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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59화 (159/307)

159화. 욕심 내려놓기

“과거 없는 현재는 없습니다. 현재가 없는데 어떻게 미래가 온답니까? 회장님이 직접 현장에 뛰어 달라는 게 아닙니다. 경험을 나눠 달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알라딘을 혼자서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다 제 일신에 문제가 생기니 알라딘이 위험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장님을 잃었습니다. 지금도 버거운데 어떻게 우리의 더 큰 꿈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제크 회장은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쑤피넷만으로 절대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실질적인 중동 이커머스 강자는 알쇼핑이라는 걸 지금쯤은 깨달았을 거요.”

이제 겨우 자신의 말에 공감하는 하이다르에게 진혁이 마지막 말을 던졌다.

“쑤피넷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키고 싶다고 지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입니다. 저들은 제 시장에 들어와 제 심장에 칼을 겨눴습니다. 이제는 제가 저들의 시장으로 뛰어들어 정면 승부를 벌일 작정입니다.”

“상대는 엄청난 공룡입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시오?”

“혼자서는 못합니다. 하지만 회장님이 함께 하신다면 가능합니다. 공격에 앞서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의 바둑 격언 중에 ‘아생후살타(我生後殺他)’라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살고 나서 남을 공격하라는 말이었다.

“알라딘 그룹이 든든하게 버텨 줘야 제가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회장님이 알라딘을 지켜 주십시오.”

“……!”

“그룹으로 들어와 달라는 게 아닙니다. 외부에서 냉정하게 알라딘 그룹을 지켜봐 주십시오. 사모님과 여행도 다니십시오. 우리가 미처 가 보지 못한 중동과 아프리카 나라들이 많습니다. 신 시장의 가능성도 검토해 주십시오. 경비는 제가 모두 대겠습니다. 저와 알라딘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장님의 꿈을 이루십시오. 제가 뒤에서 지원하고 돕겠습니다.”

하이다르의 눈동자는 마침내 초점이 잡힌 채 반짝이고 있었다.

* * *

요르단 왕궁으로 가자 요르단 국왕도 함께 있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심려 끼쳐서 죄송합니다.”

“왕비의 걱정이 많았네.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됐네.”

“잘 오셨어요.”

라이나 왕비의 말소리가 떨렸다. 국왕의 말이 허언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그간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청춘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당연히 림 공주일 거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의외의 인물이었다.

“마르와.”

“회장님!”

마르와의 눈에서 바로 눈물이 떨어졌다. 다가가는 진혁의 눈가도 벌게져 있었다.

카심만큼이나 마르와도 자신에게는 특별한 존재였다.

어깨까지 흔들리며 우는 마르와를 안아 줄 수도 없었다. 중동의 독특한 풍습 때문이었다.

“달래 주셔도 됩니다. 요르단은 여러 민족과 종교가 섞여 있는 곳이라 괜찮습니다.”

국왕의 동생인 파이샬 왕자의 말에 진혁이 다가가 마르와를 안아 줬다.

한참 동안 흐느끼던 마르와가 겨우 진정이 되자 진혁이 물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여기서 서 회장을 제일 애타게 기다린 사람은 파이샬일 거네.”

“왕자님이요?”

“파이샬의 청혼을 받은 마르와 양이 자네가 허락해야 한다고 했거든.”

국왕의 말에 진혁이 다시 마르와에게 물었다.

“왕자님을 사랑하냐?”

“네. 왕자님도 저를 아껴 주세요. 허락해 주시면 왕자님과 함께하고 싶어요.”

“그래. 그게 네 선택이라면 나는 믿는다.”

다시 한번 마르와를 안아 준 진혁은 모두 함께 앉았다.

“그럼 이제 모두 한 가족이 되는 건가?”

“아직은 아닙니다.”

진혁의 단호한 말에 들떴던 분위기가 빠르게 식었다.

“왕실에 왕실의 법도가 있듯이 한국에도 한국만의 풍습이 있습니다. 서로 아무리 좋아해도 상대 집안에서 이쪽 집안을 무시하면 그 결혼은 안 됩니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네. 나 역시 왕비와 결혼할 때 말들이 많았지. 하지만 이렇게 잘 살고 있지 않나? 걱정 안 해도 될 거네.”

