마시오. 다만 내가 유일하게 미안한 건 서 회장이오. 끝까지 같이 가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마지막 말씀은 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직은 끝난 게 아닙니다. 여기서 멈추시면 안 됩니다. 저랑 함께하시지요.”

“말씀은 고맙소. 하지만 솔직히 지쳤소. 그간 사업한다고 가정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습디다.”

하이다르의 입가에는 씁쓸하지만 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무조건 잡아서 끌고 갈 상황이 아니었다.

진혁이 일부러 옛일을 꺼냈다.

“처음 회장님을 만났을 때가 기억납니다. 쑤피넷을 중동과 아프리카의 아마존으로 만드시겠다며 알쇼핑을 넘겨달라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그때는 서 회장의 능력을 몰랐을 때라 주제도 모르고 떠든 것이었소. 미리 알았다면 아마 쑤피넷을 맡아 달라고 했을 거요.”

“아마존의 제크 회장이나 알리바마의 하윤 회장이 회사를 키우겠다는 생각만으로 일해 왔다면 지금의 제국을 이루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분들은 이커머스 강자가 되어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향해 달려온 겁니다. 아마존이나 알리바마는 도구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

“회장님이나 저나 중동과 아프리카의 이커머스 강자가 되겠다는 같은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온 겁니다. 쑤피넷이나 알쇼핑은 수단일 뿐입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좋은 말씀이오. 내가 조금만 젊었다면 당장 서 회장에게 받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오. 우리가 함께 꿈꿨던 일을 서 회장이 이뤄 주시오.”

“회장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도와주십시오.”

“내 시대는 이미 끝났소. 앞으로는 서 회장 같은 사람들의 시대가 될 거요. 그러니 그 말은 이제 그만합시다.”

거듭된 요청에도 하이다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진혁이 더 강하게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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