샤리프 국왕은 진혁이 라이나 왕비가 평민이라 받아야 했던 비난에 대해 우려해서 한 말이라 생각해 안심시켰다. 마르와도 평민이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제 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결혼할 때 남자 집안에서는 살 집을 장만하고 여자 집안에서는 예물을 보냅니다. 서로 형편껏 하는 것이니 그것이 무엇이든 책잡지 않는 게 예의입니다.”

“걱정 마세요. 국왕께서는 감사히 받으실 겁니다.”

라이나 왕비까지 나서서 설득하자 진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마르와의 머리에 경고등이 켜졌다. 진혁이 이런 미소를 지을 때는 꼭 뭔가 큰일이 벌어졌었다.

“마르와의 결혼 예물로 알라딘 동남아시아를 보내겠습니다.”

“회장님!”

“아무리 왕비님이라도 예물을 거부하시면 마르와의 결혼은 안 됩니다. 이유는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

“…….”

진퇴양난에 빠진 라이나 왕비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에 샤리프 국왕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이거 내가 서 회장에게 크게 한 방 맞은 것 같네. 받아들이겠네.”

“폐하.”

“서 회장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억지를 쓸 사람이 아니질 않소.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국왕은 국왕이었다. 진혁이 일부러 떠넘기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역시 국왕 폐하의 눈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알라딘 동남아시아는 지금의 상태가 제일 좋은 것 같아서입니다. 제 신분이 위험해지자 그룹도 휘청거렸습니다. 사업하다 보면 적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이번 일을 겪고 나니 저와 그룹을 분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딴마음을 먹으면 어쩌시려고요?”

“어디서 또 어려운 사람이 생겨서 도울 일이 생겼나 보구나 생각하겠지요. 왕비님은 그러실 분이잖아요.”

“…….”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 왕비님과 제가 누구 소유냐를 따져서 일했습니까? 뜻이 같으니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 성인군자는 아닙니다. 폐하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집트 가스전으로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챙겼으니 걱정 마십시오.”

진혁의 진심 어린 말에 샤리프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뜻이라면 받아들이는 게 맞는 것 같소.”

“폐하.”

“당신은 항상 가진 사람의 기부를 강조해 왔지 않소. 그걸 실천하겠다는 서 회장의 행동을 막는 것은 맞지 않소. 그의 뜻에 따라 옳은 일에 사용하는 게 보답하는 길이오. 감사히 받겠네.”

샤리프 국왕이 결론을 냈다.

다음 날, 진혁은 라이나 왕비, 마르와와 함께 차를 마셨다.

국왕과 왕자는 출근을 했다.

“이제 또 언제 뵙죠?”

“마르와 약혼식 때는 와야지요.”

왕가다 보니 바로 결혼식을 올릴 수는 없었다.

“바쁘신 줄은 알지만 로힝야족에게도 신경을 써 주세요. 미얀마 정부의 탄압이 다시 시작됐다는 소식에 걱정이 많아요.”

“그렇지 않아도 들렀다 오는 길입니다. 어렵게 공장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허락은 받았습니다.”

진혁은 나즈마 총리와 담판을 지어 국영 방직소를 매입하는 대신 로힝야가 난민 캠프를 나와 일할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을 들려줬다.

“고생하셨네요. 서 회장이어서 그 냉정한 나즈마 총리를 설득시킬 수 있었을 거예요.”

“제가 잘했다기보다는 마침 나즈마 총리도 로힝야 난민의 문제가 장기화될 것을 예상하고 고심하시던 중이라 운이 좋았습니다.”

이어 진혁은 기부 펀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오기 전에 야맘에게 확인했는데 잔고가 5억 달러가량이 되어 있었다.

60달러까지 떨어졌던 알리바마의 주가가 진혁과 존 지크 회장의 개입으로 공매도 세력을 몰아내고 100달러를 넘어섰다.

“대단하시네요. 검은 머리 짐이라 불리는 게 다 이유가 있었어요.”

“좋은 일에 쓰라고 하늘이 도와준 모양입니다.”

적당히 얼버무린 진혁이 자신의 멈췄던 계획을 밝혔다.

라이나 왕비가 즉각 호응했다.

“전 서 회장님의 계획에 찬성이에요. 단기적으로는 식량 지원이 맞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런 식으로 자립을 지원하는 방식이 옳아요.”

“감사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지는 현지 사정에 가서 상황을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다른 투자자께도 허락을 구하고요.”

“항상 서 회장님이 부러워요. 거침없는 능력과 그 자유로움이. 왕궁에 갇혀 사는 게 얼마나 답답한지 몰라요. 마르와 양이 왕실 가족이 되는 게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걱정되는 게 그 점이에요.”

“마르와는 영리한 아이입니다. 왕비님이 지금의 위치에 맞는 방법을 찾으셨듯이 마르와도 금방 찾아낼 겁니다. 안 그래?”

“회장님께 많이 배웠어요. 그리고 왕비님이 곁에 계시고요. 기대하시는 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이겨낼 테니 걱정 마세요.”

마르와 역시 당찬 의지를 드러내자 라이나 왕비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지어졌다.

* * *

요르단을 떠난 진혁은 이집트로 가서 카이로에 있는 알-아즈하르 대사원으로 찾아가 울라마 아메드를 만났다.

그는 그 모습 그대로 변한 게 없었다.

“신을 모시는 분이라 늙지도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미스터 서도 이전 모습 그대로 돌아와 줘서 고맙습니다.”

“모두가 울라마 덕분입니다.”

“아닙니다. 전 말씀만 전했을 뿐 모든 것은 신의 뜻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 덕분에 조흐르 가스전을 얻었다며 단단히 한몫 떼어 달라고 요구할 텐데 아메드는 그냥 미소만 지었다.

“인사도 드리고 부탁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다시 돌아오셨으니 알라딘 중동도 당연히 돌려드려야지요.”

“아닙니다. 그냥 계속 대사원에서 맡아 주십시오.”

“계속 말입니까?”

“알라딘 중동은 중동의 많은 무슬림인들이 만들어 준 것입니다. 전 단지 그들을 대신해서 관리를 해 왔을 뿐이고요.”

“하지만…….”

“이번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제 일신상의 문제로 알라딘 중동을 다시 위험에 빠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제가 운영할 수 있게만 배려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혁이 말을 마쳤지만 아메드는 답을 하지 못했다. 세상일에 초연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진혁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아메드가 입을 열었다.

“미스터 서의 뜻은 알겠습니다만 이건 제가 결정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대이맘께 함께 가셔서 말씀드립시다.”

“아닙니다. 그때도 그랬듯이 수고스럽겠지만 울라마께서 그분께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그렇게 간단한 말로 처리하기에는 너무 큰일입니다.”

“알라딘 중동이 아무리 커도 조흐르 가스전만 하겠습니까? 대이맘께 이 말씀도 전해 주십시오. 친구의 선물은 거절하는 게 아니라고요. 그럼 저도 받은 선물을 돌려드리겠다고요.”

말을 마친 진혁의 입가에 걸린 차가운 미소를 보고 아메드는 그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감이 오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대사원을 나온 진혁은 카심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SEZ의 동성F&B의 공장을 찾아 핫산 사장과 직원들을 독려해 주고 방글라데시로 넘어갔다.

나즈마 총리가 새로 발표한 국영 방직소 매각 공고에 따라 소르니 공장에 대한 입찰 서류를 제출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다카 공항 입국장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진혁이 반가운 얼굴이 보이자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공장장님! 여깁니다, 여기.”

“아이구, 허리야. 이런 종간나 애미나이 새끼. 가까우니끼니 금방 올 끼라고!”

권기남이 당장 화부터 냈다.

“아무도 없는 집에만 계시면 뭐 합니까? 움직일 수 있을 때 해외여행도 다니시고 그래야지요.”

“내래 어디 한두 번 속았냐. 날래 말해 봐라. 또 뭔 일을 시킬라고 부른 기가?”

방글라데시는 한국과 거리가 멀진 않지만 직항기가 없어 두세 번 경유하는 바람에 열두 시간이나 걸렸다. 나이가 적지 않은 권기남에게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진혁이 그를 부른 것은 그만큼 기계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없어서였다.

진혁이 얼른 부축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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